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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브리는 사랑의 형식이다

― 다시 만난 미야자키 하야오의 세계

by 애카이브

엄마랑 <벼랑 위의 포뇨>를 봤다. 거실 TV 앞에서 넷플릭스를 뒤적이다 고른 영화였다. 나보다는 엄마의 취향을 고려한 선택이었는데, 정작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한 사람은 나였다. 처음 보는 영화도 아니었고, 기억 속에 특별히 강렬하게 남아 있던 작품도 아니었다. 그런데 나는 왜 이토록 몰입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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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뇨>를 처음 본 건 십 년도 더 전이다. 정확한 시기는 가물가물하지만, 아마도 초등학생 때였을 것이다. 중간고사가 끝난 어느 한가한 오후, 선생님이 어둑한 교실에서 틀어준 지브리 영화. 지금의 20대라면 익숙할 법한 풍경이다.

그때 본 ‘인간 물고기’ 포뇨는 약간 징그럽고 많이 귀여웠다. 그건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여전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영화가 아니라 나였다. 포뇨를 처음 만났을 때와 지금 사이에는 십 년이 넘는 시간이 놓여 있고, 나는 그 시간을 통과하며 어른이 되었다.

다시 본 <포뇨>는 기억과 달랐다. 눈이 시릴 만큼 아름다웠다. 어떻게 사람이 이런 걸 만들 수 있었을까. 경이로웠다. 하지만 영화는 그대로이니, 달라진 건 결국 내 ‘시선’ 일 것이다.

그 시선은 이제 프레임의 안쪽뿐 아니라 바깥쪽으로도 향한다. 어린 시절에는 화면에 보이는 것만 봤다면, 이제는 그 이면을 상상하게 된다. 지브리라는 세계를 만들기 위해 수없이 고민하고 좌절했을 사람들의 얼굴. 어른이 된 나는, 애니메이션을 보며 그 바깥의 사람들을 함께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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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컨대 <포뇨>에서 물고기 형상의 파도가 헤엄치는 장면을 보았을 때,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장면이 너무 아름다워서. 동시에, 그토록 아름다운 파도를 그리기 위해 수많은 밤을 지새웠을 누군가의 고통이 떠올라서.

<포뇨>는 파도가 철썩이는 모습 하나만 봐도 감탄이 나온다. 모든 장면이 자연과 생명에 대한 경의로 가득하다. 이것은 단순히 ‘표현’의 문제가 아니라 ‘태도’의 문제다. 스스로를 벼랑 끝에 몰아넣으면서까지, 이 세계의 아름다움을 그려내고자 했던 창작자의 의지. 프레임 바깥의 사람들을 떠올릴수록, 프레임 안쪽의 세계가 더욱 각별하고 아름답게 느껴졌다.

<포뇨>를 보며 자기 자신과 싸워나가는 예술가의 존재를 느꼈다. 이토록 찬란한 화면을 만들기 위해 통과해야 했을 막막한 시간들이 느껴졌다. 그러니 작품을 끝낼 때마다 매번 은퇴를 선언했던 하야오의 선택에 고개가 끄덕여질 수밖에. 하지만, 핵심은 ‘번복’에 있다. 자존심 강한 그를 몇 번이고 다시 돌아오게 한 것은, 과거를 향한 미련도 창작의 즐거움도 아니었을 것이다. 사랑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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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고통으로 가득하다. 자연은 이해할 수 없고, 때로는 공포스럽다. 나약한 인간은 서로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긴다. 이것이 미야자키 하야오가 자연과 인간을 두고 끊임없이 고뇌하는 이유일 것이다. 하지만 애초에 세상을 깊이 사랑하지 않으면, 그런 고뇌조차 불가능하다.

‘세상은 고통으로 가득하고, 사랑은 드물고 귀하다.’

어른이 되며 알게 된 이 한 줄의 진실이, 다시 본 <포뇨>를 더욱 감동적으로 만들었다. 세상에는 그 모든 고통에도 불구하고, 사랑을 놓지 못해서 한 번 더 해보는 사람들이 있다.

하야오는 물방울 하나도 허투루 그리지 않는다. 사랑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사랑 없이는 할 수 없는 일만이, 우리가 사는 세상을 아름답게 만든다. 지브리 애니메이션은 사랑의 형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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