수취인 불명, 발신인 불명의 엽서들
엽서를 썼다.
너는 언제나처럼 강인하게 살아가겠지만, 나도 너와 같으니 그러하지만
나는 여태 수년 전에 시작한 애도를 끝내지 못했다고.
여기저기 휘적휘적 걸어 다니며 곳곳에 너에게 쓰는 엽서를 남겨두었다.
언젠가 네가 이곳에 오면 쉽게 찾을 수 있도록.
물론 그것은 말로 쓰인 엽서가 아니어서, 물질로 남겨둔 엽서가 아니어서
너는 끝끝내 그것들을 찾지는 못할 것이다.
이 애도가 언제쯤에나 끝날지 모르겠으나
부디 언젠가는 내가 들었어야 할 그 말이 나의 새로운 주소로 와 닿기를 바란다.
수취인 불명, 발신인 불명.
유럽은 내게 그런 곳이다.
너와 나의 전언들이 공중으로 흩어져 이곳저곳에 숨은 그림 찾기 하듯 깃들어 있는
아름다워서 슬픈 땅.
너를 처음 만난 건 쾰른으로 떠나기 며칠 전 더블린에서였다. 이른 오후 카페의 창을 마주하고 앉아 그림을 그리던 너의 옆모습은 아름다웠다. 처음 주고받은 문자를 시작으로 우리는 내리 7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시간도 시각도 잊게 하는 그 대화들은 내가 쾰른에 도착해서도 그칠 줄을 몰랐고, 서로에 대한 호기심은 동트기 전까지 지속되는 대화에도 충족되지 않았다. 분명 홀로 떠나왔는데, 동행이 늘 내 옆에 서 있는 것 같았다. 오랜만에 몽글몽글 예쁜 마음이 들었고, 나는 그 마음과 가장 닮은 엽서를 샀다. 나의 그림자 동행이 되어 주어 고맙다며, 이제는 더블린에서 만나 목소리로 대화하자는 짧은 내용을 적었다. 써놓고 보니 필체가 성에 차게 예쁘지 않아 다음 날 엽서를 새로 한 장 더 샀다. 너와 나는 앞면엔 같은 그림이 인쇄되어 있고 뒷면엔 같은 내용이 쓰인 쌍둥이 엽서를 한 장씩 나누어 가진 셈이 되었다. 더 이상 '우리'라는 사적인 공동체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해도 나눠 가진 꼭 같은 엽서들이 어떤 교감이 한 때 그곳에 있었음을 증명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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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기 싫은 일을 끝까지 미뤄두다 마감 전 날 밤을 새우는 사람처럼 미루고 미루던 엽서들을 썼다. 떠나오기 직전까지 함께 일도 하고 술도 마시고 마음을 엮었으나 이국으로 떠나오는 것마저 전화 한 통의 통보로 마무리해버렸던 오랜 친구에게, 서로의 사이에 놓인 물리적인 거리가 멀수록 심리적으로 가깝게 느껴지는 가족에게, 해외에 소포를 보내본 일 없는 엄마 대신 책과 음식, 편지, 심지어는 용돈까지 보내주는 다정한 동무들에게. 나는 숙소 앞의 태국 음식점에 앉아 주문한 음식을 기다리며, 잃어버린 식욕에 그래도 살긴 해야겠다며 면발을 입에 구겨 넣으며 '미안해' '고마워' '사랑해'라는 말들을 적어 내려갔다. 짜디짠 소스 향이 온 공기를 점유한 테이크어웨이 음식점에서 하기에는 부적절한 말들 같아 보일 수는 있겠으나, 언젠가는 꼭 해야 할 말들이었다. 간이 맞지 않는데 양까지 너무 많은 팟타이 탓에 내 입 안은 텁텁하기 그지없었지만, 드디어 미루던 숙제를 끝마친 내 마음은 한결 가벼웠다. 그 말들을 전하기까지 필요 이상의 오랜 시간이 걸렸던 것처럼 내 엽서들이 그들의 손에 쥐어질 때까지도 몇 주의 시간이나 더 필요할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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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서 처리하기 힘든 마음이 있을 때, 그러나 언젠가 한번은 꼭 전해야 하는 말이 있을 때 바다 건너의 땅에서 엽서에 적어 보내는 것만큼 좋은 방법은 또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국의 우표가 붙여진 엽서는 근사하고, 예상치 못한 순간에 받아 본 소식은 언제나 반가우며, 몇개의 대륙을 건너 마침내 도착하기까지 차분히 기다릴 수 있으니까. 분실 위험이 있어서 어쩌면 그들에게 도착하지 않기를 바라는 희망도 가져볼 수도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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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경이 아름다운 그 도시를 차분히 걷는 동안 이제는 어떤 영화를 보고 즐거워 할지 모를 그대에게 끊임없이 엽서를 썼다. 그대에게 보내는 엽서에만은 절대로 펜을 들지는 않았으나, 대성당의 맞은편에서 야경을 바라보며 주절주절 안부를 물었다. 본연의 아름다움으로 언제까지고 강인하게 살아갈 것을 믿는다고. 