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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뉴 Aug 17. 2020

일장점심몽

점심시간의 한바탕 꿈

얼마 전부터 팀원 모두가 점심으로 도시락을 먹고 있다. 몇 달 전부터 집에서 과일과 야채로만 이루어진 건강한 도시락을 싸오던 K님이 쏘아 올린 작은 공이다. 몇 주 전에 회사 근처로 이사 온 나도 출근 전에 여유가 생기면서 도시락을 싸오기 시작했다. 밖에서 사 먹으면 만 원은 기본인 점심을 1시간 내에 급하게 먹고 돌아와야 하는 것이 아까웠기 때문이다. 대신 점심값 아껴서 주말에는 더 좋은 음식을 더 여유롭게 즐겨야지. 최근에는 조금 멀리서 자취하는 사수님도 도시락을 준비하기 시작했고, 다른 팀원분들은 도시락을 싸오는 대신 사내에서 판매하는 도시락을 사 오신다. 덕분에 점심시간마다 밖에 나가는 대신 휴게실에 모여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며 여유롭게 점심시간을 보내는 우리 팀만의 소소한 문화가 생겼다.


요즘 도시락 위로 오고 가는 이야깃거리는 회사 밖에서 돈 버는 방법이다. 우리 팀원들은 (직장 동료로서) 객관적으로 보나 (좋아하는 팀원으로서) 주관적으로 보나 '커리어우먼'이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멋진 직장인들인데, 점심시간만 되면 적게 일하고 많이 버는 것을 꿈꾸는 평범한 직장인으로 변한다. 내가 입사한 지 6개월까지만 해도 "안뉴님 앞에서는 이런 말 하면 안 되는데..."라며 위와 같은 주제로 이야기를 꺼내는 것을 조심스러워하던 분들이, 이제는 나도 알 때가 되었다며 퇴사, 이직, 사업과 같은 이야기를 거리낌 없이 꺼내기 시작했고, 나는 그게 되려 고맙다. 입사하고 몇 개월 동안 사수님에게서 회사나 업무에 대한 불평을 들은 적이 한 번도 없다가, 처음으로 그런 이야기를 들었을 때 왠지 사수님과 더 가까워진 기분이 들어서 좋았던 그때처럼 말이다.


취업만이 목표이던 취준생 시절에는 잘 다니던 대기업을 때려치우고 고생 끝에 창업 성공신화를 써낸 사람들을 보면, 멋있다기보다는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렸을 때 부모님이 사업을 한다는 친구들이 잘 사는 것 같아 보이다가도 또 엄청 힘든 시기를 겪는 것을 보며, 사업은 함부로 꿈꾸면 안 되는 것, 극소수의 사람들만 할 수 있는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당연히 나도 회사생활에 전념하며 사업 같은 것은 꿈도 꾸지 않을 줄 알았는데, 입사한 지 1년도 안되어서 알 수 있었다. 왜 직장인들이 한 번쯤은 사표를 던지고 사업에 도전하길 꿈꾸는지를. 회사에서는 아무리 잘 나가고 승승장구해도, 내가 그 회사의 주인이 아니라면 그저 잘 나가고 승승장구하는 더 높은 계급의 노예일 뿐이었던 것이다.




우리 팀원들은 양심적이고 이성적인지라 감히 불로소득을 얻는 것은 꿈도 꾸지 않는다. 이 말인즉슨, 로또에 당첨된다거나 건물주가 되어 따박따박 통장에 현금이 꽂히는 일이 일어날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는다는 거다. 대신에 나중에 자신만의 카페를 차린다든가, 대만 출장에서 발견한 신박한 사업 아이템을 한국에 들여와 제2의 공차를 만든다든가 하는 것을 생각한다. 간혹 진지하지 않은 사업 아이템이 나오기라도 하면, "아니, 그거 진짜 잘 될 것 같은데요?! 나중에 회사 차리면 저 비서 시켜주세요!", "그럼 저는 청소시켜주세요! 잘할 자신 있어요!" 라며 여기저기서 손을 들지만, 진짜 그 아이템으로 사업을 하진 않을 거라는 건 모두가 다 안다.   


회사 밖에서 돈 버는 방법 중에서도 유튜버가 요즘 가장 핫한 토픽이다. 랩 하면서 요리하는 방송, 최면 거는 방송 등 별별 콘텐츠가 끝도 없이 쏟아져 나오는 요즘, 우리가 채널을 운영할 만한 콘텐츠는 없을지 탐구하는 시간이다. 라디오 DJ에 어울리는 목소리를 가진 사수님은 ASMR 같은 것을 하면 인기가 많을 것 같다고 열을 올리던 중에, "저는 한번 키즈 콘텐츠로 유튜버 해볼까요?" 한 마디 던지고는 너무 잘 어울리니 진짜 해보라는 열띤 호응을 얻는 식이다. 물론 여기 중에서 그 누구도 유튜버가 되지 않을 거라는 건 모두가 다 알지만, 여하튼 모두가 한 번씩 잘 나가는 유튜버가 되는 상상을 하다 보면 어느새 1시간이 지나있다.




당장이라도 사표를 낼 것만 같던 패기만만한 우리는, 12시가 되면 본모습으로 돌아가는 신데렐라처럼 얌전히 사노예의 본분으로 돌아온다. 일장춘몽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짧은 '일장점심몽'이다. 그런데 혹시 알까, 장난스럽게 얘기했던 그 아이템으로 사업을 시작했다가 진짜 대박 날지, 혹은 유튜브에 동영상 하나 올렸다가 조회수가 폭발해서 인기 유튜버의 길을 걷게 될지. 결국은 누가 먼저 생각하고 말하냐 보다, 누가 먼저 행동하고 도전하냐가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난 아직 도전이 두렵다. 지금 회사에서 보내는 하루하루가 나에게는 도전과도 같기 때문에.


비록 점심시간 1시간 동안에만 잠깐 꾸는 이 일장점심몽은 한바탕 꿈에 그치지 않고, 한밤중 침대에 누운 나를 뒤척이게 한다. 당장 이 회사와 업무에 잘 적응하는 것만을 고민하고, 오늘도 사고 치지 않고 무사히 하루를 보낸 것으로 뿌듯해하는 내게 좋은 자극을 주는 사람들. 바로 지금도 충분히 잘하고 있지만 거기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커리어와 미래를 고민하는 팀원들이다. 그들과 도시락을 먹으며 즐겁게 얘기하던 달콤한 꿈을 되새기며 침대에 누우면, 어느새 달콤한 맛은 온데간데없고 씁쓸한 현실의 맛이 더 강하게 느껴지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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