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에 미술관 갔다가 기이하게도 왜가리를 만났다. 생각보다 사람을 경계하지 않고 도심속에 많이 살아 보기 어려운 새는 아니라고 한다. 가까이 가도 도망가지 않고 고개를 몸속에 파묻었다.
살면서 가장 바쁜 한 해를 보내고 있다. 회사일만으로도 시간은 부족하지만, 운영과 사업, 두 건의 소송까지 진행하고 있다. 정말 매일 매일이 삶의 마지막 순간이라는 생각으로 살고 있다. 그 만큼 절실하고 욕심을 버리려고 한다.
전세사기를 당하고 나서 집 인테리어를 꾸미기 시작했다. 본래 나는 아주 조금도 집의 인테리어를 손보지 않았다. 봉천동 원룸에 사는 직장인 혹은 대학생들은 누구나 그럴 것이다. 자취를 위한 원룸은 삶의 공간이라기 보다는 잠시 머무는 장기투숙 호텔과 같다. 무언가 장기적으로 내 소유가 될 가구를 배치하는 건 금전적으로 부담이 되어서 생활에 필수적으로 필요한 물품만 다이소와 이케아에서 대춤 구매해서 구비해 둔다.
그런데 전세사기를 당하고, 그리고 몇 억의 빛이 생길지 모르는 상황 앞에서 나의 태도는 조금 바뀌었다. 이 순간의 공간이 나의 마지막 공간이 될 수도 있고 내가 맞이하는 유일한 생활의 공간이 될 수도 있었다. 이제 이곳은 임시로 내가 잠깐 거쳐가는 곳이아닌, 정말 나의 '집'이 되어버렸다. 그러자 맘에 안들지만 어쩔 수 없이 방치해둔 미감과 형식들을 모조리 바꾸기 시작했다. 못생긴 건 과감하게 버리고 조금이라도 불편한 것도 버리고 과감하게 새로 구매했다.
대표적으로 서류를 보관하는 파일은 내가 고등학생 때 부터 사용하던 파일들이 두서없이 섞여있어 휘황찬란 했다. 그리고 책등도 없어서 어디에 무슨 종이가 꽂혀있는지 열어번 뽑아보고 확인해야만 알 수 있었다. 그것들을 다 버리고 하얀색(불투명한) 책등있는 파일로 일괄 교체하고 책등에는 같은 형식으로 된 인덱스 라벨지를 인쇄해서 제목을 붙여 정리했다. 인덱싱 아래에는 qr코드를 달아 구글 드라이브와 연동하였다.
얼마전엔 '아름다운 빗자루'를 구매하기 위해서 거의 일주일간은 웹을 뒤졌다. 결론은 나무 봉으로 된 무인양품 빗자루였지만 국내에선 더이상 판매하지 않는 제품이었다. 만 얼마짜리 빗자루를 사기 위해서 일주일을 허비하는 내가 한심하기도 했지만, 원룸에 사는 사람에게는 미감적 소품과 생활용품의 경계가 없었다. 대충 놓인 다이소의 2000원짜리 빗자루가 너무 명확하게 공간 한 가운데에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있었고 저, 대강 기능에 맞게 공장에서 찍어낸, 무작위한 컬러와 무작위한 형태로 만들어진 빗자루가 마치 내 신체와 같이 느껴지고 내 운명을 결속하는 것 같아서 짜증나고 화가 났다. 공간이 넓었으면 대충 안 보이는 곳에 빗자루를 쳐박아 둘 수 있겠으나, 작은 원룸에 사는 나는 이 노출된 생활용품들과 시각적으로, 미감적으로 '동거'해야만 했고 어떻게든 그 방식의 협의를 봐야만 했다. 어쨌든 몇 년간 자취생활을 하면서 느낀것은 전동청소기 보다는 빗자루가 조금 더 효율적이라는 점이었고 (청소기의 모터소리는 매우 스트레스를 받게 한다.) 빗자루는 꽤 자주 사용해야하는 도구이기에 구석에 둘 수도 없었다.
일본은 청소하는 문화가 잘 정착되어있어서 상가(마찌야) 앞에 자기만의 빗자루가 걸려 있다는 글을 본 적이 있다. 확실히 일본 갔을 때 아침마다 청소하는 가게 주인들의 모습이 인상깊었다. 아주 작은 동작으로 채 5cm는 될까 하는 면적의 땅을 연속해서 슥- 슥- 쓴다. 생활의 태도와 도구, 미감적 형식이 조화를 이루어서 서로 이야기가 되는 것이 어쩌면 디자이너가 꾸는 꿈이다. 여러가지 영역에서 욕심을 버리려고 하지만 디자인 분야에서 내가 버리려는 것은 태도와 형식 그 중 하나의 항이 다른 항의 양을 넘어서서 과도해 지는 것이다.
디자인 일을 하면서 그게 생활습관에 점점 배어들어감을 느낀다. 뭔가 이미지가 대충형성된듯한 것에 화가나게 된다. 나의 어머니는 뜨거운 물이 안나오면 찬물로 씻고, 집에 벌레가 나오면 피해다니면서 지냈다. 환경에 어긋남이 발생하면 그 어긋남이 또 다른 환경, 조금 더 척박한 환경이 되어 그 환경에 신체가 맞춰진다. 그럼 무언가 불평하고 궁시렁되면서 살게된다. 이러한 환경이 계속되면 그로 3번 4번 쌓이면 어떤 것이 어디부터 잘못되었는지를 파악하기가 매우 어려워진다. 도구들의 기능을 서로 연쇄적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러한 종류의 불편함들이 나의 환경이 썩어들어가고 그에 대해 아무것도 못하는 무력처럼 느껴져서 고통이 된다. 그러한 연유로 공간을 청소하고 소품 교체에 시간과 공을 들이고 있다.
내가 전세사기를 해결하기 위해 소통하는 변호사는 답장이 3일은 늦고, 격 없는 말투를 쓴다. 얼마 전엔 피고의 신용조회를 요청했는데 일주일 기다리자 내 신용결과를 들고 왔다. 지금은 연락도 아예 끊겨버렸고 '전세사기 전문 변호사'라는 타이틀은 유지하고 있다. 어쨌든 가볍게 툭툭 던지는 식으로 내가 해야할 행동에 관해 조언을 주어서 그냥 중요한 관계엔 양가감정이 존재한다는걸 인지하고 끝내버렸다.
요즘은 내가 다시 미술쪽의 일을 하고 있다. 근데 처음으로 (마치 대학생처럼) 마음이 이끄는 힘으로 일을 하고 그게 실현이 되고 있다. 대개는 일을 하려면 일을하고자 하는 막연한 동경(존경하는 인물? 선배? 선구자? 많은 수익)만 있고 그럼 그 일에대한 구조에 나를 대입하는 행위 (공부)가 마음을 선행하지 않나?
그런데 미술에 있어서만은 내 마음이 가는 무언가에 형식이 따라온다. 그게 내가 이 계에서 느끼는 신비로움이고, 또 그러한 마음과 동기를 유지하고자한다. 어떤 '척'을 하지 않아도 나일 수 있다는 게 편하다. 항상 양가성이 있다. 물질적인 것으로 부터 고통받으면서 비물질적인 것으로 자아실현을 이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