텍스트에서 분해는 결합의 역순이 아니다.

by 아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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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를 보다가 SPNS TV의 슈즈 오프라는 곳에서 진행된 전범선 씨의 인터뷰를 보았다. 이 채널, 혹은 팟캐스트가 지향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냥 왠지 한글과 영어를 갑작스럽게 뒤바꾸면서 서로 리액션을 교환하는 분위기가 특이하다고 느꼈다. 개인적으로는 이렇게 단어 혹은 문장을 2개 국어 이상으로 섞어쓰는 것에 약간의 닭살을 느낀다… 그런데 교포수준으로 2개국어의 언어 표현에 익숙하고 서로 건너갈 수 없는 문법적, 표현적 한계를 마주한다면 어느정도 섞어 쓸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그렇지 않지만…)


아무튼 꽂혔던 것은 전범선 씨가 역사학을 그만둔 이유로서, ‘텍스트의 한계’를 거론한 지점인데 말하자면 본인이 논문 작성을 위해 어떤 인물(토머스 페인)이 작성한 글, 논문, 편지를 포함한 모든 텍스트를 읽어본 후에 눈물을 흘릴 정도로 동질감을 느꼈지만, 동시에 이 사람에 관해 얼마나 알고 있는지 알 수 없고, 마주하고 직접 대화를 나누지 않은 이상 표면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텍스트가 진짜(real shit)라고 느껴지지 않았다는 것이 요지였다. 전범선 씨에 의하면 역사는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사건들인데, 동시에 역사가 학문의 틀 안에서 텍스트적인 한계, 그것의 내러티브에서 발생되는 다의성이나, 불확실성이 역사학의 한계라 느끼면서 오히려 그 바깥의 것들, 내가 이해한 바로는 언어 바깥에서 직접 경험할 수 있는 체험들로부터 더 큰 재미를 느껴서 방향을 틀었다라는 의미의 말이었다.

이러한 인터뷰를 들으며 나의 생각과 그리고 최근에 내가 전개하고 있는 모든 활동들이 전범선씨의 의견의 정확히 정반대에 위치해 있다고 느꼈는데, 왜냐하면 나는 텍스트 바깥에 언어화될 수 없는 현재의 실재적 경험에 큰 관심이 없기 때문이며, 오히려 무언가 실재 혹은 현재라는 시간성이 텍스트화되며 고정되는 순간이 훨씬 재미있기도 하고 모순적이지만 진실된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내가 글쓰기를 지속하는 힘과 글쓰기를 매개하고 소개하고자 하는 힘도 텍스트가 어떤 매개의 도구의 성격을 넘어서서 실재를 전복하는 모순율의 논리가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내가 모든 것으로부터 거리를 두려는 태도로 부터 생각이 시작된 걸 수도 있다. 나는 누군가를 알기 위해서 “진하게 소주 한잔 하면서” 서로 욕도 하고 진심을 공유해야 한다는 말을 정말 싫어하는데, 적어도 내 경험상 그랬던 관계가 좋게 유지되고 지속된 적은 한번도 없다. 다음 날 숙취는 불쾌함을 일깨우고, 어떠한 좋은 기억도 남기지 않는다. 술을 마시면 좋아지는 기분은 분명 존재하지만, 그러한 기억과 시간속에 언어적 자국이 맺히지 않으면 순간의 취기와 뒤섞인 공기는 사라지거나 혹은 공유 불가능한 상태로 고립된다. 언어화되지 않은 순간적 감정과 감각에 기반한 ‘사실주의적 관계론’은 필연적으로, 객관적으로 언어화될 수 없는 무형의 감각을 억지스럽게 공동의 것으로 규정하고, 그러한 규정을 대개 개인 혹은 일부의 권위적인 관계로 포섭된다. 술취한 누군가의 시끄러운 꼬장이 그 개인에게는 감동적이 었던 밤으로 기억될 지라도 누군가에겐 불쾌한 것이기도 하기에, 내가 두려는 어떤 거리들은 언어화되지 않은 현재가 언어세계 바깥에서 힘의 방식으로 세계를 지배하려는 섣부름이다.


