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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욱 Mar 17. 2020

일상이 포착하지 못한 미세한 떨림에 대하여

미카엘 하네케 <아무르>

 


영화는 그 자체로 엿보는 행위이다. 엿보기 구멍을 뚫고 일상적 대화에 포섭되지 못한 개인적 영역을 한편으로는 연민의 시선으로, 또 한편으로는 폭력적인 침투의 태도를 통해 하나의 사건으로부터 일정한 거리 두기를 시행하는 것과 같다.


 결코 전체적으로 개방되지 않은 부분적 이미지는 장막으로 가려진 부분에 관객의 상상력을 대입시키길 요구한다. 롤랑 바르트가 사진에 대해서 말했던 것처럼 영화와 사진과 같이 현실을 포착하는 매체에서 삶의 그림이 그려지는 부분은 네모난 프레임 바깥의 지점이다. 관객은 자신이 열 수 없이 굳게 닫힌 문 틈 사이로 눈을 대고, 엿보거나 엿들으며 자신의 윤리적 차원으로부터 안전한 거리를 확보하고, 이리저리 판단할 수 있다.

 따라서 영화는 본래적으로 관음적이다. 자신이 도달하지 못하는 판타지에 의존하며 살아가는 인간은 그것에 다가가기보다는 판타지의 무한한 반복에 유희에 자신을 맡기고 욕망의 단절된 지점을 형성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것일지 모른다. 이런 일련의 행위가 기능하기 위해선 욕망, 윤리, 도덕, 폭력이라는 근원적 리비도와 초자아적 억압 기제들을 하나의 상자에 집어넣고 그것의 뚜껑을 닫으며 흔들어보고, 소리를 들어야 한다. 절대 보여서 안 되는 것들이 부딪치며 형성하는 파괴적 불협화음을 만들어야 한다.


 하네케의 영화가 이러한 지점에서 특히 뛰어난 부분은, 이전에 한 번도 드러나지 못했던 폐쇄적 공간에 관객을 참여시킨다는 점이다. 그는 벽에 구멍을 뚫지도, 우리를 사건으로부터 거리 두게 하지도 않는다. 나는 그의 영화의 초중반 부를 감상하고 있을 땐 이미 폐쇄된 감정과 욕망에 영역에 나 역시 갇혀있게 되는 기이한 느낌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음을 깨닫는다. 날카롭고 본능적인 감정을 다루면서도 공간과 시간을 다루는 차분한 기예를 동반하는 감독의 화법은 낯선 타지에서 고향 사람의 목소리를 듣는 듯하다. 처음 만나고 아무런 정보도 없는 이의 목소리로부터 아주 오래 전의 기억이 세계로 드러나게 되는 순간에, 나는 낯선 위협으로부터의 어떤 방어기제도 더는 가질 수가 없었다. 그러한 고향은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기도 이전에 존재했었을 수도 있는, 이제는 기억 저편으로 사라졌던 공간이다. ‘이전에는 말해지지 않았던 것을 처음으로 단어 속으로 끌어올리고, 지금껏 은닉되어 있던 것을 말함을 통해 나타나게 한다’는 하이데거의 시인에 관한 정의에 이토록 적절하게 부합하는 영화가 또 있을까.


 영화의 시작은 서사의 마지막을 보여주는 하나의 서곡이다. 어떠한 낭만적 이미지와 음악도 없이 차갑고 넓은 아파트를 비춘다. 그곳은 사람이 사는 곳이라기보단 경찰과 관계자가 이리저리 걸어 다니며 분석하고 판단하고 일사천리로 산만한 장소다. 이는 마치 영화관에 앉아 재미있는 것을 포착하려 드는 감상자들의 태도를 보여주는 듯하다. 시끌벅적한 소음 속에서 카메라는 창문을 비춘다. ‘네가 창문 열었어?’라는 대사가 개폐된 창문의 장치적 역할을 강조한다. 열린 창문으로 영화의 공간적 서사가 시작되고 곧이어 카메라는 가슴 위에 꽃다발을 얹고 누워 있는 평온한 안느를 비추며 캐릭터의 서사 역시 시작한다.



