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입이여, 이제 안녕.
가장 많이 마음이 흔들린다는 3년차에 접어들었을 무렵, 나의 마음은 흔들리는 대신 아등바등 버텨내고 있었다. "오늘도 파이팅!"이라는 무용한 말을 남발하던 나는 언젠가부터 "오늘도 잘 버텨내자!"라는, 보다 유용해 보이는 동시에 보다 서글퍼지는 말로 스스로를 다잡고 있었다. 다시 오지 않을 오늘을 그저 버틴다는 마음으로 살아내는 건 참 씁쓸한 일인 줄 잘 알면서도, 하루하루를 그저 버텨내야 하는 것이 일상이 되어버렸던 시기였다.
괜찮아, 이 시기 또한 지나갈 거야. 버텨보자.
도무지 끝날 것 같지 않는 이 일에도 끝은 있을 거야. 버텨보자.
이제 며칠만 더 있으면 주말이야. 버텨보자.
나의 삶이 왜 버티는 삶이 되어 버렸나 곰곰이 생각해보니, 어느 순간부터 일에서 내가 소모되어가고 있었다. '소모 = 써서 없앰'. 그러니까, 일에다가 나를 갈아 넣어 버려서 나는 점점 없어지는 느낌. 내가 아무리 쳐내도 끝이 보이지 않고, 내가 이걸 왜 해야 하지, 이 일을 통해서 내가 뭘 배울 수 있지 싶은, 누군가는 해야 하나 아무도 하고 싶어 하지 않는 그런 일이었다. 어디선가 읽었는데, 일에서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소모되어간다고 느낄 때가 그 일을 그만둬야 하는 시점이라고.
그래도 나 여기서 나름 인정받고 있지 않나, 이 정도면 우리 팀 분위기 좋지 않나, 이런 합리화로 어떻게든 미루고 버텨왔던 지난날들을 뒤로하고, 좋아하면서도 잘할 수 있는 그런 일을 찾아 새로운 길을 찾아 떠나기로 했다. 한때는 이 일을 좋아했으나 더 이상 그 만큼은 좋아하지 않게 되었고, 이 일을 잘한다고 뿌듯해했던 시기도 있었으나, 그게 꼭 이 일이라서 잘한 것만이 아닐 수도, 아니, 어쩌면 그리 잘한 게 아니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드는 시기가 된 것이다.
회사 인원의 90%는 경력직으로 입사한 사람들이니, 신입 공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은 오만이요, 착각이었다. 신입 때는 패기와 열정으로 나의 유용함을 어필할 수 있었지만, 신입에게는 열정을 바라던 이들이 경력직의 열정에는 무심하며 숫자로 나타나는 성과만이 유용함을 증명해준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난 몇 년 동안 분명 많은 것들을 해왔던 것 같았으나, 이력서 한 페이지를 채우기에는, 그리고 면접관의 물음에 멋진 답변을 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지난날의 주체적으로, 능동적으로 임했던 일들도 어떤 시각에서는 수동적인 역할에 그칠 뿐이었다.
신입으로 입사한 지 1년이 지나 첫 연봉협상 때, 팀장님에게서 "본인의 시장가치를 증명해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던 친구가 있다. 그때의 우리는 "아니, 이제 막 2년 차 되었는데 어떻게 내 시장가치를 증명하란 거야?" 하며 어처구니없어했지만, 사실 그 팀장님은 냉혹한 현실을 일찍이 알려주셨을 뿐이었다. 다행히 사내 부서이동 제도를 통해 나를 한 번 뽑아줬던, 나에게는 냉혹하기보다 자비로운 회사에서 직무 전환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여기에서 이미 인정받고 있는데 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려고 하느냐, 거기서는 지금처럼 평가를 잘 받기 어려울 거다, 와 같은 말들을 뒤로할 수 있었던 것은, 나를 만류하던 그 말들이 현실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지만, 그 현실은 나의 의지에 의해 또 바뀔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를 신입으로 뽑아주고, 신입이라는 이유로 예뻐해 주고, 신입에서 3년차로 키워준 고마웠던 부서를 떠나, 신입시절의 나를 전혀 모르는 새로운 부서에서 다시 시작해보기로 했다. 아마 당분간은 정신 못 차릴 정도로 성장하는 기분을 느낄 수 있겠지. 그런 의미에서 신입일기도 이제 안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