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비드 린치 <이레이저 헤드>
데이비드 린치의 세계는 확실하다. 그는 거대한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태도로 영화를 만들지 않는다. 철저히 개인의 폐쇄적이고 불합리한 환상을 불친절하게 표출하는 데에 관심이 있지, 생각이 어떻게 객체화되며 시각화되는지에 관해서는 한발 물러서는 듯하다. 이를테면 음악을 작곡하는 것보다는, 소음을 만들고 화음을 깨트리는 갑작스러운 침입자의 역할에 가깝다고 해야 할까.
그래서 린치를 해석하는 방법 또한 일관적인데, 그것은 철저히 데이비드 린치라는 한 개인의 정신세계의 대한 탐구에 멈춰버리는 것이다. 이를테면 당신이 <이레이져 헤드>, <블루 벨벳>, <멀홀랜드 드라이브>등을 봤다면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요소들을 어렵지 않게 알아차릴 수 있다. 영화가 절정으로 치닫기 직전 등장하는 어둠 속의 무대와, 끈적거리고 꿈틀거리는 요소 (그것들은 대개 클레이 스톱모션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보여주며 편집증적 강박 혹은 외상을 암시하는 듯한 인물관계, 철저히 상업적인 기호로 작동하는 할리우드에 관한 조명등, 데이비드 린치의 영화들은 일관적이며 그만큼 작가주의적인 방법의 비평이 작동해왔다.
그러므로 이레이져 헤드를 하나의 텍스트로 해석해 읽는다는 것이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내가 6년 만에 이 영화를 다시 감상했을 때 느껴지는 부분은 그 예전의 데이비드 린치와는 다른 점이 있었다. 감독은 스크린에 언제나 어둠을 형성하고 그곳에 숨겨져 있는 꿈틀거림의 요소에 관객들을 꼼짝 못 하게 가둬두려 한다. 나는 그러한 함정 이면에 가시화되지 않는 또 다른 어둠의 영역을 동시에 관조하고 밝혀내면서 함정의 작동방식을 뒤엎어버리고자 시도한다.
삶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 더 멀리에서 바라보면 그것은 우스꽝스럽고도 징그러운 꿈틀거림이다.
이런 생각을 해보았다. 우리의 시선이, 삶에서 한 발짝 멀어지고 또 한 발짝 멀어지다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토끼굴처럼 한참 굴러 떨어져야만 도달할 수 있는 거리까지 멀어져서 인간상을 바라보게 된다면 그것은 어떤 모습일까. 그것은 우리가 발 밑에 지나가는 소리조차 들을 수 없는 벌레들의 힘겨운 사투처럼 한편으로는 괴상하고 징그럽고 혐오스러운 것으로 보이고 또 한편으로는 코믹하고 가소로운 것처럼 보일 것이다.
린치는 철저히 삶에 대해서 말한다. 영화의 2시간의 짧은 러닝타임과 어두운 암전 상태의 영화관이라는 공간은 마치 관과 닮아서 감독들은 언제나 죽음에 대해 말해왔는데, 그는 살아있다는 것에 대해서만 관심이 있다. 살아있음이란 생물학적으로 종을 유지하고 생식하는 행위를 말하기도, 사회적으로 타자들과 연결 지으며 그물망은 형성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는데, 모든 의미에서 그 행위들은 혐오스러운 행위로 환원되어 스크린에 등장한다.
주인공은 아내와 아이를 갖게 되었고 장모와 장인어른의 집에 가서 음식을 대접받는다. 그들은 집을 마련하고 아이를 보살핀다. 여기까지는 무난하고 평범한 가정의 이야기처럼 들린다. 린치는 이런 사회적, 개인적 경험을 하나의 현상으로 받아들인 뒤 거기에 새로운 시선을 부여한다. 식사로 나온 칠면조는 스스로 움직이면서 피를 흘리고 장인은 기괴하게 웃는다. 아기는 아예 인간의 형태에서 멀어져 있다. 행복을 담고 있어야 하는 모든 삶의 요소가 다른 쪽으로 비틀려 있다. 이 영화는 공포영화와 전혀 다른 방식으로 구성되어있다. 공포 영화는 행복하고 완전한 한 가정 혹은 일동을 파괴하려는 한 외부적 대상에 의해 저항하거나 혹은 반대로 무기력해지면서 이야기가 진행된다면 이레이져 헤드는 이미 주인공의 내부적인 요소들, 그러니까 행복으로 사람을 유도해야 하는 요소들이 반대로 혐오스러운 것들로 변모하면서 스스로 내파 해가는 과정을 담는다.