 안느와 조르주의 관계를 노부부의 사랑 이야기 정도로 단순하게 환원하기엔 영화 속에 드러나는 미세하고 촘촘한 상징과 몽타주를 그저 장식적인 것 이상으로 끌어올릴 수 없다. 영화가 가장 크게 말하고자 하는 것은 내가 앞서 언급했던 ‘폐쇄’의 지점이다. 조르주와 안느는 아파트로 진입하며 수상하게 훼손된 자물쇠에 관해 이야기한다. 조르주는 그것을 누군가 침입한 흔적으로 보고 조심할 것을 이야기한다. 이런 무단적 침입에 대한 두려움과 거부감은 영화가 진행되는 내내 등장인물들에 태도에 기인하여 언급된다. 그렇다면 그것은 무엇의 침입이며, 무엇으로부터의 두려움인가? 이를 유추할 수 있는 것은 그 전의 공연장에서 손뼉을 치는 관객들을 비추는 컷과, 곧이어 이어지는 공연에 대한 그들의 감상평이다. 공연장에서 무대가 아닌 객석을 비추면서 잔뜩 기대한 관객들의 얼굴을 보여주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이 영화를 감상하는 나를 비추는 거울이다. 어떤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을지, 무슨 말을 해 줄지를 기대하고 있는 나로부터 노부부는 굳건히 문을 잠가두고 이런 폭력적이며 관음적 침입에 대한 낯선 두려움을 느낀다. 이 영화는 메타포를 사용하는 방식에 있어서 한편으로는 노부부의 대화로 관객을 공감시키면서도 공간의 폐쇄성을 통해서 관객을 멀리하기도 한다. 아파트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극 중 이야기는 ‘이곳은 너의 장소가 아니다.’라는 하나의 선언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만약 영화라는 것이 정말 죽음으로 달려드는 길이라면, 이는 그저 관객들에게 상영되기 위한 보편적 매개체 이전에 개인의 범주에서 결코 확장될 수 없는 유언장이기도 하다. 음악가 출신의 로랑 부부는 이처럼 예술가가 욕망을 발산하고 간직하는 방식에 대한 은유로 나타난다. 한편으로는 두려움으로서, 사랑으로서 감정 내부 깊숙한 곳으로부터 발현되는 이러한 종류의 것들을 노부부가 대하는 태도는 억압도 아니고, 무작위적 표출도 아닌, 하나의 받아들임이다.


 안느는 죽음으로 걸어가는 존재이며, 조르주는 안느를 죽음으로부터 구제하려 들지 않는다. 안느 스스로가 그러한 일체에 노력에 관한 거부감을 느낀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조르주 역시 외부적 세계에 대한 거부감에 함께 하는데 복도로 걸어가며 물에 젖은 복도를 발견하고 얼굴 없는 이에 의해 살해위협을 받는 꿈에 관한 시퀀스가 이런 거부감과 공포감을 가장 가시적으로 드러낸다.

 자물쇠에 관한 언급은 총 3번 나온다. 위에서 언급한 두 가지 외 나머지 한 장면은 안느의 병이 발현하는 시점이다. 이 컷에서 끊임없이 흐르는 물의 소리가 긴장감을 유도하고 조르주의 막을 수 없는 일상의 무너짐을 표현하면서 일련의 과정을 롱테이크로 담는 연출이 인상 깊다. 고다르가 바다를 영화의 죽음에 대한 상징성으로 표현한 것과 마찬가지로 이 영화에서도 물은 비슷한 의미로 계속해서 등장한다.



