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점수가 필요해!

영어가 아닌, 점수.

by 꽃지아빠



어느 순간부터 영어 공부를 전혀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매년 영어공부를 목표로 삼고 제대로 지키지 못했던 내 자신에 대한 자체 처방전이었다. 그러고나니 목표를 세우고 지키지 못해 자책하던 것은 사라졌다. 그렇게 영어에 대한 부담을 없애고 편하게 지내고 있었다. 하지만 회사를 다니다 보면 영어를 공부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오게 된다. 회사를 옮기려하거나, 승진 시점이 되거나 그럴 때 필요하다. 그러니 승진 직전이 되면 어쩔 수 없이 다시 영어를 공부해야만 하는 상황이다. 그것 뿐이 아니다. 회사에서 제시하는 인재양성 프로그램 조건에 어김없이 영어점수가 필요하다. 그러니 영어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것은 어쩌면 불가능할 지도 모르겠다. 누구도 대놓고 영어를 잘 해야 한다고 말하지는 않지만 꼭 해야만 할 것 같은 분위기다. 이렇게 스스로를 채찍질하듯이 영어공부 속으로 빠져들게 한다. 자기 자신에게 더 많은 것을 요구하는 피로사회인 것이다. 피로사회라는 책을 보면 현대 사회는 피로사회이며, 자기 스스로 더 많은 것을 강요하는 현상을 설명한다. 나도 현대 사회에 살고 있고, 최근 나는 나에게 영어공부를 강요하고 있다. 딸에게 영어공부가 중요하다고 말하는 아내와 살고 있으며, 엄마 말에 하기 싫은 영어공부를 억지로 하는 딸과 살고 있다.
시간이 어김없이 지나 나에게도 승진할 시기가 왔고, 다시 영어공부를 해야하는 상황이 되었다. 다시 영어 책을 잡는 데까지 누구의 도움도 필요 없었다. 그냥 내가 스스로 영어 책을 찾았다.


영어도 결국 언어이고, 언어의 목적은 소통이다.
영어로 단순한 정보를 주고 받는 것이라면, 지금의 수준에서도 가능할 것이다. '몇 시니?', '얼마니?' 같은 표현만으로도 최소한 필요한 정보는 얻을 수 있고, 불편하지만 여행하는데도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수준으로는 회사가 요구하는 소통이 될 수는 없다. 그래서 더 높은 수준을 요구하게 된다. 마치 외국인하고 정치에 관하여 토론이라도 할 수 있기를 바라는 것처럼 목표는 높게 설정되어 있다. 물론 소통은 정말 중요하다. 상대에게 내 의견을 전달할 수 있어야 하고 상대의 의견도 이해할 수 있어야 하니까 그렇다. 그런 소통을 자주 하는 사람에게는 영어 실력이 유지되겠지만, 컴퓨터 앞에 앉아 하루종일 설계를 하는 나에게는 영어는 실생활이기보다 자격증에 가깝다.


이번에 큰 맘 먹고 영어공부 방식을 바꿔 보았다. 유치원 수준의 공부 자료로 공부하는 것이다. 방대한 어휘를 통해 정확한 표현을 하는 것을 넘어, 어린이 수준으로라도 대화를 하면 좋을 것이라 생각했다. 영어 자격증을 따던 공부방법이랑은 차원이 다르다. 아마도 자격증을 따는 방법의 효율성과는 상당히 괴리감이 있을 것이다. 아무리 공부해도 실력이 좋아지는지 감을 못 잡을 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내 수준을 쫒아가다 보니, 유치원 다니는 꼬마 수준으로 내려가게됐다. 사실은 그 꼬마들이 사정없이 빠른 속도로 얘기하면 무슨 말인지 잘 알아듣지 못한다. 유치원 애들하고도 대화가 안 되는 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자격증보다 유치원 애들하고 얘기하는 수준으로 목표를 변경하니 마음이 편하다. 마치 그 동안 영어공부를 남의 눈을 속이는 것처럼 치장하는 것이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출근 길 현관 거울에 비치 내 모습이 안스럽기도 하다. 흰머리와 검은머리가 석여있는 아저씨와 꼬마가 영어로 대화하는 모습이 찰라의 순간처럼 지나간다.



이 모든 노력은 결국 먹고살기 위함인 것인가? 한국인 아저씨가 왜 외국인 꼬마와 대화하는 수준수준이 필요할까? 먹고사는 문제에 대한 질문은 항상 나를 따라 다닌다. 그 이유는 내가 한 가정의 가장이고, 내가 경제생활을 하는 것은 가정을 유지하는 근본이 되기 때문이다. 경제생활에 깊은 관련이 있다면 해야한다. 그것은 나의 의무이다. 지금까지 나는 먹고사는 문제와 깊은 연관이 있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영어를 대했다. 이런 관점에서 지금까지 공부한 방법은 회사가 필요로 하는 점수를 받는 것이 되었다. 원하는 수준을 정하고 가장 빠르게 도달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았고, 학원을 찾았고, 선생님을 찾았고 원하는 점수를 얻었다. 하지만 약간의 시간이 흐르면 다시 원상상태로 돌아갔다. 다이어트 후에 요요현상처럼 변했다. 내가 여태 가진 목적은 영어 사용이 아닌 영어 자격 취득이었기에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다른 목적을 가질 수가 없었다. 그것이 내가 가진 한계였고, 난 그것을 인정하고 있었다.


아내가 어느날 잠수네 영어라는 책을 빌려왔다. 그 책을 읽고 있는데 한 문장이 나에게 영감을 주었다. 책을 많이 읽을 수 있는 영어. 책을 읽는 영어는 생각해 보지 않았었다. 말하는 영어만 생각했었다. 그러고 보니 영어로 된 책을 한 권이라도 제대로 읽은 적이 없는 것 같다. 방법도 무척 흥미로웠다. 티비보고 책 읽고... 그래서 유치원생들 영어공부 방법을 선택하게 되었다. 느리지만 천천히 길게, 최종목표는 책을 읽어 나가는 것으로 삼았다. 원서로 읽고 싶은 책들을 읽어보는 것이 목표가 되었다.

내 삶에 필요한 영어는 어떤 것인가를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내가 하고 싶은 공부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지 못했었다. 이런 것들이 단기적 목표로 변질되었고, 유지할 수 있는 동력이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 답을 얻은 것이 아닐까 싶다. '노인과 바다'같은 책을 원서 그대로 읽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 많이 듣고, 많이 읽는 방법을 선택한 것이다. 누군가의 번역을 통해서 재해석된 내용이 아니라 저자의 글들을 순수하게 그대로 읽어보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물론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그저 영어가 나에게 즐거움을 줄 수도 있을지 모르겠다는 희망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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