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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뉴 Mar 06. 2021

오늘도 영어 공부를 한다

영어는 못해도 글로벌 업무는 하고 싶어

중학생 때 내가 가장 좋아하던 과목은 영어였다. 장래희망은 외교관, 존경하는 인물은 반기문이었던 나는 일반고보다 영어 수업시수가 두배는 더 많아 보이는 외고 시간표에 홀라당 넘어가 공부에 열을 올렸고, 내 영어실력으로나 경제적 형편으로나 덜 부담스러운 한 공립외고에 진학했다. 아마도 그때부터였을 거다, 내가 실상 영어 잘하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달은 것이. 분명히 엄마가 나는 언어에 소질이 있다고 했는데, 외고라는 집단에서 나는 더 이상 영어를 잘하는 학생이 아니었다 중학생 때 외교관이 장래희망인 사람은 나뿐이었는데, 이곳에서는 외교관을 꿈꾸는 친구들이 수두룩했다. 하나같이 뛰어난 영어실력을 가진 건 물론이었다. 11살 때부터 흔들림 없이 키워온 나의 꿈은 그때 처음으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영어에 대한 자신감을 잃어서일까, 언제부터인가 영어에 대한 흥미도 떨어졌다. 여전히 다른 과목들보다는 영어가 재밌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것이었다. 중학생 때처럼 절대적으로 영어를 좋아할 수는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내가 영어과가 아니라 중국어과였다는 것이었다. 영어를 잘하는 친구들은 많았지만, 중국어 같은 경우는 중국에 오래 살았던 몇몇 친구들 말고는 다들 비슷한 수준이었다. "아→ 아↗ 아↘↗아↘" 4개 성조를 따라 하는 걸음마 수준부터 다 같이 배워나갔고, 다시 한번 언어에 대한 재미를 느꼈다. 영어를 이미 어느 정도 할 줄 아는 수준에서 잘하는 수준으로 끌어올리기는 어려웠지만, 중국어를 못하는 수준에서 조금 할 줄 아는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5년 넘게 한결같았던 꿈이 흔들리면서 처음으로 진로 고민이라는 것을 하게 되었지만, 끝내 뭘 해야 할지, 뭘 하고 싶은지 찾지 못했고, '중국 전문 외교관'이 되겠다는 당찬 다짐을 써 내려간 자소서로 모 대학 중어중문학과에 합격했다.




그리고, 나는 오늘도 영어로 일한다. 외교관은 못되어도, 무언가 '글로벌'이라는 단어가 적용되는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은 쭉 해오던 나는 '글로벌 사업'이라는 그럴싸한 용어가 들어간 부서에 입사했다. 팀원들은 모두 한국인이지만, 해외 오피스 동료들과 영어로 업무를 진행하는 비중이 더 높아, 매일같이 영어를 쓰는 중이다. 아, 그런데 그 '해외 오피스'는 모두 아시아에 있다. 일본, 대만, 태국, 인도네시아. 어쩌면 이렇게나 모국어가 하나도 안 겹칠까. 그래서 그나마 모두가 조금씩 할 줄 아는 영어를 공통어로 쓴다. 그런데 또 누구 하나 영어가 모국어는 아니니까, 약간 틀린 영어로 일을 하고 그걸 또 당연스럽게 이해하며 그렇게 일을 하고 있다. 어쨌든, 매일같이 영어를 쓰고 있기는 하다.


신입 교육을 받고 팀에 배정되었을 때, 막내인 내가 가장 먼저 인수인계받은 업무는 바로 회의록 작성이었는데, 이게 참 곤욕스러웠다. 해외 오피스 동료들과 화상회의를 할 때면, 내 노트북 화면을 공유한 채 실시간으로 회의록을 작성해야 했다. 이제 막 입사해서 한국어로도 못 알아들을 내용을 영어로 듣고 회의록을 작성해야 하는 게 1차 난관, 호주 영어도 아닌 동남아 영어를 알아들어야 하는 게 2차 난관, 그리고 내 화면이 공유되어 있기에 모르는 단어가 있어도 검색해볼 수 없는 게 3차 난관이었다. 외고에서 그랬던 것처럼, 다시금 영어 잘하는 동료들에게 둘러싸인 나의 영어에 대한 자신감은 또 하향곡선을 그렸다. 입사 후 처음 팀장님과 면담을 했을 때, 이렇게 여쭤봤었더란다. "영어면접도 보셨으면서, 저... 왜 뽑으셨어요?"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많은 시간을 영어공부에 할애하고 있지만, 실력은 쉽사리 늘지 않는다. 야근을 하고 영어수업까지 마친 어느 날, 저녁시간을 알차게 보냈다는 뿌듯함이 느껴지려던 찰나에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영어가 모국어인 사람들은 내가 평생 살면서 영어에 투자하는 시간을 다른 데 쓸 수 있겠지?' 


영어를 배워가는 그 과정 자체를 즐기던 중학생은, 어쩌다가 결과에만 연연하는 못난 어른이 되었을까? 이런 어른은 앞으로도 계속 '글로벌'과 관련된 일을 할 수 있을까? 사회생활과 업무역량은 늘었을지언정, 영어실력은 도무지 늘지 않는 갓 3년 차는, 어쨌든 오늘도 영어 공부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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