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도 버티는 것. 수치와 오욕. 비난과 비참. 혹평과 저항. 옳은 길을 간다고는 안 했어. 좋아하는 길을 가는 거지. 하늘은 무겁고 겨울답지 않은 장대비가 거리에 쏟아져내렸다. 뒤집어진 우산 같은 재능을 가지고 태어나 생의 피로는 자꾸만 고여 드는 빗물처럼 쌓이고 낭창한 어깨를 적시는 것은 잉크색 서글픔이었다. 젊고 배고픈 작가. 세상의 인정보다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매기는 가치가 그녀에게는 중요했다. 에곤 쉴레의 그림 속 여자들처럼 창백하고 전위적인 포즈로 삶을 기꺼이 농락하고픈 꿈. 두껍고 진득한 유화물감의 질감은 회화적이라기보다 조형적이라 좋았다. 화실을 가득 채우고 있는 메마른 자화상들. 여러 명의 나는 여러 개의 의견을 가지고 여러 번 떠들어댔다.
"포기해, 안나. 이 번이 몇 번째야."
"먹고는 살아야지. 그림만 붙잡고 있으면 밥이 나오니."
"나이만 먹어서는. 시집이나 가버려."
"본질보다 중요한 건 실제야, 안나."
나이프를 들어 그녀들의 입을 찢어발기고픈 욕망이 들 때 즈음 배가 고파졌다. 살아있다는 증명은 작품이 아니라 뱃속으로부터라고. 비 내리는 거리는 어둑해지고 화실의 흐릿한 불빛은 삭막한 정서에 약간의 온기를 더할 뿐. 알아도 버티는 거지. 오도카니 생에 불어닥치는 마파람을 맞고서. 캔버스 귀퉁이를 찢어 잘게 씹는다. 수치와 오욕. 비난과 비참. 혹평과 저항. 옳은 길을 간다고는 안 했어. 좋아하는 길을 가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