 삶과 죽음은 서로 온전히 떼어져 있는 관계가 아니다. 둘은 서로 교차하고 반복되며 서로에 대한 기의와 기표가 되고 일상 속에는 갑작스러운 죽음의 신호가 도래하는가 하면 그로부터 벗어나려는 유머러스하고 고통스러운 삶의 의지가 있다. 영화의 힘이 발현되는 지점은 안나의 죽음 그 자체를 묘사한 부분보다도 죽음이 도래하는 느린 과정 속의 복잡하고 미묘한 삶의 의지와 거부될 수 없는 고통의 중첩이다. 미카엘 하네케는 갑작스럽고도 당황스러운 방법으로 몽타주를 사용한다. 조르주가 안나를 위해서 즐거운 이야기를 해주는 컷과 병이 발현되는 컷,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밥을 먹는 이런 사건들이 비 일관적으로 교차하면서, 삶이란 더 이상 그 자체로서의 살아있는 삶이 아니며, 죽음이란 이미 내가 볼 수 있는 것 이상으로 가까이 다가와 있음을 보여준다. 그들이 죽음을 거부할 수 없는 이유는 삶이 죽음보다 더 나약하기 때문이 아니며, 삶이란 이미 그 자체로 죽음의 영역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감독은 몽타주를 통해 감상자의 의지가 비현실적인 판타지에 붙잡혀 두도록 놓아두지 않는다. 그것이 발현될 때 컷 전환을 통해 모든 것을 깨뜨려 버린다. 음악의 사용도 마찬가지다. 이 영화에서 음악은 반드시 등장인물이 피아노를 연주하고 오디오를 통해서 흘러나오는 두 가지 경우에서만 등장한다. 즉 서사와 극적 장치는 서로 분리되지 않는다. 살아 있는 사람이 누군가를 위해서 연주하는 피아노와 이미 흘러가 버린 선율을 녹음해서 듣는 음악 시디에는 어떤 균열이 있을까? 안느는 시디가 듣기 싫다고 꺼버리라 하고 조르주는 혼자서 시디를 들으며 피아노를 치며 죽음의 위협으로부터 해방된 안느를 상상한다. 음악에 대한 상징적 표현을 통해 죽음을 바라보는 노부부의 서로 다른 시선을 포착한다.



 죽음이란 고통스러운 것이다. 더 나아가 혐오스러운 것이다. 이러한 사실 속에서 ‘죽음을 있는 그대로 맞닥뜨려라’라는 말은 개인에 관한 폭력이 된다. 노인의 죽음뿐 아니라, 우리의 일상 기저에 항상 존재하는 무언의 상실감은 우리 스스로가 감히 맞닥뜨릴 수 있는 가벼운 감정이 아니다. 이런 죽음 앞에서 누군가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죽음과 언제나 동시적으로 곁에서 존재하는 ‘생명력’을 드러내 주는 것이다. 죽음이 우리에게 엄습해 온다 해도, 그것으로 인해 온전히 잡아먹히기 이전엔 삶이라는 것 역시 넝쿨처럼 같이 얽히면서 자라나고 있기 때문이다. 조르주는 안나에게 이러한 사실을 계속 상기시켜 주려 한다. 한 번도 하지 않았든 재밌었든 이야기들을 꺼내고, 안나가 ‘아파’를 외칠 땐 아프지 않다는 거짓보다 자신이 아팠던 기억을 함께 나눈다. 간호사는 안나의 머리를 빗으며 거울로 안나의 얼굴을 비추지만 안나가 그로부터 볼 수 있는 건 혐오스러운 죽음의 엄습뿐이었다. 조르주는 이런 강압적인 간호사의 행동에 분노를 느끼고 해고한다.

 안느의 죽음 직전 조르주는 자신의 어렸을 적의 일화를 들려준다. 먹기 싫은 쌀 푸딩을 앞에 두고 우는가 하면, 행복하면 꽃을 슬프면 별을 그려서 엽서를 보내라는 엄마의 말에 별이 한가득 그려진 편지를 엄마에게 보내주었다는 이야기, 그 편지를 잃어버린 게 아쉽다고 말하며 안느를 죽음으로 보낸다. 행복을 의미하는 꽃은 영화의 처음과 마지막을 장식한다. 영화의 첫머리에 안느의 가슴 위에는 조르주가 꽃다발을 놓아둔 것이 보이고, 마지막의 조르주는 혼자서 꽃을 가위로 자르며 그런 감정을 자신으로부터 떼어놓는다.



