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아내가 글쓰기에 관심이 많다.
동호회에 가입해서 활동을 하기도 하고,
매주 한 편 이상 수필을 써서 공유하기도 한다.
나도 종종 그 글들을 읽게 된다.
아내는 좋은 글들을 읽어보라고 나한테 권한다.
그 글들은 종종 투박하기도 하고,
종종 읽기가 어려울 때도 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사람 냄새가 가득하다.
언젠가 친한 친구한테, 옆 동료한테, 아내한테, 아이한테서 들었을 법한 내용들이다.
그래서 고개가 절로 끄덕여 지기도 하거니와,
얼굴도 모르는 그들을 이해하려는 마음이 생기기도 한다.
그리고 아내는 자기 글도 어떤 지 물어보곤 한다.
그렇게 글을 읽어가다 보면,
내가 쓰는 글은 사람 냄새가 없음을 종종 느낀다.
블로그를 십 년 넘게 쓰고 있지만,
최근 나의 글들은 딱딱하기만 하다.
어쩌면 내가 지금 그런 상태인 거 같다.
인간미가 떨어진 상태?
그렇다기보단 내 안에 갇한 상태 같다.
머리 속이 복잡해서 그런 것 같다.
머리 속 거대한 방에서,
추상적인 것들이 빼곡이 쌓인 곳을 정리한다.
끝없이 방을 정리하고 또 정리하고 있다.
정리하고 돌아서는 순간 다시 어지러져 있고,
다시 정리하기를 끝없이 반복하는 기분이다.
그래서 머리 속을 밖으로 끄집어 내기로 했다.
글로 적으면 더 잘 정리할 수 있을 거라고,
반복해서 표현하다 보면 정리할 수 있을거라고,
그렇게 나는 펜을 들고 머리 밖으로 나온다.
처음 들고 나온 건 '나'이다.
타인과 연결되지 않는 순순한 나.
세상과 연결되지 않는 순수 그 자체로 나.
나를 잘 이해해서 머리 속을 정리하고 싶다.
그리고 가만히 거울을 본다.
거울 속에 비치는 내 모습을 본다.
내가 보는 저 모습은 과연 진짜일까?
파리나 벌이나 뱀은 내 모습을 어떻게 볼까?
내가 인식할 수 있는 수준에서,
나는 나를 바라볼 것이다.
거울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간다.
그 모습을 보며 내가 생각하는 나.
다른 사람 눈에 비친 내 모습,
다른 사람이 그 모습 비추어 생각하는 나.
결국 이 모든 것이 하나도 빠짐없이 나일 것이다.
내가 주체파악을 하는 그 순간이 오면,
세상을 좀 더 편하게 살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나에게로 떠나는 여행을 시작해 본다.
비교적 쉬운 내가 보는 나부터 바라본다.
아침 일찍 출근하려고 일어나면,
침대에 아내와 아이가 자고 있다.
깨어 있을 때는 끝없이 조잘대는 꼬맹이인데,
잠을 잘 때는 평화롭고 조용하기만 하다.
커다란 몸과 작은 몸이 종종 비슷한 자세로 자기도 하고, 둘이 부둥껴 안고 자고 있기도 하다.
내가 아무리 바라봐도 아무 반응이 없다.
가끔은 잠이 깰 때도 있을텐데, 자는 척을 하는 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아무튼 자고 있는 아이와 깨어 있는 아이의 공통점은 같은 얼굴과 몸을 가지고 있고,
다른 점은 잘 때는 나한테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잘 때는 몸, 깨어 있을 때는 자아.
이렇게 나를 두 가지로 나누는 것 맞는 거 같다.
몸만 생각하면 자아가 없는 몸은 자는 것과 같을 것 같다.
우리가 흔히 얘기하는 의식이 없는 상태,
영양분을 공급하면 몸은 죽지 않을 것이다.
코마 상태를 생각하면, 몸에서 자아가 없는 것도 가능하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주로 아침에 운동을 한다.
일어나서 가장 먼저 하는 일이 가장 중요한 것이었으면 해서 그렇다.
이런 논리로 볼 때, 난 모든 엄마들이 대단하게 생각된다.
엄마들은 일어나자마자 가족 식사를 챙길 것이고,
이 보다 더 이타적인 것은 없는 것 같다.
눈을 뜨자마자 타인을 생각한다는 것,
생각에서 그치지 않고 행동을 한다는 것,
엄마들 빼고는 종교인만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세상의 모든 엄마들이 평생 사랑받는 이유인 것 같다.
