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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애카이브 Jun 21. 2023

젠더프리 캐스팅에 관한
7가지 질문

당신의 인생으로 연극을 만든다면, 주인공의 성별은?

나는 여자로 태어났다. 누군가 내 인생을 이야기로 쓴다면, 그 이야기의 주인공인 ‘나’를 남성이 연기할 수 있을까? 정답은 없다. ‘나의 인생을 연기할 수 있는 사람’이 여자라면 여성이 연기하게 될 것이고, 남자라면 남성이 연기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젠더프리 캐스팅이다. 

젠더프리 캐스팅, 배우의 성별에 관계없이 배역을 정하는 캐스팅을 말한다. 기획 단계부터 배역에 성별을 정해놓지 않거나, 성별이 고정된 배역이라도 이를 연기할 수 있다면 누구나 캐스팅하는 것이다. '파우스트' 김성녀, '햄릿' 이봉련, ‘살리에리’ 차지연. 이들은 국내에서 극중 남성 배역을 연기한 여성 배우이다.

<파우스트 엔딩> 김성녀 배우 ⓒ국립극단 / <햄릿> 이봉련 배우 ⓒ국립극단 / <아마데우스> 차지연 배우 ⓒPAGE1

이를 놓고 ‘굳이?’라는 생각이 들 수 있다. 나또한 그랬고 여전히 젠더프리 캐스팅에 대한 의문이 조금은 남아있다. 마음 속 ‘굳이’에 대한 해답을 얻고자 젠더프리 캐스팅을 이해하기 위해 던진 질문들이 있다. 그 몇 가지 질문을 따라가며 젠더프리 캐스팅에 대해 알아보겠다.


1. 왜 젠더프리 캐스팅인가, 그 출발점은?

고전을 비롯한 많은 연극 작품들은 남성 중심 서사이다. 이로 인해 주인공의 성비는 편중될 수밖에 없었고, 이에 따라 자연스레 여성 배우들이 역량을 펼칠 수 있는 기회는 제한적이었다. 이것이 젠더프리 캐스팅의 출발점이다.

한때, 여성은 주인공이 될 수 없던 것은 물론 여성 배역까지 남성이 맡아 연기하던 시절이 있었다. 과거에는 여성이 남성의 연인, 딸, 엄마 역할로만 존재하는 경우가 대다수였는데, 그러한 조연도 여성은 연기할 수 없던 것이다. 고대 그리스 시대에도 그랬으며, 셰익스피어 연극 속 여성 배역도 남성 배우가 맡았다. 말 그대로 무대는 남성들의 영역이었다. 따라서 ‘여성 배우들에게 더 다양한 인물을 연기할 기회 제공’과 ‘성 고정관념 탈피’를 위한 움직임이 도래했으며, 그 움직임이 바로 젠더프리 캐스팅이다.


2. 젠더프리 캐스팅의 목적은?

공연예술계의 기울어진 운동장 극복으로, 시작점과 같다. 앞서 살펴봤듯 과거의 오랜 시간 동안 제한적이었던 무대에 오를 수 있는 성별, 이야기의 주인공을 차지하는 성별의 편중 등을 현대적인 관점에서 바라보고 과거의 성차별적인 잔재를 지우고자 시작된 것이다.


3. 언제부터 시작되었는가?

젠더프리 캐스팅은 비교적 오래 전부터 대두되어 왔다. 프랑스 배우 사라 베르나르는 1900년경 이미 여성 ‘햄릿’으로 유명했었다. 등장한 지 많은 시간이 지난 개념임을 알 수 있다. 국내 첫 젠더프리 캐스팅의 사례는 2001년 박정자 배우가 <에쿠우스>의 ‘유진 다이사트 박사’를 연기한 것이었다. 이는 최초의 여성 다이사트 박사였다. 그러나 이후 해당 배역은 다시 줄곧 남성의 차지였고, 국내에서 젠더프리 캐스팅이 꾸준히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2015년 뮤지컬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의 ‘헤롯왕’을 김영주 배우가 연기한 사례 이후였다. 그후 <광화문 연가>의 초월적 노인 역할인 ‘월하’에 차지연 배우가 캐스팅, <오펀스>의 등장인물 전원을 남성에서 여성으로 캐스팅,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에서 전 배역을 남녀 동수의 혼성 캐스팅으로 구성하는 등 여러 사례들이 등장했다.


