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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anghee An May 20. 2016

날카로운 첫 여행의 추억

역마의 시작, 탱고의 나라에서의 5주

 몸은 이곳에 있지만 마음 한구석을 늘 지구 반대편의 어딘가에 놓고 온 것 같은 느낌으로 살게 된 것은 2009년 가을 이후부터다. 공교육 12년을 부자 동네에서 마친 내가 비행기를 난생 처음으로 타 본 때는 수학여행으로 제주도에 갔던 열일곱 나이였다. 초등학생 시절부터 내 급우들은 해외에 나가보는 것 쯤은 차라리 일상에 속하는 친구들이 허다했고, 나의 사춘기 시절 비루한 현실과 낯선 문화와 환경에 대한 동경은 불화했다. 그 극심한 불화는 자연히 나의 열등감을 키워냈고, 대학에 들어간 이후 그 열등감의 실체를 정면으로 마주했다.



 아무리 요목조목 뜯어 보아도 예쁜 구석이 없는 그 실체를 마주하다 보니 그것을 어떻게든 극복해야 내가 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어쩌면 생명의 위협에 대처하는 본능적인 자기 방어에 가까웠다. 게다가 그때는 낯선 나라에 대한 호기심을 도무지 억누를 수가 없을 지경에 이르른 상태였다. 나의 내면 어디에선가 간절함이 발동하여 이 간절함을 푸는 것 이외에는 도무지 다른 그 무엇에도 집중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원해서 행동했다기 보다는 행동하지 않으면 큰일이 날 것만 같아서 행동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대학 학우들의 워크샵, 졸업 작품도 일절 돕지 않고 한 학기 동안을 학교 도서관에 박혀 일만 했다. '집-강의실-도서관'의 동선을 하루도 빠짐 없이 6개월을 반복했다. 주말에 카페에서 알바하며 받은 푼돈은 생활비로 쓰고, 도서관에서 알바해 받은 근로 장학금은 그대로 계좌에 차곡차곡 모았다. 내가 생각해도 참 독했다. 경비가 모였다.



 그리고, 떠났다. 



 그 모든 것이 민망할 정도로 처음이었다. 스물한 살에 처음 밟아 보는 이국의 땅이었다. 여권 만들기, 항공권 예약하기, 숙소를 결정하고 예약하기, 배낭을 구입하고 짐 꾸리기. 심지어는 여행지를 선택하는 것마저 처음이었다. 그 때의 나는 아직 아이였고, 의지박약이었고, 그 무엇보다도 겁쟁이였다. 간절히 바라고 바라왔던 '첫 여행'이었지만 출발 날짜가 다가올수록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이 모든 일을 물러야 할까.'하고 겁을 냈다. 지금 생각해도 첫 해외 여행을 가까운 일본이나 태국도 아닌 지구 반대편 아르헨티나로 홀홀단신 떠나는 스물한 살의 나는 과연 용감했고, 어쩌면 참으로 무식했구나 싶다. 남들에겐 대수롭지 않아 보일는지 몰라도 내겐 엄청난 용기와 실천를 요하는 일이었다.



 나는 마침내 비행기 환승에 실패해 국제 미아가 될 수도 있다는 공포마저 극복하고는 한국을 떠난지 마흔 시간만에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 아이레스 땅을 밟을 수 있었다. 공항에 내려 시내로 나가는 셔틀 버스를 타고 난생 처음 보는 모양새의 나무와 거리의 풍경을 보면서 '이대로 공항으로 돌아가 한국에 가도 나는 너무 행복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도무지 형언할 수 없는 성취감과 행복이 나의 정수리에서부터 발 끝까지를 전율시켰다. 당시에는 몰랐지만 그때의 나에게 있어 여행이란 '간절히 염원했던 어떤 어려운 일을 혼자 힘으로 이루어 나가는 것'이었다. 내 첫 숙소의 대문 앞에 서서 메모에 적힌 주소를 확인하며 짐짓 비장하게도 '이것으로 다 이루었다.'는 생각을 했던 것도 같다. 그 뒤로 5주 간의 여행이 얼마나 즐겁고 행복했는지, 또 다른 여행을 염원하며 떠난 인도에서의 시간들이 얼마나 값진 것이었는지, 그 여행들이 내 인생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끼쳤는지에 관하여는 굳이 이야기할 필요도 없을 것 같다.



 길에서 만난 사람들은 늘 나를 독립적이고 개별적인 영혼으로 대해 주었다. 나이도 직업도 중요치 않았다. 그들은 때로는 비루하고 외로웠지만 대부분의 경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유롭고 멋졌다. 이런 삶의 방식도 가능하구나 싶었다. 그렇다. 사람이 살아가는 방식이 수만 가지가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아니, 사람의 수 만큼의 각기 다른 삶의 방식이 존재해야 한다는 것을 길에서 배웠다. 공교육 12년과 대학 생활 3년 동안 찾지 못한 것을 1년의 휴학 기간 동안 떠났던 두 번의 배낭 여행에서 찾을 수 있었다. 2009년 가을, 지레 겁을 먹고 떠나기를 포기했다면 나는 아직도 한반도 땅을 한 번도 뜨지 못한 채 열등감과 애증의 동거 생활을 유지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또한 내게 있어 첫 여행은 세상에 유토피아는 없다는 걸 배우는 과정이기도 했다. 여행이라고 해서 늘 행복한 것은 아니라는 것. 내가 발 붙이고 살아가는 이 땅에 살아가는 사랑하는 이들이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것. 아무리 맛나고 멋진 것인들 혼자서는 별 의미 없다는 것 또한. 



 그곳에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엄청난 성취감을 맛보며 앞으로의 인생은 그 어떤 어려움도 다 극복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아주 강렬한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천국을 맛 본 후 돌아간 한국에서의 삶은 그 질에 있어서 낙차가 너무나 심했고, 결국 극심한 향수때문에 거의 우울증 수준으로 진창을 뒹구는 나날이 한동안 지속되었다. 그 진창에서 곧 그곳에 돌아가리라 마음을 먹었지만, 이렇게 6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다시 돌아가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그 때는 잘 알 수 없었다. 그래서 항상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여행지를 대하려 애쓰지만, 나는 왠지 모르게 여전히 게으른 여행자로 살고 있다. 할 수 있는 것을 다 해버리고, 갈 수 있는 곳을 다 가버리면 왠지 다시 이곳에 올 이유가 없어질 것 같아서. 다시 돌아갈 궁리를 만드는 것이다. 이것 또한 나는 길에서 배웠다. 다 해버리지 않는 것, 언젠가 돌아갈 구실을 만드는 것. 비록 그것이 너무나도 어려운 일임을 잘 알고있다 하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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