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이사한 집은 정말 운이 좋게도 10분 거리에 도서관을 두고 있다. 도서관은 상호대차를 통해 도시 전역에 있는 다른 도서관의 책 까지 빌려볼 수 있다. 서울에서도 상호대차를 통해 책을 빌려보곤 했지만 물리적인 서가에 접근할 수 있다는 건 또 다른 느낌이다. 미술에 대한 나의 관심사는 실제 미술작품보단 책의 도판으로 시작되었는데 그 때 빌려보았던 책들이 아직도 꽂혀있다.
도서관에서 느낄 수 있는 경험은 가끔 어떤 점에서 전시 관람을 능가한다. 도서관은 경험의 매개체로서의 책을 대여할 수 있다는 점에서 경험을 이동시키고 확장시킨다. 책을 지니고 도서관을 찾고 나오는 길몫과 공원은 활자경험의 물리적 토대와 같이 존재한다. 이는 분명히 기이한 느낌이다. 서점은 찾는 책을 마주하고 소비가 이루어지고 책에대한 소유권이 나에게 이전하면서 그 물리적 공간과 책의 분리를 일으키는데에 반해 도서관은 그 책이 대여를 통해 일종의 부메랑과 같은 방식으로 나의 독서 경험을 도서관이라는 공간과 묶어둔다. 회귀를 전제한 독서는 내가 그 책을 읽는 동안 경험하게 되는 통합적인 공간들 전부에 서사를 부여한다.
‘헤메기’는 정말 도서관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핵심적인 활동일까? 도서관은 명확한 분류체계와 도서검색 시스템이 있지만 동시에 수많은 장수로 인해서 책을 구경하는 재미도 물론 있다. 특히 시간성에서 벗어나 다양한 체계의 도서가 섞여있다. 도서관은 공적인 장소로서 시간의 지속성을 지니고 있다. 서가 위 책들은 시간의 위계를 거스르고 도서관의 ‘분류체계’를 더 명확히 드러낸다. 생산되고 나이들어가는 책들이 어린 책들과의 어떤 경계도 없이 같은 주제를 공유하고 있다. 텍스트를 읽는 행위에서 발생되는 글과 인식 사이의 시간적 격차는 이제 책과 책 사이에도 동시에 스며든다. 책이 갖고 있는 시간적 층위는 다양하다. 텍스트의 참조성과 유통성 확장성에 인해 책의 발생은 하나의 시점으로 단일하게 수렴하지 않는다. 책이 쓰여진 시간, 출판된 시간, 번역되고 재출간된 시간, 인용된 참조문헌들의 선험적 지식의 시간 등 과거로도 미래로도 책의 시간의 층위가 펼쳐져 나간다. 도서관의 각 책의 시간들이 병치되는 것은, 단지 책의 물리적 나이듬이라는 단일한 물리적 시간체계에 의해서 구분되는 것은 아니고 서로간의 내재적인 입체적 시간들 어쩌면 책의 기억과 상상이라고 부를 수 있는 확장된 시간을 서로 교차한다는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하고, 도서관의 탈시간적 교차가 책에 내재한 다층위적 시간을 휴먼스케일로 투사하여 드러내는 것은 아닌가 싶다.
책의 접근가능성을 확장한다는 것은 도서관의 핵심적 기능이다. 복제 및 저장가능한 지식,예술 매체는 언제나 이중적인 (교환)가치체계의 충돌을 경험한다. 한편으로 그것은 창작자의 권리보호를 위한 법과 시장의 규칙이 지정되어 있고 다른 한편으로 복제가능성에 의한 자율적인 배표와 접근을 향한 지향이 있다. 그 두가지 모호한 가치 체계의 혼합성 안에서 편의적으로 가정되는 것은 저장매체의 물리적인 구매 비용에 더해 유통 과정의 노동을 포함한 권리와 행정료가 더해진다. 도스토옙스키의 죄와벌은 정치인이 절기마다 써내려가는 책들과 같은 값을 내도 구할 수가 있다. 그러한 가치는 책의 가치를 반영하는 것은 아니다. 공공 도서관은 시민에게 독서의 기회를 제공한다는 공익의 목적으로 모두에게 열린 도서관을 원칙으로 하고있다. 한편으로는 같은 시간동안 읽는 도서의 양을 늘려 독서의 층위를 늘릴 수 있고, 접근이 어려운 책을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조금 더 학제적인 도서를 제공하는 도서관은 대학도서관인 것 같고 이는 일반시민의 접근이 어렵다.
