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그 시절 여름 사냥꾼들

― 더위에 녹지 않게, 여름을 먹었습니다

by 애카이브

“여름에 태어난 아이는 더위에 강하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나는 그 공식이 적용되지 않는 아이였다. 여름의 한가운데에서 태어났지만 더위엔 속수무책이었다. 에어컨도 없던 그 시절 나에게 여름은 언제나 이겨내야 하는 존재였기에 여름이 찾아올 때면 늘 작지만 강력한 무기를 준비했다. 더위가 찾아와도 쉽게 녹아내리지 않도록, 그 한입 한입이 방패가 되어주던 추억 속 여름 음식들. 이름하여, 나만의 여름 사냥꾼들을 소개해 보려 한다.

초등학교에서 보낸 여름을 떠올리면 가장 선명한 기억은 학교 앞에서 팔던 얼린 쿨피스이다. 일주일 용돈이 5000원도 되지 않던 초등학생 시절, 내게 허락된 간식은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 만큼 적었다. 더군다나 내가 오갈 수 있는 곳은 ‘집 - 학교 - 놀이터’ 정도였기에 학교 바로 앞에 돗자리를 깔고 앉아 쿨피스를 팔던 할머니의 존재는 그야말로 내 여름의 오아시스였다. 자두맛, 복숭아맛, 콜라맛 중 어느 것을 고를지 한참을 고민하다 손에 쥔 우유 꽉 하나, 500원이면 살 수 있던 그 쿨피스 하나가 여름 더위를 무찔렀다. 더위를 무지도 싫어하던 아이가 뜨거운 햇살을 뒤로하고 놀이터에서 뛰어놀 수 있었던 것을 보면 그 효과는 꽤나 강력했던 것 같다.

초등학생 시절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공간, 집. 그 집 안의 더위를 무찌른 여름 사냥꾼은 우리가 사랑하는 여름 과일 수박과 관련이 있다. 여름에 마트에 갈 때면 수박을 통통 두들기며 무엇이 맛있을지 고민했다. 우리 집뿐만 아니라 마트에 방문한 모두가 수박을 두들겼고 부모님은 경쟁하듯이 수박들을 스캔해 가장 소리가 좋은 수박을 골라오셨다. 그동안 난 동생 손을 꼭 잡고 딸기 우유와 사이다를 가져왔다. 그리고 집에 도착하자마자 수박을 손질하는 엄마 옆에서 수박화채를 만들 준비를 했다. 그냥 먹어도 맛있는 제철 수박에 딸기 우유와 톡 쏘는 사이다를 부어 완성한 수박화채는 여름을 품은 바다 같았다. 핑크빛 바다 위에 동동 떠 있는 붉은 수박 조각들을 입 한가득 들이킬 때면 여름을 모두 삼킨 것처럼 시원함만 맴돌았다.

초등학생의 여름은 여름방학과 여름휴가를 빼놓을 수 없기에 유독 많은 여행을 떠났다. 짐을 싸고 파라다이스를 향해 떠나는 것만으로도 즐거웠지만 나에겐 더 중요한 것이 있었다. 바로 빙수 사냥. 지역마다 다른 제철 과일을 얹은 개성 있는 빙수들이 있었고, 가게마다 얼음을 쌓는 방식도, 우유를 녹이는 방식도 달랐다. 그 하나하나가 여름의 또 다른 얼굴처럼 느껴졌다. 새롭게 찾아온 여름마다, 새롭게 떠난 지역에서 만난 빙수는 여름휴가의 가장 큰 행복이었다. 낯선 거리를 걷다 더위에 지쳐도, 눈처럼 소복이 쌓인 얼음을 말끔히 비워내고 나면 몸도 마음도 다시 차가워졌다. 그렇게 우리 가족은 또 한 걸음을 뗄 수 있었다. 그래서일까. 초등학생 시절 그린 지도엔 어느 지역은 복숭아 빙수로, 어느 마을은 옥수수 빙수로 적혀있다.

초등학교 시절 여름 사냥꾼들을 되돌아보니 나는 더위는 싫어했지만 여름이란 계절은 좋아하는 아이였다. 초등학교가 끝나고 친구와 뛰어가는 여름의 놀이터는 항상 웃음으로 가득했고 선풍기 앞에 가족 다 같이 모여 앉은 여름의 거실에서는 오순도순 이야기가 그치지 않았다. 전국 곳곳의 바다를 향하던 자동차 안에서도 장난기 어린 목소리가 쉼 없이 흘러나왔다. 그렇게 여름은 언제나 생기로 가득한 계절이었고, 나는 그 활기를 사랑했다. 그래서일까, 더위마저도 사랑하기 위해 여름에 녹지 않을 음식들을 찾아 나섰다. 결국 나는 여름을 너무나 좋아한 나머지 그 뜨거움을 미화시켜줄 무언가를 끊임없이 찾고 있던 것이다. 덕분에 해마다 더 버거워지는 여름이지만, 그 여름을 함께 사냥했던 음식들 덕분에 나는 여전히 이 계절을 사랑하고 있다.

image (17).png


keyword
작가의 이전글케데헌 제작진의 창의성을 훔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