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몰년 미상

by 올빗ORBIT

나이를 잃어버린 사람이 있었다. 사실은 딱히 중요한 사람이 아니라고 여겼는지도 모른다. 아무도 그의 생일을 물어본 사람이 없었고 태어난 날이 축하받을 일이라고는 꿈도 꿔보지 못할 만큼 변방의 삶을 살아가던 사람이었다. 그의 검소한 인맥과 남루한 일상이 타인으로부터 그를 철저히 숨겨주었다. 어눌한 언변 탓에 아무도 그를 궁금히 여기지 않은 것은 가히 신의 가호라 할 만한 것이었다. 살아남은 것이 축복이라면 말이다.


타인의 타액으로부터 안전한 사람. 대화나 관심 없이도 사는 사람. 외롭지 않은 사람. 그는 모든 생존 조건에 꼭 맞는 인재였다. 때문에 그 세기 최후로 살아남은 자는 그가 아닐까 역사학자들은 추측하곤 했다. 기록으로 남을 만한 것이라고는 그를 닮아 평범하디 평범한 무역회사 홍보용 다이어리에 단정하게 적힌 스케줄이 다였다. 유성볼펜에서 흘러나온 잉크의 불규칙한 흐름만이 그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구분 지어 주는 유일한 척도였다.


집, 회사, 집, 회사. 늘 똑같은 일정을 매일 기록한 그의 스케줄은 때때로 ‘그 세기’ 전문 학자들을 멘붕에 빠뜨렸다. 똑같은 패턴의 반복으로 보건데 군사 암호가 아닐까요. 그가 심각한 우울증을 앓고 있었다는 반증이 아닐까요. 평범한 스케쥴러가 아니라 현대인의 고독과 감정의 매몰을 표현한 설치 예술 작품이 아닐른지요. 첨예한 의견들의 대립되는 가운데 한 학자가 외쳤다. 단순하게 생각해요. 늘 진실은 단순했어요. 그는 매일이 기록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여겼던 겁니다. 비록 표현할 언어는 가난했지만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반복’과 ‘안정’이었던 거예요. 동의에 가까운 침묵이 흘렀다. 여전히 그의 생일과 사망일은 알 수 없지만 ‘그 세기’ 최후의 생존자가 그 사람일 것이라는데 더 이상 이견은 없었다. 생몰년 미상의 범배가 역사에 기록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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