어떤 책이든, 주제든, 분야든 그 책을 매개하는 여러권의 책들로 구성된 맵을 그려볼 수 있다. 역사적인 흐름에 따른 저술일 수도 있고 하나의 학계와 텍스트를 구성하는 구술의 집합이 될 수도 있다. 좋은 구성과 목록은 그것 자체로 의미를 전달한다. 이전에는 ‘서울대생이 꼭 읽어야 하는 100가지 책’과 같은 무작위한 교양을 향한 책의 목록이 자주보였지만 요즘은 목록의 방향설정이 전제된 도서리스트도 자주 보인다. wrm의 《디자인 책 ― 이 책, 그 책, 저 책》이 대표적인 예가 될 수도 있다. 여기서 도서 리스트는 디자이너의 직업적 성격을 분류하고 그 카테고리에 맞는 도서로 재편성한다.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도서 목록을 스스로 작성해보는 것도 좋은 것 같다. ‘상상의 책장’을 집에 하나 들여놓는 건데, 좋은 점은 막연하게 지식과 정보를 채우는 행위로서 책을 읽는 게 아니라, 빈 공간으로서의 지식의 여지를 마련한다는 점에서 지식을 다루는 보편적인 태도를 견지할 수 있다는 점이다.
좋은 도서목록은 좋은 분류체계로 구성되어 있을것이다. 좋은 분류체계의 조건은 일반적으로 직관적이어야하고, 찾거나 추가하기에 어렵지 않아야한다. 타인이 봤을 때도 직관적으로 이해되어야하고 요소간의 소외와 집중을 최소화해야한다. 서가분류는 어디까지나 책이 아니라 책을 실용적으로 정리하기 위한 목적의 부차적 도구이므로, 지나치게 난해한 구성또한 좋지 않다. 무엇보다 서가의 주장이 강하면 그에 따라 책이 주장할 수 있는 목소리의 위계가 낮아진다. 하나의 책은 여러가지 말을 할 수 있고, 정확히 정리되지 않은 말을 할 수도 있다. 서가분류의 목적은 그러한 모호한 책의 성격을 지정하는 것이라, 직관적으로 찾기 좋게 하는 것 뿐이다. 책이 깊고 복잡한 숲과 같다면 서가분류는 높은 나무에 올라가서 파악할 수 있는 숲과 산의 능선이거나 북극성과 같은 것일 뿐이다.
한국십진분류법에서는 세부적으로 가면 난해해지는 지점들이 있다. 철학은 먼저 중분류에서 지역적 철학(서양,동양)과 다루는 대상으로서의 주제(형이상학, 인식론,논리학)이 나뉜다. 형이상학의 소분류는 더욱 난해해서 방법론, 존재론, 공간, 시간, 운동과 변화와 같은 분류가 있고 논리학 분류엔 삼단논법, 오류, 가설, 가정 등이 있다. 이러한 분류는 중복과 혼란을 일으키고 현대철학의 분과를 명확하게 담아내지 못하며 지속가능하지도 않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은 고대서양철학에 꽂혀야하는가? 형이상학에 꽂혀야하는가? 그럼 아리스토텔레스의 모든 저서는 흩어지게 되는가? 이러한 분류를 직관적이라 부를 수 있을까. 또한 예술서가의 경우 지나치게 실무이론에 집중되어 있다. 예술의 각 영역들의 역사와 비평을 다루는 서가는 대개 각 소분류가 아니라 ‘미술이론, 미학, 미술사’에 위치한 경우가 많다. 이는 위 철학의 경우와 반대로 명확하게 분류될 수 있는 요소들임에도 불구하고 분류되지 않고있다. 물론… 왠만한 초대형 도서관이 아닌이상 예술과 철학 서가는 한 두 서가정도 밖에 되지 않아서 걸으며 모두 경험할 수 있다. 명확한 분류체계를 가진 특화도서관을 기대하게 된다.
도서관 서가는 가구와 건축경험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고 텍스트적 논리배열이 공간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건축가에게도 즐거운 과업으로서 주어질 것 같은데 정작 흥미로운 도서배열 공간은 점점 접하기 어렵고, 과시적 디스플레이가 강조된 넓은 홀 중심의 도서관만 지어지고 있다. 씬scene으로 되는 렌더링 이미지와 보도 홍보자료용 이미지 중심으로 제안서가 구성되는 건축의 폐해가 불필요하게 과시적인 홀을 넓히고 좁은 경험공간을 재미없게 방치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