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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슬비 Jun 01. 2020

훈육에 대하여

 어린 시절, 내가 매를 맞는 경우는 딱 세 가지였다. 첫 째, 어른에게 예의 없이 행동했을 때이다. 첫 번째 이유는 억울한 점이 많다. 왜냐하면 예의 없게 행동했다고 모함을 받아 매를 맞은 기억이 많기 때문이다. 어린 나는 내 또래의 아이들의 부모님께 질투를 많이 사는 아이였다. 잘나서가 아니라, 내가 말을 워낙 잘하다 보니 똑똑해 보여서 그랬던 게 아닌가 싶다. 게다가 목사님이 나를 유독 심하게 예뻐하셨다. 교회라는 집단의 특성상 목사님의 아낌을 받는다는 건 특별한 일이었다. 그래서인지, 어른들은 나를 많이 미워했다. 그래서 조금만 눈에 거슬리는 기분이 들어도, 심하게 왜곡해서 엄마에게 전달했다. 엄마는 아빠가 없이 키우는 당신의 부족함인 것 같으셨는지 나를 심하게 혼내셨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잘못한 게 없어서 억울함으로 남아있다. 두 번째 이유는 예배를 똑바로 드리지 않는 것이었다. 독실한 기독교인인 엄마에게 예배는 신성하고 소중한 것이었기에, 예배 태도가 바르지 않으면 혼을 내셨다. 나도 기독교인으로서, 그런 교육을 해주셨던 것에 이의가 없다. 세 번째 이유는 물건을 잃어버리는 것이었다. 나는 우산을 특히 잘 잃어버렸다. 물건을 잃어버리고 오거나, 어딘가에 두고 오면 그 날은 아주 많이 혼나는 날이었다. 이것은 성인이 된 지금 생각하면 동의하기 어려운 이유이다. 엄마의 교육 덕분에 나는 물건을 잘 잃어버리지는 않는다. 그러나 내가 중증의 우울증을 앓고 난 뒤 물건을 잃어버려 보고 나서 깨달았다. 물건을 잃어버린다고 큰일이 나지는 않는다. 그 소중한 지갑을 잃어버린다 해도, 카드야 정지하면 되니 그리 큰일이 나지는 않는다. 여권을 잃어버린다고 해도 대사관에 가서 재발급받으면 된다. 다 솟아날 구멍이 있다. 물건을 잘 챙기는 건 정말 좋은 습관이지만, 매를 들 이유는 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린 나이에는 물건을 잘 잃어버리는 게 흔하다. 나이 들면서 물건을 잃어버리며 곤혹을 치러 보면 자연스럽게 체득될 일이다. 그 훈육으로 받은 상처가, 그 훈육으로 얻은 좋은 습관보다 더 크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엄마를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엄마는 어린 시절 밥을 굶을 정도로 가난하셨다. 가난한 시절 자랐던 엄마는 소매치기도 수없이 당해보았다. 세상이 얼마나 무서운지 아는 엄마는 내게 시행착오를 겪지 않게 해주고 싶으셨던 거 같다. 그 마음을 이해한다. 상처가 많은 엄마는 이성을 잃고 화를 내는 경우가 잦았다. 그러나 다행히도 나를 때릴 때에는 이유를 설명해주고 때리셨다. 엄마한테 혼이 날 때면, 반성이 되기보다는 마음에 상처가 많이 생겼던 것 같다. 엄마가 상처가 많은 사람이라, 사랑을 주며 교육을 하기보단 상처를 주는 게 더 쉬우셨을 테다. 그 마음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 이젠 엄마를 조금은 알 것 같아, 용서하려 한다. 형제·자매가 없는 내게, 내 옆에 있어준 사람은 엄마뿐이다. 엄마가 언니가 되어주었고, 동생도 되어주었고, 친구도 되어주었다. 내 스스로가 안쓰러운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엄마 앞에서 마음껏 울지 못했다는 것이다. 엄마가 나보다 더 연약하고 어리고 약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엄마의 보호자라고 생각했다. 말을 하지 않으면 그 마음은 아무도 모른다. 썩어가던 나의 마음을 아무도 몰라주었다. 그렇게 나는 마음이 닳고 닳아 이 지경까지 이르렀다. 그때의 나에게 말한다. 나 자신을 생각해주는 사람은 정말 많다고, 날 사랑해주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아냐고. 얼마 전에 꿈을 꾸었다. 나 자신이 안락사하는 꿈. 스스로 선택해서 안락사하는 꿈을 꾸었다. 그리고 씁쓸했던 건, 그 꿈이 너무 행복했다. 아직은 내 마음이 그렇게 나아지지 않은 것 같다. 그래서, 나를 떠나간 사람들을 보며 나 자신을 탓할 수 없는 거다. 내가 이리 아픈데, 나를 자책할 힘이 없다. 그저 나는 나로 살아가야겠다. 나를 떠나간다면, 그냥 보내주어야겠다. 그건 나의 탓도, 그들의 탓도 아닌 것 같다. 지금 나의 마음은 이리 아프지만, 어쩌면 그들이 나를 떠나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내게는 다행히 엄마가 있으니, 그걸로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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