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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anghee An Dec 05. 2016

<나, 다니엘 블레이크>

제도에 의해 모욕되는 인간의 존엄과 그것을 회복시키는 연대

 (영화의 결말을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몇몇 중요한 장면들이 리뷰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를 아직 보지 않으신 분들은 읽기 전에 참고해 주세요.) 



 유년기부터 영화를 사랑해서 대학에서 영화를 전공했고, 일평생 글을 쓰며 살고 싶다는 꿈을 꾸면서도 막상 영화 리뷰를 쓰는 것을 즐기지는 않는다. 그러나 가끔 쓰지 않고서는 도저히 견디지 못하게 하는 영화를 종종 마주하게 되는데, <나, 다니엘 블레이크>라는 영화가 그렇다. 오랫동안 존경해 마지않는 켄 로치 감독의 영화여서 그런 것만은 아니다. 이 영화는 관객의 가슴을 찢어지도록 아프게 하면서도 그 태연한 유머와 애정 어린 시선으로 그 찢어진 마음에 연고를 발라 준다. 바르는 순간은 따끔하지만 그 연고의 효능은 의외로 강력해서, 극장을 나서고 난 후로부터 며칠 동안이나 영화에 대해 곱씹게 만드는 것이다. 



 올해 나이 여든에 이 영화를 통해 칸 영화제 두 번째 황금 종려상을 받은 켄 로치는 '블루 칼라의 시인'이라 불리는 영국의 거장 영화감독이다. 그는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한 후, 빈곤 계층의 삶을 담아내는 다큐멘터리로 커리어를 시작했다. 시종일관 영국 노동자 계급에 대한 따뜻하고도 냉철한 시선을 거두지 않았으며, 급진적인 좌파 성향을 지닌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의 시선이 영국 밖으로 향하는 때도 종종 있긴 한데, 과연 흥미롭게도 <보리 밭을 흔드는 바람>, <지미스 홀> 같은 아일랜드 독립운동에 관한 영화를 만드는 때가 그렇다. 영국은 수백 년 동안이나 아일랜드를 식민 지배했던 나라다. 과연 일본인 감독이 조선의 식민 지배에 대한 영화를 이토록 진지하고 꾸준하게 만든다면 한국인인 우리는 어떤 기분이 들까 생각해 보게 만드는 대목이다. 



 켄 로치 감독은 늘 그랬듯 <나, 다니엘 블레이크>에서도 영국의 노동자 계층에 대한 애정을 드러낸다. 우리의 친애하는 주인공 다니엘 블레이크, 그는 영국의 북동쪽에 위치한 뉴캐슬이라는 도시에서 일평생을 목수로 성실하게 일하며 살아왔다. 전 세계의 어느 동네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처럼 평범하고 적당히 꼬장꼬장한, 그러나 지적이고 다정한 중년의 남자다. 최근 악화된 심장 건강 때문에 쓰러진 그는 당장 일자리로 돌아가고 싶어 안달이 났지만, 의사는 그의 심장이 견디지 못할 테니 당분간 일을 쉬라고 권고한다. 그러나 그를 담당하는 복지 공무원은 심장 이외의 모든 신체 부분이 건강해 보인다며 연금 지급을 거부하고, 연금이 아니면 당장의 생계를 꾸릴 수 없는 그는 관공서를 찾아다니며 재심사를 받기 위해 노력한다. 불행하게도 모든 절차는 지나치게 복잡하고 관료적이다. 공무원들은 형편없이 불친절하고, 컴퓨터라고는 만져본 적도 없는 그에게 온라인으로 모든 서류를 제출하라고 지시한다. 다니엘이 그 모든 비효율과 사투를 벌일 무렵, 두 아이를 데리고 런던에서 막 이주해 온 싱글맘 케이티 또한 이주자 지원금을 받기 위해 관공서를 찾는다. 초행길에 익숙지 않아 고작 10분 늦었을 뿐인데, 공무원은 그녀와의 작은 마찰 후 그녀를 아예 심사에서 제외시켜 버린다. 그것을 지켜보던 다니엘은 케이티를 위해 직원과 언쟁을 벌이다 함께 쫓겨나 버린다. 다니엘과 케이티의 단단한 연대와 진실한 우정이 시작되는 순간이다.



 이 영화에는 몇 개의 인상적이고 눈물겨운 시퀀스가 있다. 슈퍼 마켓의 매니저와 독대한 케이티의 가방에서는 계산을 하지 않은 생리대와 데오드란트, 면도칼이 나온다. 그녀는 자신의 여성성을 돌볼 수가 없다. 그녀의 형편으로 정당하게 값을 치를 수 있는 것은 아이들을 위한 음식뿐이다. 무료 음식을 배급받기 위해 푸드 뱅크에서 몇 시간이나 줄을 서는 일은 과연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다. 그러나 굶주림에 우아하게 저항할 수 있는 사람은 과연 세상에 몇 없을 테다. 그녀는 결국 아이들 몰래 통조림을 까서 입에 털어 넣다가 당혹스러운 순간을 맞는다. 다니엘 또한 결코 존재하지 않는 직업을 찾기 위해 수기로 작성한 이력서를 들고 동네를 누빈다. 구직 활동을 증명하지 않으면 수당을 받을 수 없으니까, 그렇다면 그 또한 조만간 푸드 뱅크를 찾을 수밖에 없을 테니까. 



