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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애카이브 Apr 30. 2024

이건 안 easy해 (진짜루!)

하드리스닝의 시대가 도래한다

 K-Pop으로 음악 감상이라는 유구한 취미의 문을 열었다. 2010년대까지만 해도 K-Pop에는 전형적인 공식이 있었다. 제법 긴 인트로와 중독성 강한 싸비(절대 후렴구라고 칭해선 안 됨), 이어지는 래퍼 라인 자랑과 메인보컬 혹사, 그리고 그 시절 아이돌의 필수 덕목 댄스 브레이크까지. 이 모든 구성을 한 곡에 넣으려면 적어도 4분은 필요했다.


 요즘은 이런 노래가 없다. ‘메인 OO’이라고 불리는 포지션도 없다. 래퍼 라인 자랑도, 메인보컬 혹사도 없다. 그저 흘러가는 짧은 노래들 뿐이다. 유행 따라 플레이리스트를 구성하다 보니 내 애착멜론에 4분 넘는 노래는 이제 거의 없었다. 3분도 채 안 되어 끝나는 노래도 정말 많았다.


 그러나 이 평온한 이지리스닝의 바닷속에서 꿋꿋이 5분 이상이 진리임을 외치는 곡들이 몇 곡 있었다. 난 이걸 ‘하드리스닝’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이 글에서는 내 애착멜론 속에 박혀 있는 하드리스닝 곡을 몇 개 전파해보려고 한다. 이지하게만 살아가면 나중에 큰코다칠지도 모르니까 눈여겨보길 추천한다.



AUTOMATIC REMIX - 챈슬러 외 27명

(15분 39초)

https://youtu.be/y3YHzWM7DCI?si=xG9AhDs8k-HuAEH9

 챈슬러가 거느리는 27 궁녀 같은 노래다. 20살 때 이 노래를 처음 들었는데, 정말 충격적이었다. 노래가 좋아서? 아니다. 길어서다. 16분 조금 안 된다. 15분 39초다. 153cm인 내가 2m 조금 안 된다고 말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진실성.

 이 곡의 라인업은 실로 어마어마하다. 특히 AUTOMATIC을 빛낸 7명의 여자 아티스트 라인업 말이다. 이하이, 비비, 제이미, 문수진, 후디, 수민, 쏠로 이어지는 폭룡적인 폭격에 길바닥에서 기절할 수도 있다. 너무 긴 노래이기 때문에 각 잡고 감상하려 들면 다친다. 체할 수도 있다. 이 노래는 딱 ‘버스 타기에는 돈이 아까운데 걸어가기에는 조금 먼 것 같은 거리를 걸어가기로 결심했을 때’ 듣기 좋다. 날씨도 좋으니 이 곡은 제철이라 할 수 있겠다.



기억을 걷는 시간 - 넬

(5분 13초)

https://youtu.be/8vL_nWjFTPk?si=VlryhbQdYwFNGj7o

 너무 유명한 노래라 소개하기도 부끄럽지만, 이 곡이 5분을 넘긴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김종완의 “아직도…” 세 글자는 김종민의 “우연히~”와 같다. 그래서 한 순간 노래에 빠져들어서 시간을 잃어버리게 된다. 기억을 걷는 시간이 아니라 기억을 지우는 시간이라고 제목을 바꿔야 할 지경. 쥐도 새도 모르게 5분을 증발시키고 싶다면 들어도 된다.



날 보고 뭐라 그런 것도 아닌데 - 장기하와 얼굴들

(8분 17초)

https://youtu.be/n8XJrGwbbxc?si=ZxN_gYQbcIjuCH1r

 장기하의 음악 세계는 밤양갱 하나로 치부하기엔 너무 커다랗다. 정신 놓고 싶을 때 이 노래를 틀어보길 추천한다. 특히 세상 모두가 날 미워하는 것 같고, 핍박 주는 것 같은 날에 말이다. 나보다 정신줄 놓고 있는 장기하의 8분 폭격이 그대를 위로해 줄 것이다. 날 보고 뭐라 그런 것도 아닌데 괜히 눈치 보일 때 속으로 이 노래를 줄줄 외우자.

 날 보고 뭐라 그런 것도 아닌데 그 사람을 칭찬했을 뿐인데 내가 그리 못난 것도 아닌데 그 사람이 참 잘났을 뿐인데 내가 울고 싶은 것도 아닌데 그 사람이 웃고 있을 뿐인데-



BORN HATER - 에픽하이

(5분 27초)

https://youtu.be/3s1jaFDrp5M?si=jIdgIzvnwmZxdhpu

 이 노래 가사를 외우지 못한 사람은 힙찔이 탈락이다! 수많은 힙찔이들이 화장실에서 한 칸씩 차지한 뒤 고개 끄덕이며 가사 외우게 했다는 전설의 노래. 이 또한 화려한 피처링 라인업답게 5분을 가뿐히 넘겨버렸다. 당시 신인이었던 비아이와 송민호의 벌스는 시간이 좀 흐른 뒤 들으니 더 맛있더라. 변치 않는 타블로와 빈지노는 덤!



 공부할 때, 작업할 때는 최대한 길고 튀지 않는 플레이리스트를 엄선하는 우리인데! 대체 왜 각 잡고 음악을 감상하려 들면 긴 노래는 기피하게 되는 걸까? 그건 아마 우리의 잘못은 아닐 거다. 짧고 좋은 노래가 너무 많은 걸 어떡하라고.

 어색한 이웃처럼 찾아오는 하드리스닝 곡들은 더 이상 지루한 것이 아니라 신선한 것으로 변해버렸다. 주류에 속하지 않은 것들은 특별함으로 치환되기 마련이니까. 지루한 일상 속에 신선한 특별함을 더해보고 싶다면, 당장 5분 이상 멍 때릴 준비를 하자. 무언가를 깨트리는 것은 경계를 부풀리는 새로움을 전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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