텍스트는 분명히 말과 구별된다. 말이 신체와 현재와 직접적으로 접촉하고 있다는 점에서 텍스트가 상대적으로 부가적인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데리다도 <그라마톨로지에 대하여>에서 비슷한 말을 한다 : “문자로 쓰여진 형태의 마력은 우리로 하여금 이것(구술)을 보지 못하게 한다. 따라서 우리는 시각적인 것에 맹목적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시각적인 것에 의해 눈멀고, 문자에 현혹되어 있는 것이다.” 문장에 단일한 진리가 내포해있다는 착각이 역사의 체계를 이룬다. 텍스트는 사실을 사후적으로 기록하기도, 선언적으로 사실을 전복하기도 한다. 그러나 데리다가 파롤과 랑그 사이의 이격을 단순한 우위설정으로 끝맺지 않은 만큼, 소리는 소리대로, 이미지는 이미지대로 각자의 수수께끼를 풀어나가는 방식이 요구된다. 그러니까 나는 딱히 말과 텍스트 중 무엇이 더 진실되었는가? 라는 질문에는 크게 관심이 없는 것 같다. 개인적 차원에서는 말의 단일성에 따라 나를 증명해야 하는 상황들에 피로를 느낀다. 오히려 단일한 시간과 공간의 틀의 한계에서 개진되지 않은 텍스트가 내 본연의 코기토에 더 가깝다고 느껴지기도 하고, 혹여나 그러한 문장들 속에서 위장과 둔갑과 같은 상징화가 이루어진다 하더라도, 구질구질하게 길게 늘어지는 단어들 사이에서 텍스트는 해석될 요구를 동시에 지속적으로 던지기에, 일정 범위 이상으로 나를 숨길 수도 없다. 내가 돈이 엄청 많다고 텍스트로 떠들어댄냥 누가 믿기야 하겠는가. 나는 내가 쓴 글이 내가 뱉은 말보다 진실된다고 생각한다.


아무튼 간에 내가 집중하고 있는 부분은 부분과 수단이 아닌 것으로서의 텍스트다. 언어가 수단이 아니라면 무엇인가? 자크 오몽과 미셸 마리는 <영화작품분석의 전개>에서 장-폴 뒤몽과 장 모노의 텍스트를 ‘레비-스트로스’적 작품분석으로 소개하며 “어휘론적이고 문법론적인 요소에는 부차적으로만 의존하면서 영화의 의미론적 구조를 끌어내려”한다고 소개한다, 즉 비평, 혹은 작품분석에서 ‘텍스트’라는 단어는 구조주의와의 연계 안에서 의미론적 해체가 이루어질 때를 말한다. 적어도 예술 혹은 비평안에서 ‘텍스트’가 명사로 쓰이는 경우엔 프랑스 구조주의의 계보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영화는 물론 사건과 역사와는 분명히 다른 픽션 예술장르이지만 텍스트적 작품분석에서 영화는 일차적으로 존재하는 시청각적 이미지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선험적인 텍스트로서의 의미구조를 지닌 텍스트로서 분석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텍스트가 텍스트 바깥의 것을 서술하는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텍스트 체계 안에서 감각적 대상을 해석할 수 있는, 혹은 이해할 수 있는 체계가 발생하는 것이다.


핵심은 만약 텍스트가 서술적으로 명료해야하다는, 혹은 문법적으로 무결해야 한다는 도구로서의 목적성을 탈피했을 때, 그것 자체가 지닌 다의성이 논리적 개념이 아니라 감성과 인식의 대상 자체가 될 수 있다는 믿음.. 같은 걸 가져볼 수 있다는 생각이 스스로 꽃 피는 것 같다. 한범님은 문학적 성격의 아티스트북을 ‘조각문학’이라 칭하였는데, 이 표현이 강하게 와닿는다. 마치 조각이 그러했던 것 처럼 텍스트도 인식의 지평을 한 단계 더 넘어설 수 있을 지 궁금해진다. 문학의 방식으로 걷는 길과, 조각의 방식으로 깨트리거나 조합하는 일은 다르고, 중간 지점에서 반은 파편으로, 반은 체계로 구축된 언어세계가 조심스럽게 구축되어 가고 있고, 이런 놀이, 혹은 실험이 열린 가능성을 안고 발생될 수 있는 공간을 지속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냥 해석될 수 없는 언어적 꿈의 세계다. 나는 그 꿈이 해석되지 못하더라도 언어의 방식으로 그 것을 계속 상기할 수 있다. 상기할 수 있다는 건 왕복이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하나의 공간이고…

암튼 간에 또 한번 언급하고 싶은 책은 최근에 읽은 오카마리의 <기억 서사>다. 오카 마리는 역사를 텍스트적으로 다루는 방식에 관한 또 하나의 시각을 제공한다. 특히 전쟁, 전쟁범죄 혹은 국가적 재난은 어떤 방식으로 기록되고 경험되는가? 오카 마리는 여기에서도 텍스트적인 분석의 방식으로 여성피해자들의 증언을 듣는다. 사건과 서술 사이의 필연적 이격과 한계를 강조하고 일방적으로 서술이 사건을 묘사하는 ‘리얼리즘’의 방식을 비판한다. 그는 사건 자체를 다시 말하기 보다 ‘표상 불가능함을 말하는 것’의 가능성에 관해 말한다. 이 책은 텍스트가 실재를 감추고 모방하는 방식이 아니라 자체로 이해하는 방식, 피해자의 목소리 이면에 말해지지 않은 기억을 이해하는 방식에 관해 넓은 범주에서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흥미롭고, 텍스트의 사변적 성격을 넘어선다. 우연히 읽었는데 너무 좋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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