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의 일기

by 올빗ORBIT

1.
글들이 초췌한 민낯을 드러내는 시간이 있다. 다가가지도 물러나지도 못하겠다. 굽이치는 일몰과 나선형의 하루를 횡단한다. 무엇이라도 기록해 두어야겠기에, 기록해야만 유의미해질 것 같은 강박으로 공백 위를 나뒹군다.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다. 허기가 밀려온다. 채집할라치면 포르르 날아오르는 잠자리처럼 시간이 가볍다. 가벼워서 이윽고 사양한다.

2.
존중에는 거리가 필요해. 일 할 때에도, 가족에게도, 친구 사이에도. 아이를 키우는 엄마도 아이일 때가 있었다. 그가 아이였을 때, 딱 그만한 나, 그렇게 우리는 종종 서로를 포개며 같이 컸다. 전에 말했나? 내가 유치원 중퇴인 이유는 말이야. 1박 2일짜리 유치원 캠프에 갔는데 새벽에 죽어라 등산을 시켜놓고 아침밥으로 꼴랑 수박 한쪽이랑 토스트 반개만 줘서야. 그때 너무 서러웠거든. 차창 밖으로 어릴 적 다녔던 유치원 자리에 카페가 생겼다. 베시시 웃는 친구의 얼굴은 어릴 때와 변한 게 없다. 때때로 우리는 일상을 쪼개서 밥을 나누고 커피를 마신다. 커피 가게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이 좋아서 검색해 본다. 아쟁일까. 해금일까. 동양의 현악기는 비운의 정서가 있다. 처연한 여인의 하소연 같아. 중국의 현악기인 얼후의 연주라는 걸 알게 되었을 때도 그저 가만히 고개만 주억거린다. 서로를 이해하는 게 왜 중요하냐면 결국 그게 관계의 극복이니까. 친구는 관계의 해를 구하는 것이 어렵다고 했다. 이해의 범주를 벗어난 사람들에게 자꾸만 화가 난다고 도 했다. 그렇지만 친구야, 해서 안되더라도 포기는 하지 말자. 너무나 각자인 채로 죽어가지 말자. 어차피 우리는 서로에게 수렴될 텐데. 그렇게 이 우주에 없는 듯이 결코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서로를 버려두지는 말자. 그거 무척 외로운 일이잖아. 문장에서의 부사는 용납받기 힘들지만 우리의 대화는 종종 비문과 부드러운 부사와 감탄사로 범벅인 채 여기저기 피고 진다. 사실은 마음에 드는 음악이 흘러나오는 잠깐의 시간쯤 입 닫고 가만히 있어도 불편하지는 않을 사이라는 것이 좋다. 전쟁 암호와 같이 난해한 영혼을 빤하게 들여다봐주고 맞장구쳐 주는 친구가 있는데 뭐, 딱히 더 부러울 게 없을 거다. 복 많은 자식.

3.
‘노동의 사유'라는 작은 전시회에 들렀다. 나무로 목각한 노동자의 얼굴들이 아름답다. 인간의 ‘존재양식'을 ‘노동’에서 찾는 담대함이 나무옹이의 구운 결 사이에 끼어있다. 주름 진 시간을 되도록 빨리, 그리고 많이 보상받았으면 좋겠다. 열심히 일했으니 꼭 좋은 날이 올 거예요. 믿고 싶다. 이토록 건강한 피로를. 동화적 사유를. 웃으면 복이 오고 착하면 행복해지는 매우 비약적인 성선설이 팽배한 나라에서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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