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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애카이브 Oct 23. 2023

내가 사랑했던 모든 사람들에게

연예인이 밥 먹여주니?

ㄴ 네


에디터 아궁은 한때 박애주의자였다. 누구를 그렇게 사랑했냐고 묻는다면 한 명을 콕 꼽아서 말하기 어려울 만큼 말이다. 2012년, 당시 전성기를 누리고 있던 모 그룹의 포스터를 방문에 붙이던 초등학생은 이후 네 번의 활발한 국민 프로듀서 활동을 포함해 배우, 운동선수를 가리지 않고 아주 많은 사람을 마음의 방에 넣곤 했다. 물론 그 중 몇몇은 뉴스 사회면의 헤드라인을 장식해 버리기도, 직무 유기 수준의 구설에 올라 어둠의 길을 걷기도 했지만 그들을 응원했던 시간마저 미화될 만큼 나의 ‘덕질’은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아있다.

열 손가락이 모자랄 만큼 다양한 팬덤을 경험해 본 내가 생각하는 ‘팬덤’은 ‘무료 콘텐츠 제공자 모임’이다. 유튜브, TV 프로그램, OTT 콘텐츠 등 좋아하는 연예인이 출연한다면 장르를 가리지 않고 영상을 녹화한 후 SNS에 올려 실시간으로 떡밥을 주워 담는다. 이미 제작된 콘텐츠를 즐기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직접 콘텐츠를 창출하기도 한다. 가장 기본적인 생일 광고부터 시작해 팬 메이드 에딧 (주로 노래를 입힌다), 생일 카페, 전시회, 굿즈, 어록 북, 시즌 그리팅 등… 셀 수 없이 많은 팬 제작 자체 콘텐츠가 매일같이 쏟아져 나온다.


물론 이 모든 것들은 소속사나 연예인 측에서 의뢰받는 것이 아닌, 순전히 ‘팬심’에서 비롯된 무료 콘텐츠들이다. 팬덤 안에서 즐기는 것에서 더 나아가 내가 덕질하는 모습을 영상으로 편집해 업로드 하는 브이로그 콘텐츠, 4K 콘서트 직캠, 그리고 팬 사인회 직찍 등 팬이 아닌 사람까지 관심을 가질 만한 콘텐츠까지 고퀄리티로 만들어 내니 어떻게 보면 소속사보다 연예인의 홍보 활동에 더 크게 기여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

학창 시절을 되돌아보면 단 한 순간도 연예인을 좋아하고 있지 않았던 적이 없는데, 불행 중 다행인지 그리 덕질에 과몰입하는 편이 아니라 인생이 송두리째 휘어잡힐 정도로 살아가는 데 영향을 받지는 않았다. 주변 친구들을 보면 연예인의 행보에 따라 본인 인생의 방향도 휘어지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런 광경을 여러 번 본 결과 덕질은 취미처럼 하는 게 가장 건강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조건 없이 헌신적인 사랑을 누군가에게 쏟아부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건강한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사랑에 빠진 게 죄는 아니잖아


그런데 이 헌신적인 사랑에 대한 대우는 어떠할까? 지난 7월 SNS를 떠들썩하게 했던 한 사례를 보자. 하이브(HYBE) 재팬 소속 보이그룹 앤팀(&Team)의 팬 사인회 현장에서 과도한 신체 수색으로 피해를 보았다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원칙상 팬 사인회의 진행 중에 녹음이나 촬영이 불가한데, 이를 위해 전자기기 소지 여부를 파악하겠다는 명목하에 성추행에 가까운 수색이 이루어진 것이다.

"가슴을 만지다가 '워치죠?' 하면서 날 끌고 가서 작은 공간으로 데리고 가더니 옷을 올리라더라. 너무 수치스럽고 인권 바닥 된 기분이었다."
"셔츠 사이로 손가락을 넣어 헤집더라" 등의 글을 통해 당시 몸수색을 당한 사람들의 당혹스러움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비난이 거세지자, 하이브 측은 "전자장비를 몸에 숨겨 반입하는 사례가 다수 발생하여 이를 확인하는 보안 바디 체크가 여성 보안요원에 의해 진행되었고, 기쁜 마음으로 행사에 참석하신 팬 여러분에게 불쾌감을 드리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연예인과 팬 간의 1대1 대화 자리에서 녹음 불가라는 원칙이 있다는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이를 어기는 일부 사람들이 있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나, 이를 명목으로 위와 같은 행동이 이어진다면 과연 옳은 것일까.


주로 이러한 일명 ‘빠순이’ 취급이 발생하는 콘서트, 팬 사인회 등의 오프라인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팬들은 적게는 수십, 많게는 몇백만 원을 들여 참여하곤 한다. 이에 팬들은 “보통 기업은 돈 쓰는 고객, 돈 많이 쓰는 고객을 더 우대하지 않나. 케이팝은 케이팝 리스너보다 돈 많이 쓰는 코어 찐 팬들이 더 인간 취급 못 받는다. 기괴하다”며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오프라인 행사 외에도 앨범 사양을 공개하지 않는 채로 터무니없는 가격을 제시하거나, ‘포토 카드’를 수집하기 위해 다량으로 앨범을 구매하는 사람들을 노려 일부러 일명 ‘끼워팔기’를 하는 등 충성도 높은 팬심을 이용한 과도한 상술이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팬들의 입장에서는 콘서트나 앨범의 가격이 갑자기 높아지거나 부당한 방식이 적용되더라도 울며 겨자 먹기식으로 소비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다.

여느 시장에 비해 빠른 피드백을 제공하는 소비자인 팬들이 이러한 행태에 지쳐 떠나게 된다면 결국 한 산업이 위축될 수도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부당한 상술과 팬덤 비즈니스의 악용을 멈추고 연예인과 팬 모두가 긍정적인 영향을 주고받을 수 있는 깨끗한 엔터 사업이 지속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한 번 끌어안고 구치소 들어갈까


제대로 된 덕질을 하려면 체력이 필수라는 말이 있듯이, 에디터 아궁은 이제 그만큼의 체력이 안 되어 어릴 때처럼 연예인을 열렬히 좋아하지는 못한다. 컴백 티저가 뜨는 날 밤을 새워서 사진을 보정하고, 콘서트 전날 새벽에 서울로 상경하여 콘서트장 앞에서 텐트를 치던 시절이 어떨 때는 전생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지금은 돈을 주고 하라고 해도 못 할 사랑을 할 수 있었던 동력이 뭐였을까, 곰곰이 생각해 본다. 연예인이 주던 긍정적인 영향도 물론 있었겠지만, 동일한 연예인을 좋아한다는 하나의 이유만으로 똘똘 뭉칠 수 있었던 사람들이 주던 영향이 더 컸던 것 같다. 그때 만난 인연이 좋은 인간관계로 발전하기도,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도움을 받기도 했기 때문이다.

조건 없는 사랑을 할 수 있었던 그 시절을 다시 되돌아보며 내가 사랑했던 모든 연예인과 팬들에게 타인을 열렬히 사랑할 수 있는 시간이 계속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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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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