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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anghee An Aug 10. 2016

이 곳에서는
벌써 가을 냄새가 난다

많은 것들이 들고 나도 일상은 지속된다


1.


 지금 한국은 1994년도 이후 최악의 더위라는데, 나는 이곳에서 어제와 오늘 가을 냄새를 맡았다. 매일 아침 6시 반에 기상해 일과를 시작하는데, 그 이른 아침 쏟아지는 햇살은 그제와 다름이 없었지만 어제의 아침 공기는 명확하게 달랐다. 더 청아하고, 더 시렸으며, 분명 공기에 미세한 가을이 담겨있었다. 그리고 나는 오늘도 종일 같은 향기를 맡는다. 입추가 지났다더니, 항상 느끼지만 절기는 이렇게 정직하다. 해도 많이 짧아져서 밤 11시에도 훤히 밝던 하늘이 이제 9시가 되기도 전에 어두컴컴해진다. 여름이 가는 것이 아쉽고 슬프기만 하다. 습기에 취약하고 더위를 잘 먹어 여름만 되면 헤롱거리던 한국에서의 나는 절대로 할 수 있는 말이 아닌데, 어째 날 흐리기로 유명한 유럽의 두 나라에 1년 가까이 살고 있으니 나 또한 이렇게 현지화가 되어가는가 보다. 




2.


 지난 겨울 여행을 할 때 호스텔에서 만나 하루 저녁과 아침을 함께 보낸 뒤 꾸준히 연락하고 있는 포르투갈 친구가 지금 서울을 여행하고 있다. 꽉 채우지도 않은 하루를 봤을 뿐이지만 꾸준히 연락하는 것도 신기한데, 그 친구가 혼자 그 더운 한국을 여행하고 있다니 더욱 신기할 뿐이다. 내가 한국에 일찍 돌아갔다면 좋은 동행이 되어 주었을 텐데 하는  아쉬운 마음이 들어서 서울에서 내가 좋아하는 장소를 정리해 메일을 보내고 꾸준히 문자를 하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그 여행 직전에 만났던 너도 몇 주 뒤면 한국으로 여행을 갈 것이다. 조금은 묘한 우연의 일치. 다만 너에게는 계속 문자를 보내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무얼 먹었는지, 기분은 어떤지 물을 수는 없을 것이다. 겨울의 독일에서 너는 나의 그림자 동행이 되어주었지만 여름의 한국에서의 나는 정말로 그저 그림자 그 자체가 될 것이다. 우정은 길고 사랑은 짧다는, 어쩌면 이보다 더 사실일 수는 없는 말. 




3.


 급작스럽게 일주일의 휴가가 생겼다. 네덜란드의 고등학교 동창 집에 놀러 갈까, 파리에 가서 대학 동기를 만날까, 아니면 언젠가는 가보리라 생각했던 베를린에 가서 홀로 여행을 할까 하다가 결론적으로는 마드리드에 간다. 더블린에서 어학원 다닐 때 몇 주간 같은 반이었던 스페니쉬 언니네 집에서 머물게 될 것이다. 나이를 물은 적은 없지만 아마 40대일 것이고, 남편과 둘이 살고 있다. 직장 휴가 동안 어학연수를 하다가 스페인에 돌아간 뒤로도 꾸준히 사진을 보내주고, 엽서도 써주고, 한국 관련 책도 읽고, 스페인에 너의 집이 있다며 맘 편히 놀러 오라 말하곤 했다. 그러나 막상 정말 집에 놀러 가도 되겠냐는 말을 하려니 민폐는 아닐까 싶어 망설여졌는데, 역시 예상대로 너무 기뻐하는 반응이어서 내친김에 비행기 표를 사버렸다. 스페인에 사는 현지인 친구가 있다니 조금은 행복하다. 친절하고 사려 깊은 분이라 분명 융숭한 대접을 해줄 것이 분명하여 런던에서 공수할 수 있는 좋은 선물이 무엇이 있을까 고민 중이다. 성수기에 급히 비싼 비행기 표를 예약하느라 더 거렁뱅이가 되었으나 좋은 차 세트 정도는 마련할 수 있을 것 같다. 




4.


 사람들이 끊임없이 드나든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저 왔다 가버릴 뿐이지만 그중 일부는 물리적으로 떠났을지라도 내 안에 어떤 인상을 남긴다. 다정하고 친절하고 매력 있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내가 살아온 세계가 얼마나 좁고 협소했는지 최근에 뼈저리게 느낀다. 사람들은 각기 다르며, 동시에 비슷하다. 매력 있는 사람들이 가진 특색은 각기 유일무이하며, 이름도 얼굴도 기억할 수조차 없는 사람들의 특색은 내게 보이게끔 디자인되지 않았다. 애석하게도. 그러나 분명 그들의 특색을 볼 수 있는 이들이 있을 테고, 그들은 나름의 세계를 구축하여 살아가고 있을 테다. 끌림이라는 것, 취향이라는 것은 무서운 것임을 실감한다. 





5.


 오랜 세월 동안 아주 끈질기고 집요하게 내 꿈에 등장하는 사람이 있다. 인정한다. 언젠가 한 번은 꼭 만나고 싶다. 모두 어른이 되었으니 성숙해진 모습으로 가벼이 차를 한 잔 하고 싶다.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까지 집요하게 생생한 모습으로 꿈에 나올 필요까지는 없지 않은가. 나의 무의식은 대체 간밤에 무슨 짓을 하고 있나. 미션을 완수할 때까지는 계속 같은 꿈을 꿀 텐데, 그럴 수 없을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내 무의식은 왜 이리도 나를 재촉하는가. 재촉하지 마라.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우연이 만들어줄 일이고, 그건 일어나도 그만 안 일어나도 그만인 일이라는 뜻이니까.



6.


 인간으로 태어났으니 외로움은 어쩔 수 없겠지. 왜 인간으로 태어나 마음을, 감정을 갖게 했느냐고 억울한 마음 가져봐야 소용이 없겠지. 태생이 낙관적인 사람도 있는데 하필 왜 나는 우울한 기질을 갖고 태어나게 했느냐고 마땅히 따질 만한 곳도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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