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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애카이브 Sep 13. 2023

진정 내가 담고 싶은 것은

어린 날의 향수일까, 보여주기식의 행복일까.

장롱 한 켠에 있던 어린 시절의 나

지난 4월, 이삿짐을 정리하기 위해 안방에 있던 오래된 장롱문을 열었다. 엄마아빠의 신혼 시절 샀던 장롱, 22살인 나보다 족히 5년은 나이가 많은 장롱엔 흐른 시간만큼이나 두둑이 쌓인 추억이 들어 있었다. 엄마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또박또박 써 내려갔던 편지와 가치를 매길 수 없을 만큼의 커다란 마음을 담았던 쿠폰까지. (안마 쿠폰, 뽀뽀 쿠폰, 설거지 쿠폰 등)


그중에서도 유독 내 눈에 들어왔던 건 회색빛에 여기저기 상처가 나 있는 디지털카메라였다. 카메라에 담겨있는 영상이나 사진을 본 것도 아니고, 그저 케이스에 담겨있던 카메라를 보았을 뿐인데 어릴 적 기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오른손에 디카를 쥐고, 사랑에 가득 찬 눈으로 “하은아, 여기 봐봐~ 아이 예쁘다. 한 번만 웃어주라!” 외치던 다정한 엄마의 목소리. 어렸을 때를 떠올려 보면 늘 날 보는 엄마는 웃고 있다. 젊은 엄마가 인상을 쓰고 있는 모습은 기억에 남아있지 않다. 사진 찍는 걸 싫어해 카메라만 들면 짜증 내던 나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록하고 싶어 했던 그녀의 사랑을 이제야 알게 됐다. 그런 모습마저 엄마에겐 예뻐 보였던 것일까?


그래도 엄마 덕분에, 나는 어린 나를 마주하고 크게 웃었다. 그 시절의 내가 너무 못나서, 또 못난 나를 담은 영상 속에서 엄마의 사랑이 느껴져서.



필름카메라에 담긴 나의 스무 살

열아홉에서 스물로 넘어가던 해에, 유독 코닥의 ‘펀세이버’라는 일회용 필름 카메라를 생일 선물로 많이 받았었다. 그 덕에 나는 여행을 가는 특별한 날부터 동네를 거니는 사소한 날에도 카메라를 지니고 다녔다. 그렇게 사계절을 필름 카메라로 기록하며 느꼈던 가장 큰 감정은 바로 ‘애틋함’이었다.


필름 카메라로 사진 한 장을 찍는 데에는 여러 변수가 존재한다. 우선 필름 카메라는 핸드폰 화면처럼 ‘어떻게 찍히고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모니터가 없다. 따라서 과학 시간에 현미경에 눈을 대고 미생물을 관찰했던 것처럼, 일명 ‘뷰 파인더’라고 불리는 작은 네모 칸을 들여다보며 피사체를 조정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버튼을 눌러 ‘탁-’ 소리와 함께 사진을 찍었다 해도, 결과물을 곧바로 확인할 수 없다. 필름을 현상하기 전까진 어떤 장소에서 언제, 어떻게 사진을 찍어도 당장 눈앞에 남는 게 없는 것이다.

36컷의 사진을 무사히 다 찍어내면 다행이기라도 하지. 중간에 필름에 끊기거나 헛돌게 되는 순간, 지금껏 소중히 찍었던 모든 사진은 전부 사라진다. 필름에 문제가 생기면 아예 현상조차 불가능해지기 때문에, 36장을 채우기 전까진 결코 안심할 수 없다.

동네에서 가장 큰 벚꽃나무가 만개했던 날
연극 동아리에 들어가 꿈을 펼쳤던 친구를 보러 간 날
볼 가득 풍선을 불어 내 생일 축하받던 날
해방촌 어딘가의 벽에 적혀있던 글귀

이런 과정 끝에 얻게 되는 사진들은 스마트폰의 연속 촬영, 자동 초점, 확대 기능으로 편하게 찍어내는 사진보다 훨씬 더 많은 애정을 가지게 된다. 현상소에 필름을 전달하고 결과물을 기다리는 인내의 시간까지 거치고 나면, 비로소 지난날의 나를 마주한다. 손 덜덜 떨며 제대로 찍히긴 했을지, 필름이 끊기진 않았을지 조마조마하던 과거의 내가 스쳐 지나간다. 하지만 이러한 과정들이 있었기에 더 큰 愛를 쏟을 수 있는 것이다. 온전히 내 시선으로 담아낸 사진에 대한 愛정, 행복했던 순간을 오래 기억하게 만드는 愛틋함까지.