 우리가 배고픔과 가난에 의해 막다른 골목으로 몰릴 때, 우리의 존엄은 모욕당하고 어쩌면 짓밟히기까지 한다. 제도는 복지의 사각지대에 있는 가난한 사람들을 지켜주지 못한다. 영화에도 언급되었 듯, 가장 먼저 길바닥에 나앉는 사람은 성실하고 정직한 보통의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 착한 사람들은 서로를 돕는다. 다니엘이 케이티를 도왔듯, 다니엘의 이웃이 그를 도왔 듯. 취약 계층의 사람들이 서로를 지켜내는 강력한 연대가 이 영화의 가장 강력한 지점이다. 제도에 의해 그 도움의 필요성이 무시된 이들은 연대하고, 그 연대를 통해 스스로의 존엄성을 지켜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겨내야 한다는, 단지 '생존'하는 것이 아니라 주체적으로 삶을 꾸려나가고야 말겠다는 그 의지가 우리를 동물과 구분 짓는다. 그러나 다니엘이 보조금을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닐 때, 그는 개처럼 다뤄졌고 결국 그는 "I'm a man. Not a dog."이라는 말을 남긴다. 



 지구 상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 중에 하나인 영국의 현실도 한국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어쩌면 만국 공통의 문제일 이 상황을 한국의 현실에 대입해 봐도 큰 이질감이 없다. 세월호 희생자들과 고 백남기 씨의 유가족을 돕는 시민들, 이 추운 날씨에 광화문 거리에 6주째 뛰쳐나온 셀 수도 없는 모든 보통의 사람들 모두가 한국의 다니엘이고 케이티다. 다니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유머를 잃지 않으며 의연하다. 고 백남기 씨의 딸들 또한 그 지독하고 오랜 싸움 동안에도 품위를 잃지 않고 동시에 또 얼마나 강인했는가. '사람이 자존심을 잃는 순간 모든 걸 잃기 마련'이라는 다니엘의 대사처럼 우리는 취약하여 너무나도 쉽사리 모든 것을 잃을 수 있다. 그러나 이 영화는 서로가 서로를 지지하고 돕는다면 어려운 순간에서도 한 줄기 빛을 발견할 수 있다는 희망을 보여준다. 그 결말이 얼마나 비극적이었든 간에, 감독이 고발하는 제도의 횡포가 보통의 사람들을 얼마나 모욕하였든 간에 상관없이 말이다. 



 인간에게는 절대 빼앗기지 말아야 할 기본권이 있다. 그러나 그것들이 지켜지지 않는 현실을 방관하는 정부와 제도가 <지미스 홀> 이후 은퇴를 선언한 켄 로치 감독으로 하여금 다시 메가폰을 잡게 만들었을 것이다. 아직도 할 말이 많아 복귀했다는 켄 로치 감독은 이미 수십 년 전에 비슷한 테마의 영화를 만들었음에도 아직까직도 같은 문제로 영화를 찍어야 하는 현실이 놀랍고 안타깝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그는 아마도 그의 체력과 정신력이 허락하는 한 약자의 편에 서서 우리가 함께 연대하고 있다는 전언을 보내는 영화를 계속 만들어 나갈 것 같다. 



 "영화가 세상을 바꿀 수는 없지만 더 나은 세상이 되게 도울 수는 있다."라는 그의 말이 며칠 째 내 머릿속에 맴맴 울린다. 영화가 제도를 바꾸거나 가난을 없앨 수는 없다. 그러나 도울 수는 있을 것이다. 그것이 깨어있는 영화인의 숙명 아니겠는가. 그리하여 우리가 이렇게 사각지대에 놓인 사람들의 존재를 인지하고, 또 매일매일 짓밟히는 존엄을 잃지 않기 위해 다시 한번 각성할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빨갱이라는 말을 듣는다 해도 상관없다. 나는 켄 로치 감독의 세계관을 존경하며, 또 강력하게 지지한다. 그것은 사상이나 이념의 문제가 아니라 인권에 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 곳 영국에서 이 영화를 미리 보았다. 한국에서는 12월 8일에 개봉을 한다고 한다. 극장을 찾아 영화를 보는 시간이 아깝지 않을 거라 확신하는 나는 이 글을 읽는 모두에게 관람을 권한다. 불편하지만 따뜻하니까, 마음 한편이 아파오더라도 관람 뒤에 남는 것은 우울과 절망이 아닌 결국 긍정적인 희망일 테니까. 불편한다고 외면해버리기에는 우리가 너무나 선하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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