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213 그들이 희생자라고 생각했던 것은 내 오해였다. 그들은 희생자가 되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거기 남았다.
책을 다 읽고 한 동안 그 자리에 머물러야 했습니다. 무거워진 책만큼 마음도 무거웠기 때문입니다. 다들 한강의 채식주의자에 관하여 이야기할지도 모르지만 나는 이 책이야말로 그의 경지를 초월한 소설이라고 감히 평해봅니다. 누구에게나 아픈 손가락 같은 역사. 그러나 앓는 줄 모르고 지나칠 그 상처를 그는 외면하지 않고 묵직하게 응시합니다. 그렇습니다. 이 책은 1980년 5월의 광주를 다룬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알아야 할 것들을 알려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안다는 것은 때때로 너무나 아프고 잔인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더더욱 5.18 광주 민주화 운동에 관한 영화, 소설, 기사에 관하여 도망가고 싶을 때가 많았습니다. 비단 5.18 뿐이겠습니까. 일제시대와 6.25를 거치면서 민족에게, 인간에게 자행된 폭력과 만행의 역사를 외면하고 싶을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존재한 이 야만의 세계를 도대체 왜, 어떻게 더듬어야 하는가에 관하여 늘 숙제였습니다. 나는 절대 가늠할 수 조차 없는 어둠 속에 스스로를 몰아넣을 자신도, 책임도 없다고 면피했습니다. 약하고 비겁한 나의 본질에 관하여 고백하는 이유는 그럼에도 이 소설은 읽어낼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안개 낀 숲을 헤매다 베인 상처는 금방 눈치챌 수 없듯이 서서히 아프고 깊게 울 수 있는 책입니다. 몽롱한 피안의 세계에서의 마취로부터 깨어나 누가 무엇을 지켰고 그러기 위해 어떻게 죽어가야 했으며 산 자의 고통은 무엇인가를 또렷이 바라볼 수 있는 용기가 조금이나마 생겼습니다. 그들을 알려하지 않는 반지성이야말로 그들에 대한 모독일 테니까요.
꽤 오래전에 읽은 책이지만 여전히 몇몇의 문장은 내 안에 통렬하게 살아남아 있습니다. 시대의 트라우마를, 일상을 할퀴고 간 학살의 역사를 진혼하는 그의 섬세한 애도 방식에 관하여 그리고 그래서 잃지 않은 현실의 가치에 대해서도 많은 질문과 여운을 남겨 주었습니다. 좋은 소설을 쓰는 좋아하는 작가님들이 많지만 이 책을 쓴 이후의 한강을 가장 마음 깊이 존경하고 사랑하는 이유입니다.
*한 문장만 남기기에 진하고 무거운 문장이 많아 몇 자 더 남겨봅니다. 공유하고 싶어요.
P.79 당신들을 잃은 뒤, 우리들의 시간은 저녁이 되었습니다. 우리들의 집과 거리가 저녁이 되었습니다. 더 이상 어두워지지도, 다시 밝아지지도 않는 저녁 속에서 우리들은 밥을 먹고, 걸음을 걷고 잠을 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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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95 인간은 무엇인가. 인간이 무엇이지 않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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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99 당신이 죽은 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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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134 굴욕당하고 훼손되고 살해되는 것, 그것이 역사 속에서 증명된 인간의 본질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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