듣고 싶은 말이 참 많았는데 여태 나는 그 답을 알지 못해 조금 아쉽다고. 유럽은 항상 이렇게 아름다움을 무기 삼아 나를 외롭게 만든다고. 이 아름다움을 함께 나누면 좋았을 텐데 하고. 2박도 길게 느껴질 작은 도시에 혼자 여행을 온 나는 그렇게 4박 5일 동안 수취인도 발신인도 없는 우편물을 여기저기에 흩뿌리고 다녔다. 듣지 못한 말이 여태 나를 아쉽게 만드는 것처럼 하지 못한 말 또한 여전히 나를 괴롭히니 어쩔 수 없게도 나는 주절주절 말이 많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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쾰른에서 돌아왔다. 너와 처음 조우했던 카페에 앉아 네가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다른 모국어를 가진 내향적인 두 사람이 단둘이 만나 마주 보고 앉아있자니 그 어색함에 커피의 맛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차라리 산책을 나가자고 제안했다. 너와 나는 추운 겨울 밤 이미 식어버린 커피를 들고서 강변을 따라 걸으며 차분히 대화를 이어 나갔다. 같은 모국어로 대화를 해도 말이 통하지 않아 절망스러운 경험에 비하면 전혀 곤욕스럽지 않았다. 내리 3시간을 쉼 없이 걸었다. 그날 밤 그 작은 더블린에 우리가 함께 스치지 않은 골목이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너는 누군가로부터 손글씨가 쓰인 엽서를 받아 본 건 태어나 처음이라며 나의 마음을 닮은 그 엽서를 받아 들고 진심으로 기뻐했다. 더블린으로 떠나오기 전 단단히 봉해두고 온 박스 안에는 수 백장의 엽서가 들어있는데, 너는 오늘이 처음이구나. 사소하지만 의미 있는 처음이 되었다는 생각에 나도 함께 기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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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주 뒤 엽서를 보낸 이들에게 살며시 연락을 해보았다. 안녕, 오랜만이야, 참고로 나는 무사해, 엽서 보냈는데. "미안해"라는 말이 쓰인 엽서는 도착하지 않았다고 했다. 누굴 탓하겠냐며 아쉬워하는 마음은 진심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끊어진 인연에 오지랖을 부린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다정한 나의 가족과 동무들은 "고마워"라는 말이 쓰인 나의 엽서가 잘 도착했으니 걱정할 것 없다고 했다. 우편배달 사고마저 이렇게 정직하다. 노력을 요하는 관계는 끝까지 노력을 요하고, 언제나 그 자리에 덤덤하고 따뜻하게 머물러 주는 이들에게는 엽서마저 순식간에 안전히 도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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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글로 쓰이지 않은 채 곳곳에 흩뿌려진 그 엽서는 여전히 쾰른 땅을 뷰유하고 있을 터였다. 여태 할 말이 남아 있는 것은 아닌가, 나 역시 받아 볼 엽서가 있는 것은 아닌가. 앞으로 살아가며 얼마나 더 많은 엽서를 써야 서로의 소식이 궁금해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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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이 글을 고쳐 쓰며 엽서들의 행방을 쫓아 보았다. 박스 안에 봉해 두었던 수백 장의 엽서는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대차게 내다 버렸다. 그 쌍둥이 엽서는 한 동안 회사의 내 책상 위에 붙어 있었는데, 왠지 낯이 뜨거워져 뒷면을 돌려 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대가 한참을 공들여 쓰고도 나에게 부치지 않았다는 그 엽서는 지금쯤 내가 결국 듣지 못한 말과 함께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 것이다. 오직 "고마워" 라는 말이 쓰인 그 엽서들만이 당신들의 비밀스러운 장소 어딘가에 안전하고 따뜻하게 누워 있겠지. 지금의 우리들처럼 이렇게 무사하고 평안하게.
지난 일은 지난 일일 뿐이라는 듯 이렇게 고요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