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생명은 수명을 다하면 이 우주에 녹아들어 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죽음은 무나 공허의 세계로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녹아들어 가는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내 생각이 맞다면, 더 이상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죽음과 삶은 모두 한 차원 속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시오타 치하루, 영혼의 떨림
혈관의 숲, 새끼손가락에 끼워진 붉은 실을 따라 인연을 찾아 헤매입니다. 반드시 당신이 거기에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듭니다. 내 작은 일상을 째면 벌건 사치의 시간이 생깁니다. 작품이라 불리는 당신의 부산물을 바라보는 일은 시간의 회랑을 따라 당신에게 노골적으로 초대되는 기분입니다. 응축한 질량이 당신의 작품에 집요하게 깃들어 있습니다. 그 검고 붉은 영혼의 동공에는 무겁고 끈적한 고요가 있습니다. 무엇을 고민하고 분노했으며 공허했는가를 행위하는 당신이 있습니다. 다시 태어난다고 해도 완벽히 이해할 수 없겠죠. 완벽도 벽이기에 그 경계를 허용해서는 안됩니다. 당신은 모호한 지점을 경험했습니다. 아이슬란드의 초원에서, 죽은 동물의 턱뼈에서, 아홉 살 때 불이 난 옆집의 피아노에서 이미 당신은 무한히 질문했고 의아했으며 무너졌을 것입니다.
당신이 앉아 있는 피아노에서 레퀴엠이 연주된다고 한들 나는 숙연해지지 않을 것입니다. 새까맣게 그을린 피아노와 검은 의자들에서 묵묵한 탄 냄새가 납니다. 당신의 기억이 구현한 완전한 인공 앞에 감히 당신을 체험합니다. 기억의 재구성을 통해 우리의 좌표는 잠시나마 겹쳐집니다. 내게 겨우 뚜렷한 것은 타고 남은 목재의 냄새. 그뿐입니다. 나와 당신의 모호한 지점들이 한데 섞이고 머물렀다 결국 분열합니다. 오물을 뒤집어쓴 몸, 혈관에 뒤엉킨 육체, 어린 날의 기억. 무엇이나 궁금하고 무엇이나 소비합니다. 공허에 분노합니다. 무아지경을 전시합니다. 하루 내내 자기 이름을 쓰는 경험은 어떠한가요? 백미러를 보고 후진하는 자동차처럼 뒤로 걷는 기분은 무엇입니까? 당신은 무엇을 겪고 무엇을 잃고 싶었나요?
존재하지만 표현할 수 없을 때 인간은 절망합니다. 존재를 설명하면 설명하려 들 수록 아득한 저 편으로 사라져 실체는 흐려지고 이단의 언어만 남습니다. 환생의 카테고리를 우리는 벗어날 수 없습니다. 좌절과 울분의 춤을 추는 당신의 몸짓에 찬사를 보냅니다. 죽음을 고대합니다. 당신이 잉태한 면면의 공간은 촘촘하기도 해서 나의 상념이 빠져나갈 틈이 없습니다. 작품에서 당신을 보고 텍스트로 당신을 읽습니다. 때때로 당신은 거대한 창, 우주의 돋보기가 되기로 결심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는 마침내 잠시 붉은 실의 인연처럼 만났다 헤어집니다. 찰나는 영겁이 되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