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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뉴 Feb 04. 2021

막내 탈출, 선배가 된다는 것

처음부터 선배인 사람은 없다

그런 사람들이 있다. 누가 봐도 '언니' '오빠'라고 불러야할 것만 같은 선배미를 가진 사람들. 대학 새내기 시절 회장단 선배들이 그랬다. 고작 1살 위인데 어쩜 그리도 선배 포스가 좔좔 흐르던지. 나도 1년이 지나면 그런 선배가 될 수 있을 줄 알았건만, 대학교 2학년이 되든 심지어 졸업반이 되든 늘어난 것은 나이일뿐, 새내기 시절의 나와 별다를 바 없었다. 집안의 막내로 태어나 신기하게도 어느 집단에서건 늘 막내였던 나는, 선배한테 까불거리는 건 쉬웠어도 후배 앞에서 선배답게 굴기는 어려웠다. 어쩌다가 후배를 맞게 되면 그와의 관계는 둘 중 하나로 귀결되곤 했다. 후배한테 놀림이나 당하는 만만한 친구 사이가 되거나, 선배로서의 이미지는 간신히 유지하되 얼굴만 아는 어색한 사이가 되거나. 대학에서 될 수 있으면 후배들과의 만남을 피해왔던 나는, 결국 아는 과후배 한 명 없이 대학을 졸업하고 말았다.


그런 나에게 회사에서 막내 신입사원은 부담없는 포지션이었다. 유일한 부담은 수많은 지원자들을 놔두고 날 뽑아준, 나에 대한 알 수 없는 기대를 가진 상사들에게 당신들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해야 한다는 것뿐이었다. 어쨌든, 나는 이 부서에 가장 늦게 들어왔고 가장 어리니까 '신입 치고' 잘하는 수준으로도 충분했다. "사회생활 하는 순간 나이는 다 필요없다. 밑에서 계속 후배들이 치고 올라올거야."라며 겁주시던 아버지의 말씀도 먼훗날의 일이었다. 아직 내 밑에 후배는 없고, 도무지 따라잡을 수 없을 것 같은 선배들은 앞으로도 계속 나의 선배일테니까. 막내로서, 후배로서, 선배들을 잘 따르며 배워나가기만 하면 되었다. 앞으로 2-3년 간은 우리 부서에서 신입을 뽑지 않을 거라던 팀장님의 말씀에, 몇년 간 잡일은 모두 나의 몫이 되겠군, 하는 생각과 함께 은근한 안도감이 들었다.




입사하고 1년반이 지났을 무렵, 부장님께서 내가 곧 막내 탈출을 할 수 있을거라는 (그분 표현에 따르면) '기쁜 소식'을 전해주셨다. 당시 내게 그건 온전히 기쁘기만 한 소식은 아니었다. 막내 역할에서 벗어날 수 있겠다는 기대감이나 신입은 어떤 사람일까 하는 호기심도 물론 있었지만, 그보다는 나보다 훨씬 뛰어나고 어른스러운 후배면 어쩌지 하는 긴장감, 이제는 진짜 선배가 되어야한다는 부담감이 더 크게 느껴졌다. 재택근무 때문에 화상회의에서 처음 본 신입의 모습은 나의 부담감을 한층 더 높였다. 엄청난 스펙의 소유자인데다가 중저음의 목소리가 딱봐도 나보다 어른스러운 사람인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 마주한 신입은 음식이 나오면 반드시 사진을 찍어야 하고, 연예인 얘기에 흥이 오르며, 팀 레크레이션 활동에 진심인 영락없는 스물 다섯이었다. 신입이 나방을 보고 소리를 지르며 내 옆에 꼭 달라붙었을 때, 그래도 이번에는 선배 노릇을 잘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다. 아마도 같이 소리를 지르며 도망가는 대신, 그녀의 어깨를 감싸고 호다닥 지나갈 수 있었기 때문이었을 거다.


신입에게 인수인계를 시작할 무렵, 비록 사수는 아니지만 <신입이 좋은 사수를 만난다는 것> 에서 썼던 그런 선배가 되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녀가 같은 실수를 반복해도 질책하지 않고 실수만 지적하는 담백한 선배, 그녀가 한 작은 일도 대신 생색 내주는 선배, 쉬운 일 하나를 시켜도 고맙다고 말해주는 선배. 처음에는 어렵지 않았던 일들이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어려워졌다. 처음엔 아무렇지 않게 넘겼던 실수가 어느 순간 답답하게 느껴진다거나, 그녀가 한 일을 대신 생색 내주긴 커녕 내가 그녀 대신 한 일을 생색 내고 싶어진다거나, 고맙다는 고작 세글자뿐인 말을 이모티콘 하나로 퉁친다거나. 나는 좋은 선배가 될 그릇이 아닌 걸까, 그릇다운 그릇이 되기 위해 아직 물레 위를 돌고 있는 중인 걸까. 신입에게 나의 사수님처럼 좋은 선배가 되어주지 못한 것에 대한 미안함과, 한결같이 좋은 선배가 되어주셨던 사수님에 대한 고마움을 떨칠 수 없던 시간을 보냈다.


인간적으로 좋은 선배가 되는 것보다 더 어려운 건 일을 잘 가르치는 선배가 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운영성 업무는 메뉴얼만 알려주면 되었기에 어려울 것이 없었지만, 그보다는 어떤 이슈가 발생하면 case by case로 대응해야 하는 업무가 훨씬 많았다. 하나부터 열까지 차근차근 다 알려줘야 하는 걸까? 핵심만 알려주고 본인이 직접 맞닥뜨리며 터득할 수 있도록 해야 할까? 아마도 더 많은 후배들을 맞이하고 나서야 '진작 이랬어야 했는데!'하고 깨달을지도 모르겠다. 가르치는 것도 결국 배우는 것이고, 고로 끝이 없다는 느끼며, 앞으로 나의 희생양이 될 수 있는 수많은 후배들에게 미리 유감을 표해야겠다.




그러나 위의 모든 것보다 더 중요한 건, 내가 선배가 되었다는 그 자체가 아닐까. 선배가 되고나서 한 가지 든 생각은, 선배는 정말 '되는 것'이라는 거다. 누구나 한 집안의 막내로 태어나, 1학년으로 학교에 입학한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선배였던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누군가의 후배가 되는 일보다는 선배가 되는 일이 더 많아질 것이다. 말인즉슨, 후배라는 이유로 누릴 수 있는 편의는 점점 줄어들고, 선배라는 이유로 주어지는 기대와 역할은 점점 커질 거라는 것. 지금까지는 앞만 보고 걸으면 되었지만, 이제는 뒤도 돌아볼 줄 알아야한다는 것. 그리고 "밑에서 계속 후배들이 치고 올라온다"는 아버지의 말씀이 점점 현실로 다가올 거라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배들을 경계하지 않고 진심으로 이끌어줄 수 있는 선배가 되려면, 그 어떤 상황과 사람에게도 치이지 않는 단단한 사람이 되어야한다는 것. 그런 단단한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더욱 많은 내공을 쌓아야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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