포르노그래피적 이미지는 관조자와 대상 사이의 안전거리가 사라질 때 손쉽게 혐오스러운 이미지로 변신한다. 대상이 스스로 객체화되기를 거부할 때 익숙한 것은 낯설어지고 주체의 신체 내부로 침투한다. 이레이져 헤드에 등장하는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는 여가수는, 조명 아래에서 관객인 우리를 향해 웃음 짓지만 그러한 거리 유지는 무대로 기어올라가려는 정자를 닮은 기괴한 생명체들, 삶을 위한 꿈틀거림을 짓밟으면서 간신히 유지되는 답답하고 차가운 구조다. 데이비드 린치가 카메라로 담으려는 삶은 이처럼 예술의 미디어가 정상동작하기위해 필수적으로 희생되는 잔여물들이다.
이레이저 헤드의 변증법
혐오스러운 것은 내가 하나의 나(I)이기 위해서 제거해야 할 어떤 것이라고 크리스테바는 정의한다. 문제는 제거하는 나로서의 주체와 제거되는 나로서의 객체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다는 점, 때로는 서로 동일시될 수도 있다는 점이다. 이 두 가지를 구분 짓는 것은 단지 시간일 뿐이다. 시간이라는 것은 존재를 행위화 한다는 점이다. 즉 혐오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의 존재를 시간의 층위에서 '행위하는 나'로 바꾸어 놓고 그 행위로 인해서 나의 존재에 어떤 변화가 일기를 기대하는 점인데, 이는 정반합의 과정과 완전히 일치한다. 여기서 정은 반을 형성하기 위한 정이며 합은 정에서 아무런 존재론적 변화도 일지 않았지만 변화했다는 느낌을 주는 합이다. 따라서 존재론적으로 단 하나의 합만이 있었을 뿐, 그것을 시간의 층위로 분해하는 정반합은 주체를 어디로도 이끌지 못하며, 단지 어디로 이끌리는 듯한 느낌만 줄 뿐이다. 사르트르가 이야기하는 의식의 지향성, 즉, 현재에 대한 나의 부정과 미래를 향한 기투는 정확히 같은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반정합이란 방향을 잃고 무한히 표류하는 기표를 이끄는 불빛(하지만 지표 index 없는 불빛) 일뿐이다.
정반합을 하나의 과정 혹은 단계로 늘어놓고 반복하는 주체로 남는다는 것은, 원래 합이었던 정과 반을 둘로 쪼개고 반을 외부적 대상으로 만들 수 있는 하나의 환상의 세계를 구현하고 유희하는 것이다. 조지 오웰의 1984에서 빅브라더와 골드스타인의 관계, 세 대륙 국가의 끝없는 전쟁은 진리에 가까워지기는 커녕 프롤레타리아의 신화의 작동을 유지하기 위한 공회전을 형성한다.
정반합을 존재론적으로 규명하는 것은 린치가 보여준 것처럼 기괴하고 소름 끼치고, 혐오스러운 세계다. 그리고 끝없는 죄책감의 세계다. 아이의 살려달라는 울음소리에 두귀를 막고 라디에이터 너머로 들려오는 여인의 음악소리 (In heanven, everything is fine)에 귀 기울여야 하고, 아내의 부재 아래에서 다른 여인을 향한 욕망에 신체를 내맡겨야 하는, 고통스러운 자기 자신의 대한 이미지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이다.
하지만 한심한 나는 끝없는 메아리 안에서 혐오스러움을 외부로 퇴치하려는 욕망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주인공의 머리는 기계 속에서 갈려 연필로 재탄생한다. 위는 지우개가 달려있고 아래는 연필이 달려있는 오브제, 스스로 쓰고 스스로 지워가는 오브제, 언어적 기능이 제거되고 순수한 사물이 된 인간에게 남은 건 지우개 머리일 뿐이다. 무언갈 욕망하길 멈추지 못하는 하체와 죄책감으로 원점으로 되돌아 가려는, 언어를 만들어 내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려는 지우개 머리로 이루어진 그것은 데이비드 린치가 상상하는 인간에 관한 메타포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