나도 엄마를 사랑한다. 내 딸도 내 아내를 나보다 더 사랑한다. 질투하지 않는다.
그렇게 나는 아침 운동을 하고 샤워를 한다.
그리고 정성스럽게 머리를 손질한다.
드라이기로 머리를 말리고 형태를 만든다.
앞머리를 세우려고 긴 시간 드라이기를 들이대며,
머리속이 뜨거워 지는 걸 묵묵히 참는다.
드라이기 손질이 끝나면 왁스를 바른다.
꼼꼼하게 머리를 셋팅하고 거울을 바라본다.
좌우로 고개를 돌리며 살펴보고,
웃음을 한 번 지어보이기도 한다.
머리스타일은 내 모습을 정말 많이 바꾼다.
운동하러 가기 전 꼬질꼬질한 노숙자 아저씨는
멀정한 회사원으로 바뀌어 있다.
그렇게 난 매일 거울 속에 나를 대면한다.
너무나 익숙한 모습이다.
내가 보는 이 모습이 나의 몸이다.
사람들은 나의 몸을 보고 내가 어떤 사람일 지 생각할 것이다.
웃는 얼굴을 본 사람은 나를 좋게 생각할 것이고, 인상쓰는 얼굴을 본 사람은 나를 나쁘게 생각할 것이다.
그래서 머리를 손질할 것이다.
세상에 나 혼자라면 똥도 아무데나 쌀 것이다.
타인을 바라보는 방법에서,
사람들은 종종 겉모습과 속모습을 나눈다.
겉모습은 거울 속 나일 것이고,
속모습은 내 생각을 지배하는 자아일 것이다.
옛날부터 그 둘은 나누어져 생각되었던 것 같다.
'겉다르고 속다르다'는 말은 그래서 나온 말일 것이다.
나는 매일 같이 그렇게 나를 거울로 만난다.
거기에는 어김없이 내 몸이 있다.
꾸미기에 따라 달라보이는 내가 있다.
거울을 볼 때마다 사실 나는 다른 나를 만난다.
어제와 같은 나는 없었다.
태어나서 메일 같이 조금씩 성장했고,
이제는 조금씩 노화가 진행되고 있다.
나르시스가 자신의 모습을 처음 보았을 때,
그 모습이 자신일거라 생각하지 못한 건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나의 몸은 그렇게 성장하고 노화를 했다.
웃으면 두 눈가에 가득찬 주름도,
격한 운동을 하는 게 힘든 것도,
지금 내 몸이 가진 특징인 것 같다.
가끔 거울 가까이 얼굴을 대고 내 얼굴을 유심히 본다.
내 눈이 어떤 모습인지 머리속으로 스케치를 해 본다.
지금 내가 보는 그 모습이 내가 보는 가장 젊은 모습이기 때문에 종종 애착을 가지기도 한다.
그리고 이런 궁금증이 생겼다.
몸이 성장하고 늙어가듯이,
자아도 성장하고 노화가 되는걸까?
스무살의 자아와 지금의 자아가 다른 걸 보면,
아마도 성장하고 노화하는 것이 맞는 거 같다.
결국 몸은 성장하고 노화한다.
그리고 그 끝은 죽음이다.
세상에서 유일하게 절대적으로 평등한 현상.
그래서 건강하게 오래 사는 걸 고민한다.
불로초를 갈구하던 진시황제의 마음은 그냥 모든 평범한 사람의 마음일 뿐이다.
며칠 전 손에 화상을 입었다.
집에서 술을 적지 않게 먹은 상태에서,
뜨거운 냄비 뚜껑에 데이고 말았다.
술을 마시지 않았다면 난리를 피웠을텐데,
둔해진 감각 덕분에 물집이 잡히는 화상을 입었다.
내 몸이 가진 감각 중에 가장 무딘 감각이 바로 통감인거 같다.
반면에 가장 예민한 감각은 시각이다.
눈을 감는 순간 세상의 모든 것은 동일해 진다.
종종 하루종일 모니터 앞에 앞에 앉아서 일을 하는 것을 보면, 눈을 정말 가혹하게 사용하는 거 같기도 하다.
눈 다음은 손의 촉감이 중요해 보인다.
어릴적에 술래잡기를 할 때 눈을 가리면,
가장 먼저 손을 올리고 주변을 살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내 몸은 이렇게 많은 감각을 가지고 있다.
내 몸에 관심을 가지면서, 가끔 가만히 앉아서 눈을 감고 내 새끼발가락에 집중을 해 본다.