바로 지금 우리가 DITTO인 거야

뉴진스의 디토가 전 세계를 강타하며 ‘빈티지 디카’ 붐이 일어났다. Y2K 감성을 톡톡히 수행해 내는 이 캠코더는 사진밖에 찍을 수 없는 펀세이버를 아쉬워하던 나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유튜브, 블로그 등 지독한 웹서핑 끝에, 알리 익스프레스를 통해 단돈 4만 원으로 빈티지 캠코더를 구입했다.


그리고 그 캠코더와 함께 뜨거운 여름의 한가운데에서 제주도 여행을 떠났다. 공항에서 함께 떠나는 친구들을 만나 서프라이즈로 캠코더를 보여주니, 어째 나보다 더 환영하는 눈치였다. 친구 한 명이 조작법을 묻고 이리저리 카메라를 만지더니, 상기된 목소리로 “야! 이번 여행 진짜 청춘이다. 바로 지금 우리가 디토야!”라고 외쳤다. 마법을 부린 것처럼 캠코더 하나만으로 여행이 더 특별하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필름 카메라로 사진을 찍던 때에는 늘 내가 카메라를 잡고, 나의 시선을 담고자 노력했었다. 그런데 캠코더로 동영상을 찍게 되었던 올해 여름엔 다른 가치관을 세웠다. 오히려 내가 아닌 나와 함께하는 사람들이 그들의 시선으로 나를 담길 바랐다. 아마 엄마의 사랑을 담겨있던 영상이 기억에 남아 이를 바랐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친구들이 찍어준 나는 어딘가 모르게 어색해 보였다. 앵글 밖에서 피사체를 담던 입장에서 한순간에 피사체가 되어버렸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어색한 내 모습, 불편해 보이는 내 모습도 그 자체로 청춘이었다. (빈티지 감성의 화질과 음질이 한몫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영상은 사진보다 순간의 기억을 더 짙게 남긴다. 사진만 봤을 땐 기억이 가물가물하다가도, 영상을 보면 앞뒤 상황까지 전부 기억나는 경우도 있다.


스무 살 때 나는 “남는 건 사진뿐이야!”라고 외치며 카메라를 들고 다녔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 지금의 나는 “남는 건 영상뿐이야~”라고 외치며 캠코더를 꺼내 든다.



진정 우리가 바라는 것은

앞서 말했던 장롱 위에는 제법 두껍고 무거운 앨범 대여섯 개가 쌓여 있었다. 위에 쌓인 뽀얀 먼지를 걷어내고 앨범은 펼치면, 다시금 엄마의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엄마는 필름 카메라, 디지털카메라로 찍었던 사진들을 전부 현상을 맡겨 앨범에 한 장 한 장 붙여 놓았다. 시간이 지나 바래진 앨범 속에서 어린 시절의 나는 수십 년 동안 해맑게 웃고 있었다.


최근 유행하는 빈티지 캠코더는 더 이상 생산되는 제품이 아니기 때문에, 해당 모델을 구하기 위해 사람들은 중고 거래 플랫폼을 많이 이용한다. 경제학개론에서 배운 바에 의하면 수요가 많아지면 가격이 높아진다 했던가? 디카와 캠코더는 날이 갈수록 가격이 치솟고 있다. 구성품이 빠져 있거나 흠집이 나 있는 제품도 마다하지 않고 제품을 사들인다.


필름 카메라에 들어가는 필름 역시 생산이 중단되고, 찾는 사람들은 많아지면서 가격이 급속도로 상승했다. 이제 36장의 사진을 찍기 위해선 약 15,000원의 돈이 필요해진 셈이다.


혹시나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 필름 카메라를 사용해 본 적이 있다면 묻고 싶다. 당신은 현상소에 찾아가 ‘인화’까지 해달라고 했는가, 아님 ‘현상’만을 해달라고 했는가?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은 인화가 아닌 현상을 택할 것이라 생각한다. 파일로 받는 사진이 SNS에 공유하기 편리할뿐더러, 인화한 사진은 서랍 어딘가로 들어가 묵힐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사진을 찍으며 느꼈던 애틋함이란 감정은, 핸드폰 안에 들어간 파일 형식보다 손으로 만질 수 있고 세상에 하나뿐인 종이로 존재할 때 더욱 짙어지지 않을까?


나는 애정이 담긴 사진이 좋다. 만질 수 있는 사진이 좋다.

네 컷 사진처럼 기계가 찍어주는 사진도 아니고, 용량만 차지하는 데이터로 치부되는 핸드폰 속 사진도 아닌.


우리가 필름 카메라로, 디지털카메라로, 캠코더로 사진을 찍고 영상을 기록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들이 진정 사고 싶어 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들이 진정 팔려고 하는 것은 무엇일까?


어린 날의 향수일까, 보여주기식의 행복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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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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