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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을 구석이 있다는 건

by 애카이브

“힘들 때, 외로울 때, 당신이 기대는 ‘믿을 구석’은 무엇인가요?”

이번 서울국제도서전이 우리에게 던진 질문이다. 그저 글자와 종이의 덩어리일 뿐인 책이 우리에게 기댈 곳이 되어줄 수 있을까?


생활기록부에 채울 한 줄 한 줄이 소중했던 고등학생 시절, 나에게 독서는 무언가를 채우기 위한 수단에 가까웠다.

그래서 열정을 주입해 주는 자기 계발서나 생기부를 있어 보이게 채워줄 수 있는 비문학 도서를 주로 찾았다.

반대로 문학에는 늘 거부감이 있었다. 현실과는 거리가 먼, 누군가의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는 허구, 나와는 동떨어진 이야기들이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문학은 모호했다. 책을 덮고 나서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확실하게 와닿지 않았다. 나의 해석과 감상을 통해서야 비로소 완성되는 여백이 어렵게만 느껴졌다.


그러다 작년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감을 계기로 처음 문학을 다르게 바라보게 되었다.

문학을 짓는 사람들은 언어를 통해 사람들의 내면과 만나고 있구나.

중요하고 절실한 질문들을 꺼내 문학으로 우리에게 끊임없이 신호를 보내고 있는 것이었구나.

이러한 문학이 우리를 조금이나마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게 돕는구나.

휴머노이드의 사랑을 담은 이야기든, 외계인과 조우하는 인간의 허무맹랑해 보이는 이야기든 ‘사람 사는 이야기’였던 것이다. 그래서 우린 문학 속 인물들의 행동을 거울로 자신을 돌아볼 수 있다. 평생 내가 겪을 일 없을지 모르는 일을 문학 속 체온을 통해 조금이나마 느끼고 이해할 수 있다. 겪어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고통과 사랑을 문학이라는 공간 속에서는 경험할 수 있다.


그렇기에 책은 글자와 종이의 덩이리일뿐이지만, 믿을 구석이 될 수 있다.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에서 신형철 문학평론가는 우리가 경험한 만큼, 느껴본 만큼 알 수 있기에 많은 고통을 느껴본 사람만이 타인의 고통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공감할 수 있다고 말한다. 책을 통해 쌓은 경험치는 세상을 이해해 가는 과정에서 기꺼이 기댈 수 있는 어깨를 내어준다.


그런 의미에서 도서전은 우리가 믿을 구석이 되어주는 책들과의 조우이기도 하다. 지난 6월, 서울국제도서전에서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책을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공기로 직접 체감할 수 있었다. 이들 모두 자신이 사랑하는 믿을 구석을 위해 모였을 것이다.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 마음만큼이나 사랑스러웠다.

도서전에서 만난 문장으로 글을 마무리하려 한다. 이 글을 읽는 모두가 자신을 지탱해 주는 힘이 되어주는 책을 만날 수 있길, 그런 책과 기꺼이 사랑에 빠질 수 있길 바라면서.

“아직도 지구 어딘가에 무조건적으로 사랑을 할 수밖에 없는 또 하나의 책 한 권이 있다는 사실과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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