4. 성별을 바꿔 연기하면 젠더프리인가?

그렇지 않다. 꼭 여성이 남성을 연기하고, 남성이 여성을 연기해야만 젠더프리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성별이 무엇인지에 집중해 의식적으로 배우가 자신과 다른 성별의 배역을 연기하는 일은 ‘크로스젠더 액팅’이라고 한다. 젠더프리 캐스팅은 ‘성별을 바꾼다’에 의의가 있는 것이 아니다.

세세히 따지면 젠더프리 캐스팅은 ‘젠더 블라인드(gender-blind)’와 ‘젠더 벤딩(gender-bending)’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이 둘을 나누는 기준은 ‘배우에 따라 기존 배역을 각색’하느냐 마느냐에 달려 있다. 젠더 블라인드는 말 그대로 성별을 보지 않고 배우를 캐스팅하는 것을 말한다. 이때 캐스팅 시 고려하는 것은 ‘배역을 연기할 수 있는 역량’ 하나뿐이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젠더프리 캐스팅을 생각하면 된다.

젠더 블라인드가 연기만 잘 하면 누구나 배역을 소화할 수 있다는 비교적 소극적인 개념이었다면, 거기에서 한 단계 나아가 캐스팅된 배우에 맞게 기존 배역의 성별을 바꿔 각색하는 것을 젠더 벤딩이라고 한다. 배역의 성별에 배우를 맞추는 게 아닌, 배우의 성별에 배역을 맞춘다는 점에서 보통의 캐스팅과 다르다고 볼 수 있다. 젠더 블라인드와 젠더 벤딩 모두, 배역의 성별보다는 배우의 성별이 우선시된다는 점에서 젠더프리 캐스팅의 특징을 찾을 수 있다.


5. 야기되는 문제는 없는가?

보여주기식 젠더프리 캐스팅이 존재한다. 젠더프리를 외치는 대부분의 공연에서 실제로 캐스팅된 여성 배우는 한두 명뿐인 경우도 있다. 젠더프리 캐스팅을 통해 화제성을 얻은 작품이더라도 여성 배우보다 남성 배우가 배역을 얻을 확률이 더 높다. 젠더프리 캐스팅을 통해 주어진 기회도 극소수의 여성 배우에게만 돌아가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한 개인에게 그 공연의 향후 젠더프리 캐스팅의 운명이 달려있게 된다. 기회를 잡은 만큼 그에 응당한 실력을 보여주지 못하거나, 기대치에 미치지 않으면 다음에는 그 역할이 젠더프리 캐스팅을 거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6. 오히려 성 고정관념을 고착화시키진 않는가?

단순히 ‘배역에 있어 성에 대한 구분이 없어지는 것’만을 들었을 땐, 이것이 진정으로 성 고정관념 탈피에 직결되는지 의문이 들었다. 결국 남성 역할을 여성이 맡아도 연기하는 톤이나 그 분위기, 그 외면을 ‘남성처럼’으로 표현하면 성 고정관념을 다시 한번 드러내는 것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이 관객을 혼란스럽게 하진 않을지, 젠더프리 캐스팅이 성 고정관념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게 아닐지 고민하던 중 깨달은 바가 있다.

그러한 관객들의 혼란, 성에 대한 고정관념의 존재조차 망각하는 시기가 오는 것, 그것이 젠더프리 캐스팅으로 이룩하고자 하는 공연계의 모습이 아닐까. 지금은 젠더프리 캐스팅으로 어색함을 느끼거나 극에 방해가 된다고 느끼는 경우가 있을지언정, 이와 같은 과도기의 혼란이 없어지는 때가 오는 것. 그날이 한시라도 빨리 오도록 공연계는 노력하고 있었다.


7. 그렇다면 본질은 무엇인가?

