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한 침묵 속의 이별
한국은 여느 여름과 마찬가지로 폭염이 지속되고 있다는데, 종일 비가 오고 날이 흐린 이곳의 현재 기온은 16도. 8월의 한국에서는 상상도 못 하였을 일이지만 나는 며칠 전에 자라에 가서 벼르고 벼르던 라이더 자켓을 하나 장만했고, 오늘은 무려 그것을 입고 외출을 했다. 이곳도 얼마 전까지 이상 기온으로 32도를 웃도는 폭염이 일주일 정도 지속되었고, 나는 그 말도 안 되는 무더위에 더위를 먹고 종일 맥을 추리지 못했다. 8월의 첫날 이렇게 비가 오고 서늘한 감각마저 느껴지니 상쾌하기가 그지없다.
대체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평온한 일상이 지속되고 있다. 좋게 말해 안정적이고, 사실 나쁠 것은 하나도 없지만 굳이 안 좋게 표현하자면 무료하다. 무료함과 권태는 시나브로 젖어드는 것인지 종일 집에만 있어도 심심하지가 않고, 시간 가는 줄을 모르겠다. 세상에서 가장 다이나믹하고 문화적으로 풍요로운 도시 중 하나인 런던에서 일주일에 한두 번 외출을 할까 말까인 것은 조금은 부끄러운 일이다. 그래서 이 부끄러움을 조금은 극복하고자 새로 산 옷을 입고 집 근처에 있는 내가 가 본 중 가장 근사한 카페에 와서 자리를 잡고 앉아 호사스럽게 5파운드짜리 차를 시켜 두고 앉아 있다. 비록 점심은 라면에 밥을 말아먹었을지언정 나를 위해 이 멋진 장소에서 머그잔에 덜렁 티백 하나 들어 있는 차가 아닌, 니트 옷을 예쁘게 입은 주전자와 오래된 찻잔, 두 가지 종류의 설탕, 우유까지 끼어 나오는 차를 시켜 두고 BBC 클래식 라디오를 들을 수는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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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희경 작가의 디어 마이 프렌드를 보았다. 드라마라면 시작도 하지 않는 내가 무려 드라마를 다운 받아 가만 앉아 며칠 동안을 열심히 시청했다. 물론 도무지 드라마식 로맨스에는 적응이 되지 않아 고현정과 조인성이 함께 붙는 씬은 모두 스킵을 했지만, 연륜이 엄청난 배우들이 앙상블을 이루는 모습은 거의 장관에 가까웠다. 노희경 작가가 세상을 바라보는 세계관, 극 중 고현정의 대사처럼 어른들의 경험 앞에 노련함은 나를 압도시키고 한 없이 작아지게 만든다. 얼마나 더 살아야 나 또한 그리 지혜로워질 수 있을까 싶지만, 나는 알지. 우리 모두 제 나이를 처음 살고 있다는 것을. 처음 사는 나이는 언제까지고 우리 모두에게 늘 새롭게 느껴지고 어려울 것이라는 것을. 어찌 생에 익숙해질 수 있을까.
고현정과 고두심이 모녀로 나온다. 그들의 관계는 나와 내 엄마의 관계와 꼭 닮아있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극 중에서 엄마에게 그토록 싹수없고 빡빡 대드는 것처럼 묘사되는 고현정이 실제의 나보다 한 9배 정도는 착하다는 것뿐. 엄마 생각이 많이 난다. 엄마와는 통화를 하지 않은 지 한참이 되었다. 아직도 스마트폰을 쓰지 않는 엄마 때문에 전화 카드를 사서 엄마에게 전화를 해야 하는데, 그래야 하는데 싶다가도 막상 행동으로 옮겨지지가 않는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말은 자식이 부모에게 할 수 있는 말은 아니다. 자식은 자고로 부모에게 최대한 자주 전화를 걸어 종알종알 근황을 전하며 그들을 귀찮게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알고 있음에도 여전히 내 마음 깊은 곳의 무언가는 그녀에게 전화 걸기를 거부하고 있다. 모른 척한다고 몰라질 턱이 없건만, 나는 여태 시침을 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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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일이다. 우리는 결코 함께 행복해질 수 없었고, 그토록 간절히 바라던 끝을 드디어 맺게 되었으니까. 마침내 완전한 침묵 속에서 그 어떤 마지막 인사도 나누지 않은 채 완전히 이별하게 되었으니까. 좋은 일이다, 좋은 일이야. 즐거우려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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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곳에서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일이 아주 고통스럽지만은 않다. 밑도 끝도 없는 불안 속에 두 다리를 풍덩 담근 채로 살아갈지언정 적어도 고요하고 평화로우니까. 곧 문을 닫는 이 카페를 나서기 직전 너의 소식을 알게 되었고, 아직 주전자 안에 한참이 남은 차를 느긋하게 음미하지 못한 채 급히 들이키고 있다고 한들 나는 괜찮을 것이다. 괜찮아. 집에 가면 와인이 있고, 내가 좋아하고 존경하는 사람들이 있고, 나의 따뜻하고 아늑한 보금자리가 있으니까. 비를 뚫고 집에 들어가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나는 일상을 다시 이어나갈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