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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니바 Feb 23. 2022

명절날 고향에 못 간 코로나 확진자의 디저트

할머니의 그 맛을 떠올리며. 흑임자 오트밀 케이크

어린 시절, 명절날 외할머니댁에 가면 갈비나 각종 화려한 전들 사이에 커다란 대나무 바구니가 놓여있었다. 바구니를 가린 핑크빛 보자기를 들춰 올리면 어김없이 각종 먹음직스러운 한과들이 가득했다.


여러 한과들 중에서도 나는 흑임자강정이 참 좋았다. 오색빛깔 하얀 쌀가루로 치장한 유과나, 화려한 문양이 새겨진 약과와 달리 다소 투박해 보이는 새까맣고 네모진 생김새를 하고 있었지만 한 입 베어 무는 순간 입안을 점령하는 고소함 만큼은 최고였다. 동네 슈퍼에서도 흔히 사 먹을 수 있는 약과에 비해 할머니 댁 특유의 꼬수운 내음이 솔솔 풍기는 흑임자 강정은 명절 때가 아니면 쉽게 맛볼 수가 없었기에 더욱 소중했다.


좀 못생기면 어때? 고소하고 달달한 맛은 최고인데!  / 출처: 한옥마을


그러나 슬프게도 이번 설 명절엔 할머니도 흑임자강정도 없었다.

설 연휴를 앞둔 어느 날. 오미크론이 우세종이 되어 전국적으로 퍼지고 있는 시점에 시의 적절하게도 코로나 확진자가 되어버렸다. 바로 격리 대상자가 되었고 생활치료센터에 입소해야만 했다. 오미크론은 경증이라고들 하던데 막상 걸리고 났더니 근육통과 피로감, 인후통으로 며칠을 끙끙 앓아댔고 결국 주변에 피해가 갈까 싶어 격리가 끝난 이후에도 차마 고향에 내려가지 못했다.


코로나 증상과 후유증이 좀 가시고 정신 차려보니 벌써 달력은 2월 중순을 바라보고 있었다. 할머니는 아픈 손녀딸이 걱정되셨는지 설 연휴와 그 이후에도 수차례 전화해서 내 안부를 챙겼다. 할머니의 꼬불거리는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할머니도 못 보고 맛있는 것도 못 먹은 채 명절이 지나간 것이 억울해져 아쉬운 대로 내가 좋아하는 흑임자로 뭐라도 만들어 먹고 싶어졌다.


실은 흑임자강정을 먹고 싶었지만 만들 줄도 모르고 만들어 봤자 할머니 댁에서 먹던 그 맛을 절대 못 따라갈 것 같아 고민하다 전에 친구들과 같이 먹었던 쫀득한 쑥 케이크가 떠올랐다. 쑥 케이크 위에는 하얀 생크림까지 올라가 있어 쌉싸름하면서도 달달한 게 정말 맛있었다.


‘흑임자가루로 케이크를 만들어보면 어떨까?’


최근에 베이킹에 관심이 많아져서 베이킹 재료들이 집에 있으니 시도해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칼로리 부담 안 가게 밀가루, 버터, 생크림, 설탕 없이, 복잡한 오븐 대신 전자레인지로 빠르게 만들어서 후딱 이 억울한 기분이 풀릴 수 있도록 달래주고 싶었다.



[흑임자 오트밀 케이크]


[요리 재료]

흑임자가루 2큰술,  아몬드가루 2큰술,  오트밀 2큰술, 계란 1개, 베이킹파우더 1/2 티스푼, 소금 한 꼬집, 스테비아 1 티스푼, 바닐라 익스트렉 1/2 티스푼, 올리브유 1/2 티스푼, 꿀 1큰술, 플레인요거트(또는 그릭요거트) 2큰술, 아몬드(선택)


[만드는 법]

1. 계란을 충분히 풀어준다.


2. 가루들과 소금, 스테비아, 베이킹파우더, 오트밀, 바닐라 익스트렉을 넣고 잘 섞어준다


3. 작은 밥그릇 하나 꺼낸 뒤 그릇 안쪽에 올리브유를 두르고 반죽을 붓는다.


4. 전자레인지 2분 돌린 후 접시에 케이크를 옮긴다. (그릇을 접시에 뒤집어 놓고 그릇을 쏙 빼면 케이크가 잘 분리됨)


5. 케이크 위로 꿀, 플레인요거트, 흑임자가루, 아몬드를 차례로 올린다.


6. 완성! 요거트의 새콤함과 고소한 흑임자의 환상적인 조화를 음미한다.

몇 년 전부터 흑임자나 인절미 등을 활용한 소위 할매 입맛 저격용 주전부리들이 젊은이들 사이에서 유행이다.  평소 흑임자를 좋아하는 나는 그런 유행이 한없이 반가웠다. 흑임자나 쑥, 인절미 등 전통 재료로 만들어진 디저트를 먹다 보면 두 손 가득 한과며 쑥떡 등을 챙겨주던 할머니의 주름진 손길이 떠올랐다.



많은 2030 젊은 세대가 할매 입맛이 된 건 단순히 전통 재료가 주는 건강하고 고소한 맛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매일 같이 무한 경쟁에 시달리며 공부와 취업, 사회생활에 지친 하루 그 어디쯤에서 마음을 기댈 수 있는 따뜻한 할머니의 품이 그리웠기 때문이리라. 흑임자 케이크를 베어 물고 할머니의 얼굴을 떠올리며 명절날 집에 못 내려간 설움을 달래고 있는 지금의 나처럼 말이다.




*자세한 요리 과정이 궁금하신 분들은 영상으로 확인하세요 :)

유튜브 <주니바의 식탁> 할머니의 맛이 그리울 땐, 흑임자 오트밀 케이크!

*이 글과 사진을 무단 도용하거나 2차 편집 및 재업로드를 금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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