아무리 새끼발가락만을 움직여보려고 해도 움직이지 않는다.
발가락이 손가락처럼 되는 것은 어려워 보였다.
몸에는 특이한 기능도 있는 것 같다.
몇 달 동안 수영을 하지 않다가 수영장에 가서,
잠시 적응하는 시간을 가지면 바로 수영이 가능하다.
예전에 몸으로 배웠던 수많은 것들이 이와 비슷하다.
약간의 적응시간만 가지면 배울 때보다는 못 하지만 할 수 있다.
몸 세포에도 저장하는 기능이 있는 건 아닐까?
머리가 기억하는 것과 다르게 몸이 기억하는 것은 오래 간다고 하는 말이 맞는 말 같다.
필름 끊길정도로 술을 먹고 다음날 집에서 일어나는 것을 보면, 몸을 의심해 봐야하지 않을까?
몇 해 전 나는 치질 수수을 했다.
수술 전후의 차이는 말로 표현할 수 없다.
삶의 질이 완전히 좋아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술과 회복은 쉬운 과정이 아니었다.
수술을 막 마쳤을 때는 정말 힘들었다.
마취가 풀리자 말로 표현할 수 없이 아팠다.
몸을 천천히 움직이며 고통이 덜한 자세를 찾았다.
난 고통에 모든 것을 집중했다.
고통이 없어지지 않으니 작아지는 방법을 생각했다.
호흡을 하는 순간에도 고통이 있었고,
그러면 호흡 소리마저도 귀에 들렸다.
폐가 움직이는 것도 느껴졌다.
일초 일초 아팠고 죽은듯이 가만히 있었다.
잠시 졸다가 일어나기를 반복하며 몸을 살폈다.
몸을 살피지 않는 시간은 자는 시간뿐이었다.
고통이 계속되니 몸을 살피는 거 외에는 관심이 없었다.
아플 때 나는 온전히 몸이었다.
반대로 컨디션이 좋을 때 나는 몸을 크게 신경쓰지 않는다.
몸이 많이 아프면 자아는 내 몸을 넘어 생각을 하기도 힘들 것 같았다.
내 몸이 아주 많이 아프면, 자아도 그렇게 몸 속에서 작아질 것 같았다.
그렇게 몸이 죽게 되면 자아도 죽지 않을까?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잠자는 아내와 아이의 모습을 떠올린다.
그들의 자아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그리고 재미있는 상상을 한다.
아내와 아이의 자아가 바뀐다면 어떨까?
가끔 이런 영화가 만들어지고 뻔한 내용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영화를 본다.
주로 내용은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게 된다.
하지만 자아를 옮기는 기술이 생기다면 어떨까?
나는 바로 무서웠다.
돈 있는 사람들이 건강한 사람들한테 돈을 주고,
몸을 사지 않을까?
몸은 외모라고 얘기되는 형상을 가지고 있다. 그 형상을 더 크게, 예쁘게 꾸미려는 노력은 수천년 역사동안 진행되어 왔다. 외모를 통해 상대보다 우월하고자 하는 욕구를 표현하는 대상이었다.
또한 몸은 여러가지 감각기관을 가지고 있다. 몸을 벗어나 세상을 감지하는 방법이다. 모든 감각이 유기적으로 몸을 안전하게 보호한다.
마지막으로 몸은 성장하고 노화한다. 성장과 노화는 변화지 않는 사실이다. 성장과 노화의 변화가 자아에게 영향을 미치게 되고, 자아의 변화가 개인사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 된다.
몸을 가장 먼저 생각해 보게 된 것은 새끼발가락 때문이었다. 내 의지로 움직일 수 없었던 새끼발가락을 천천히 유심히 바라봤다. 구두에 눌려 약간 돌아간 모양에, 눌릴대로 눌려서 발톱마저도 아주 작게 나 있었다. 그렇게 몸을 하나 하나 훑어 보았다. 내 심장소리를 들어보려는 시도도 해보고, 내 몸 보이지 않는 곳을 거울로 보기도 했다.
자아가 살아있는 전제조건, 내가 살아있는 전제조건이 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너무나 내 몸을 소홀히 한 건 아닌가 싶다. 지나친 과식도, 음주도, 흡연도 줄이고 피해야 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운동을 통해 건강을 더 열심히 관리해야 겠다는 생각이 든다.
노화의 끝에 도달하는 순간까지 내 몸을 아끼고 사랑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