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라타르 <토리노의 말>
영화에 대한 짧은 감상문을 계속해서 쓰고 있다. 무료한 일상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나 보고자 하는 시도이기도 하며, 현상학에 대한 공부를 한 뒤로, 나의 의식이 지향하는 바에 대하여 더 애정을 가지고 분석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아무리 데이빗 린치가 ‘영화는 말로 할 수 없는 체험이다.’라고 말 했던 들, 영화에 대한 일정부분의 분석 없이 나의 감상을 허망한 시간성 뒤로 내쳐버리고 싶진 않았다. 적어도 영화의 메세지가 나에게 닿지 못한 부분이 있다면 왜 닿지 못했는지 파악하며, ‘이 영화는 내가 말 하고 싶었던 바를 알려주었다.’라는 자기발견적 깨달음을 주었을때 그것을 정확히 파악하고 분석하여 결국은 내가 평소에 고민하고 곰씹던 이야깃거리 들을 드러내고 해체 하고 싶었다.
어쩌면 그저 요깃거리일지도 모르는 영화에 너무 큰 의미 부여를 한 것일지도 모른다. 확실히 나는 영화에서 어떤 희망을 보고 있는 지도 모른다. 군입대 초반에 무 비판적이고 게걸스러운 태도로 영화를 감상했던 것과는 거리를 두고 있다. 영화라는 형식에 매력을 느끼게 되면서 평면적 차원에서 넘어가 하나 혹은 둘 이상의 단계를 이룩하는 영화들에 빠져들게 되었고 그러한 영화들을 감상에 수반되는 이야기 없이 그저 눈으로만 바라 보기엔 나의 시간도 아까웠고 좋은 감상법도 아니었다. 하지만 내가 영화에 대해 떠오른 질문들에 대해서 어떤 평론도 시원한 답을 제시 해 주지 않았다. 하기야 평론이 라는 것이 답을 구해주는 수학자적 역할은 하는 것은 아니지만, 문제제기의 방향성 마저 다를 땐, 내가 직접 글을 써 보고 싶다는 생각을 들게 해 주었다. 설령 내가 영화에 던지는 질문들이 어리숙하고 바보같아도 그 미숙함의 순간성 마저 기록해 두고 싶었다고 해야 할까?
그래서 무거운 영화들을 자주 감상하고 있는 요즘인데 그 중에서도 가장 무거웠던 것은 이 벨라타르 감독의 토리노의 말이 아니었을까 싶다. 무겁다는 것은 난이도에있어서, 메세지에 있어서를 모두 총괄한 총체적 의미에서 그렇다는 거다. 일단 러닝타임이 2시간 30분 가량인데, 컷은 영화 통틀어서 31컷 뿐이 되지 않는다. 대사는 모두 합하면 에이포용지 한장에 들어가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적다. 게다가 흑백이다. ‘예술영화가 좋다’라고 거들먹대는 나에게도 이영화는 쉽지 않은 모습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영화가 졸리다거나, 지루하다거나, 실망스러웠던 적은 러닝타임 내내 한번도 없었다. 오히려 이 극단적으로 루즈한 연출은 나에게 강한 리얼리티로 다가왔던 것 같다. 실제로 난 두시간 반 동안 거친 바람이 부는 토리노의 집에서 같이 있었던 느낌이 들었다.