헤르메스적 예술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모든 영화가 그렇듯 이 영화도 예술과 삶에 대한 주제를 담고 있다. 나는 노부부의 딸, 에바에게 감독 자신의 태도가 가장 깊게 투영되어 있다고 느낀다. 나 역시 에바의 태도에서 벗어 날 수 없고 보통 생각하는 예술가의 위치에 서 있는 것은 에바일 수밖에 없다. 조르주는 에바에게 ‘안느는 낮에는 하루 종일 잠을 자고 밤에는 깨어있으니 밤에 오라’라고 말한다. 하지만 에바가 방문하는 것은 언제나 낮이다. 이는 안느가 밤에 방문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접근할 수 없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영화 내에서 아파트라는 공간, 특히 밤의 공간은 외부인의 침입이 불가능한 완전히 폐쇄된 공간으로서 에바는 접근할 수가 없다. 밤은 죽음이 다가오는 시간이다. 안느가 잠 못 이뤄 뒤척이는 것도, 조르주가 악몽을 꾸는 것도 모두 밤에 이루어진다. 이러한 죽음은 외부세계와의 완전한 단절이다. 에바는 그들의 가족으로서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젊은 나이로 인해 아직 더 넓고 먼 삶의 세계와 연결되어 있다. 아파트를 여러 번 방문하고 엄마를 병원으로 데려가라는 현실적이고도 이성적인 의견을 낸다. 이런 이성적 교환의 태도는 안느의 언어를 해석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하며, 그녀는 자신의 어머니가 하는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 하지만 부모님의 사랑을 한편으로는 이해하는 바여서 에바가 할 수 있는 것은 창밖 (더 넓은 세계)를 바라보고 울어버리는 것밖엔 없다. 나에게는 에바의 캐릭터가 고독과 폐쇄된 욕망과 삶의 장소에 가장 밀접하게 접근하면서도 자신의 무기력함을 동시에 느끼며 창밖을 바라보는 예술가의 해설자 적, 즉 헤르메스적 태도에 관한 대변으로 보인다. 그는 삶으로부터 벗어 날 수 없어 로랑 부부처럼 고정된 감정의 장소에 편안히 있을 수도 없고, 그들을 도와줄 수도 없는 무력한 존재다.



 자크 데리다는 자연물의 상실 뒤엔 인위적 창조물의 대리 보충이 등장한다고 말한다. 언어와 예술, 대리모와 같은 존재는 자연의 결핍을 대리하고 점유하며 결국엔 그것을 넘어서고 망각시킨다. 가장 면밀하게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는 예술가는 에바처럼 진정 그 장소에 참여할 수 없는 결핍과 그로부터 기인하는 무기력을 전제해야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와 같은 상실된 자연물에 대한 언어의 대리 보충은 마지막 장면에서 조르주를 비로소 아파트 바깥으로 나가게 만드는 계기가 된다. 안느의 최종적 죽음은 조르주에게 대리 보충물로서 가상적 안느의 이미지를 선사하고, 실재하지 않는 이미지에 기대어 조르주는 욕망의 폐쇄된 상자로부터 벗어난다. 안느의 죽음 뒤에 조르주가 일기를 쓰는 것도 마찬가지로 루소가 말한 것처럼 인간의 울부짖음의 상실 뒤에 그것을 대체한 언어의 등장을 보여준다. 여기서 루소는 인간의 언어 발명 이전의 원시적, 원초적 울부짖음은 음악이 되어 흔적으로 남았다고 말한다. 주인공은 음악가 부부이고 마지막 장면에서는 아무런 음악도 나오지 않는다. 에바만이 첫 장면에서 창문이 열려 있었듯, 모든 문이 열린 아파트에서 허망하게 앉아있을 뿐이다. 남는 것은 필연적 의지에 의한 삶의 연속과 욕망으로 접근하려는 힘의 단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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