젠더프리 캐스팅은 성별의 경계를 넘어 공연 해석의 다양성에 그 본질이 있다고 생각한다. 같은 맥락으로 젠더프리 캐스팅은 경계를 허무는 공연계의 적극적인 시도로 원작의 매력에 더해 풍부한 캐릭터 해석이 가능해졌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성별의 경계를 넘어서야 젠더프리 캐스팅의 본질이 빛을 발한다는 것. 이는 ‘성 고정관념 탈피’가 자연스러운 것으로, 고정관념이 있었는지조차 모르게 우리에게 스며들어야 된다는 의미이다. 그때서야 젠더프리 캐스팅의 본질은 드러나고, 관람하는 관객의 시점에서 더 다채로운 공연을 경험하는 데 집중하게 될 것이다. 젠더프리 캐스팅이 궁극적으로 추구해야 할 방향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위 일곱 가지 질문을 통해 젠더프리 캐스팅에 관한 여러 사실과 나의 고민을 이야기했다.


배역의 성격과 특성에 대해 보다 다각적이고 중립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선 성별을 떼어 두고 (특히 성별에 따라 기대되는 고정관념을 덜고) 바라보는 것이 효과적이다. 같은 말이라 한들, 여성적 화법과 남성적 화법에 대한 구분이 아직까지 우리의 인식에 잔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배역의 성별에 집중할 시 그 캐릭터의 인격적 특성이 왜곡될 가능성이 있다.


남성 배역과 여성 배역의 구분을 보면 단정적인 어조와 격식체, 명령형 어미를 ‘남성적 어조’라 가르치고, 높임말과 비격식체, 섬세한 감정 표현을 ‘여성적 어조’라 가르치던 학창시절 참고서가 떠오른다. 요즘은 고등학생들도 ‘여성성’과 ‘남성성’을 구분하는 것이 말이 되지 않는다며 이의를 제기하기도 한다. 이러한 학생들의 목소리에 귀기울인 교사들은 ‘남성적 어조’라는 표현을 힘찬 어조로, ‘여성적 어조’라는 표현은 섬세한 어조로 바꿔 가르친다고도 한다. 이러한 흐름도 공연계의 젠더프리 캐스팅과 맥락을 같이 한다. 젠더프리 어조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이렇듯 기존 배역의 성별이 남성인지 여성인지를 떠나, 그 배역이 가진 성격을 표현하는 데 집중하고 캐릭터를 다방면으로 이해하는 것. 성별을 제외한 다른 여러 특징들에 주목하는 새로운 방법. 그게 젠더프리 캐스팅의 진면모이자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하는 부분이다.


때로는 젠더프리 캐스팅에 관해 과도한 피시(PC·정치적 올바름)가 원작을 망치고 있다는 불만을 가진 목소리도 들린다. 그럼에도 젠더프리 캐스팅을 향한 움직임은 다양성이 보편화되는 흐름으로 나아가고 있다.

젠더프리 캐스팅에 관한 불만의 목소리, 젠더프리 캐스팅을 보는 당신이 느끼는 어색하면서도 불편한 감정, 이 모두 자연스러운 것이다. 혼란 없는 과도기는 없다. 그 혼란을 의식적으로 잠재울 필요도 없고, 과도기가 빨리 끝나길 간절히 바랄 필요도 없다. 어느새 이러한 어색함과 불편함은 사라지고 ‘당연함’만 남는 때가 올 것이다. 젠더프리 캐스팅이라는 개념조차 잊혀질 정도로, 성별에 대한 구분이 아닌 개인의 역량에 몰두하는 시기가 분명히 올 것이다.


당신이 이 글을 모두 읽고도 의문, 어색함, 불편함 느껴진다면 그러한 생각의 단초가 과연 무엇인지 고민해보길. 당신의 삶을 이야기로 썼을 때, 주인공의 성별에 따라 당신의 이야기가 각각 어떻게 그려질지 상상해보자. 그 차이가 큰가? 당신의 성별과 다른 이가 주인공이 되어 당신의 삶을 전달한다면 어색한가?

그 차이를 줄이고, 그 어색함을 없애고자 젠더프리 캐스팅이 이뤄지고 있다.


주인공이 여자든 남자든, 

한 사람으로서의 이야기로 남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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