영화의 시작은 니체에 대한 일화로 시작한다. 니체가 자신의 말년에 길을 걷다가 채찍을 맞고 있는 말을 껴안고 울고 이틀 뒤 잠에서 깨어나 ‘어머니, 전 바보였어요.’를 외치며 미쳐버린 이야기. 실제로 니체가 죽기 10년 전에 일어난 사건이다. 영화에 대한 간략한 시놉시스에도 이 이야기가 쓰여있다. 나는 영화의 시놉시스를 정말 대충훑고 영화를 보기 시작하는 편이다. 옛날영화 혹은 예술영화는 시놉시스에 결말까지 다 써놓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난 시놉시스를 대충 흩고 당연히 니체에 대한 영화라고 지레짐작했다. 결론적으로 이 영화는 니체에 대한 영화이다. 그러나 니체는 등장하지 않는다. 니체와의 에피소드로 기억되는 말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진행시키려면 극 초반에 니체와 말의 이야기를 등장시킬 법도 한데, 감독은 그러지 않는다. 이것은 감독이 ‘나의 영화는 철학자의 죽음 이후를 다룬다.’라는 일종의 선언 처럼 보여졌다. 니체가 말을 껴안고 운 뒤, 미친 뒤에 일어나는 일들을 영화로서 다룬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철학적인’ 관점으로 삶을 조명하고 그것을 극중 드러내면서도 어쩌면 철학이 닿지 않는 부분을 영화로 이야기하면서, 철학에 대한 단절로써, 니체의 단절로 영화의 의미는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부녀는 극중에서 정말 필요한 말 들을 제외하곤 대화가 없고, 그 어떤 계몽적 말도 영화안에서는 힘을 갖지 못한다. 냉소주의적인 철학자 친구의 말에도 주인공은 관심이 없으며, 성경을 나누어 주는 집시들도 곧 내쫓아 보인다. 그들은 메시지와 삶에 대한 어떤 관심도 없다. 오로지 그것과 일체화 되어있다. 카메라의 시선은 매우 건조하게 그들의 움직임을 포착한다. 인물이 한명 한명씩 창을 통해 바깥을 바라 보듯 카메라도 창을 통해 바깥을 비추고, 정사각형의 식탁에 식사를 같이 하는 일원 인 듯 두 부녀를 비춘다. 건조하고 반복적이고 의미없는 일상속에서 우리는 어떤 의미라도 찾기 위해 기다리고 있으나, 그것을 철저히 붕괴시켜버린다. 벨라 타르의 영화속에서는 정말 무미건조한 컷속에 잠깐 잠깐 이벤트가 등장하는데, 그 특유의 느린 서사로 인해서 의미를 가지는 것은 이벤트가 아니라, 이벤트 사이에 항상 존재하는 무거운 일상이다. 일상을 카메라로 관찰하는 우리들은 그 어떤 행동도 무의미함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밥을 먹는 것, 밥을 먹기위해 불을 피우는 것, 물을 떠 오는 것, 불을 켜고 끄는 것…
이러한 와중에 그들의 일상은 천천히 붕괴되어 가기 시작한다. 우물은 마르고 불도 켜지지 않는다. 이는 창세기에서 세상이 6일만에 창조 되었다는 사실을 거꾸로 돌린 것이다. 영화 전체의 컷이 31컷인 이유도 마지막 한 컷을 제 하면 5일이 6컷씩 인데 6이 사람을 상징하는 수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영화를 보면서 다른 생각에 계속 빠지면서 사실 기분이 몹시 안 좋았다. 잡생각이 들고 미래에 대한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떤 행동을 하다가 그 행동에 익숙해져서 신체와 정신이 분리되는 경험은 결국 일상이다. 우리는 모든 일상을 일일이 되집고 만져가며 살지 않는다. 우리의 상념은 항상 다른 어딘가에 붙잡혀 있지 않은가. 길을 걸을 때도 오른발 왼발 오른발 왼발에 집중하는 것이아니라. 다른 무언가를 상상한다. 이처럼 익숙하고 반복되는 행동은 생각과 분리가 되곤 하는데, 나는 그걸 이영화에 느끼면서 진정 이 세계안에서 살아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일상과 영화의 경계는 독특한 방법으로 깨진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일상을 찬찬히 흞튼 롱테이크의 미학은 우리가 그것에 집중할 때가 아니라 집중이 분산 될때 피어오르는 것이다.
흔히 어떤 사건이 의미를 가지기 위해선 끝과 시작이 정해져 있어야 한다고 말해진다. 물론 이영화의 가장 주된 테마는 삶과 죽음 그리고 노동의 종말, 생존이다. 그것에 관해서도 이야기 하고 싶은 것도 많은데 그 부분은 많은 다른 평론가들이 이야기 해주었고 내가 가장크게 느낀 것은, 만약 나의 행동과 생각이 분리된 일상도 어떤 끝과 시작을 상정함으로써 의미를 가질수 있느냐의 문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