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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조 Oct 30. 2022

3. "우웩!" 오징어

내가 호주에 있을 때 오징어 게임이 나와줬었더라면...


나는 어릴 때부터 오징어 진미채, 시금치나물, 콩자반, 볶은 김치와 같은 반찬들을 좋아했다. 물론 소시지나 고기반찬이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앞서 말한 반찬들만으로도 밥 한 그릇은 뚝딱 비워내는 어린이였다.

이런 내 식성을 잘 아셨던 엄마는 호주에서도 날마다 내 입맛에 맞는 도시락을 준비하기 위해 노력하셨다.

볶음김치는 냄새와 국물 때문에 도시락에 넣기에는 너무 위험했고, 콩자반에 필요한 검은콩은 찾기 어려웠다. 호주의 시금치는 우리나라 시금치와 모양도 달랐고 비싸기까지 했다. 그에 비하면 오징어채는 한인마트에서 손쉽게 구할 수 있었으며, 결정적으로 그때 엄마의 수중에 있던 요리책, 「2,000원으로 밥상 차리기 - 나물이의 생존전략」에 간단한 진미채 레시피가 실려있었다고 한다.



내가 다니던 학교는 1-7학년까지가 주니어 스쿨, 8-12학년까지가 시니어 스쿨로 나뉘어있었는데, 시니어는 교실 밖으로 나가 친한 아이들끼리 삼삼오오 모여 도시락을 먹을 수 있었지만 주니어는 무조건 같은 학급 학생들끼리 한자리에서 식사를 해야 했다. 난 아직 영어가 서툴러 같이 밥을 먹을 친구가 없었기에, "오히려 잘 됐네~"싶었다.


그날 점심시간에도 나는 여느 때처럼 룰루랄라 엄마께서 싸주신 도시락을 꺼냈다. 흰쌀밥에 불고기, 폭신폭신한 계란지단 그리고 꼬들꼬들 오징어 진미채 도시락. 전부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었다. 

내 옆에는 활발한 금발의 수다쟁이 C가 앉아있었는데, C는 점심시간이 되자마자 자기 샌드위치를 빠르게 먹어치우더니 갑자기 내게 말을 걸어왔다. C가 하는 말의 절반도 채 알아듣지 못했지만 나는 태연하게 "예에스..."라고 대답하기도 하고 (아직도 내가 뭐에 예스라고 대답한 건지 모르겠다), 웃어야 할 것 같은 타이밍에는 한 번 웃어주기도 하며 (생각해보면 C는 안 웃고 있었다)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래도 C가 내 도시락통을 가리키며 “왓 이즈 디스?” 라고 말한 건 확실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C의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당시 내가 알고 있던 영어 단어들을 총동원했다. 

불고기를 가리키며 "디스 이즈 스테이크."

그다음엔 지단을 가리키며 "... 스크램블." 내 한식 도시락이 양식으로 완전히 탈바꿈하는 순간이었다.

그래도 지단까지는 좀 쉬웠다. 문제는 진미채였다.

사실 C가 진짜 내 도시락의 내용물을 궁금해한 건 아니었을 텐데, 그때의 나는 진지했다.

C의 궁금증을 해소해 주고파 머릿속의 얄팍한 영어 사전을 열심히 뒤지고 뒤진 끝에 당당하게 입을 열었다.

“잇츠 스쿼드!"


그랬더니 돌아온 C의 반응이 무엇이었을지, 이 챕터의 제목을 읽고 들어오셨으니 얼추 상상이 가시리라 믿는다. 그 애의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우웩! (Ewwww!)”이라고 했다.


불시에 날아온 질문을 제대로 이해하고 대답했다는 사실에 내심 뿌듯함을 느끼고 있었는데, 그 충족감이 순식간에 증발해버렸다. 난 허겁지겁 도시락 뚜껑을 닫아 진미채를 감추었다. 그게 정말 C가 생각하는 어떤 역겨운 것이라도 되는 양. ‘뭐야? 너희들도 오징어 잘만 먹으면서!’라고 쏘아붙여주지 못했던 것이 한이다.



호주인들은 실제로 오징어를 정말 많이 먹는다. 그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오징어 요리는 아무래도 'calamari(칼라마리)’일 것이다. 이탈리아어로 오징어라는 뜻이지만, 호주에서 '칼라마리'라 하면 99퍼센트는 동그란 링 형태로 튀겨낸 오징어튀김을 말한다. 칼라마리는 동네의 소박한 매점, 해변가 근처의 캐주얼한 식당, 조금 고급스러운 레스토랑, 간단한 식사를 제공하는 카페 등 어느 식당에 가도 으레 있는 호주의 국민 메뉴였다. 우리나라 분식집의 오징어튀김이나 오징어링을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겠지만 막상 먹어보면 많이 다르다고 느낄 것이다. 같은 재료에 같은 조리방식인데 문화가 다르다는 이유 하나로 제법 다른 결과물이 나오는 게 재미있다. 


우리 가족이 특히 좋아했던 식당이 있다. 이 가게엔 시푸드 플래터라는 메뉴가 있었는데, 쟁반보다 큰 은색 접시 위에 맥주 반죽을 입혀 고소하게 튀겨낸 감자튀김, 칼라마리, 관자놀이 튀김, 과자처럼 바삭바삭한 주꾸미 튀김, 통통한 새우 커틀릿이 산더미처럼 쌓여 나오는 요리였다.

 여기에 샐러드와 생선 요리도 포함이었으니 대식가인 우리 가족 넷이 부지런히 먹어도 양이 많았다. 샐러드는 가든 샐러드와 그릭 샐러드 중 고를 수 있었다. 양상추, 토마토, 올리브, 양파, 오이, 페타 치즈가 들어간 산뜻한 맛의 그릭 샐러드를 아빠, 언니가 정말 좋아해서 우린 항상 그걸 골랐다. 

생선은 cod(대구)였는데 이걸 어떻게 익혀 먹을지를 선택할 수 있었다. Battered(튀기기), crumbed(빵가루를 입혀 튀기기), grilled(굽기)로 어느 걸 골라도 생선이 촉촉하고 담백하니 맛있었다.


하지만 역시 이 플래터 메뉴의 하이라이트는 칼라마리였다. 영롱한 골든 브라운 빛깔의 그 동그란 튀김의 산더미에 레몬즙을 한 바퀴 빙 두른 다음 하나 집어 덥석 베어 물면, 레몬의 새콤함이 스며든 바삭바삭하고 고소한 빵가루 튀김옷 너머의 쫄깃하고 부드러운 오징어 살이 혀 위에서 사르르 녹았다.



오징어 진미채를 '칼라마리'라고 의역했더라면 그 말을 들은 C의 반응도 조금은 달랐을 것 같다. 적어도 "우웩!"이라고까진 하지 않았으리라. 사실 칼라마리도 오징어란 뜻인데. 그냥 '스퀴드'라는 단어가 낯설어서 거부 반응을 보인 걸지도 모른다. 내가 호주에 있을 때 <스퀴드 게임>이 나왔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러고 보니 C도 이 드라마를 봤을까? 친구들과 스퀴드 게임을 시청하면서  '나 주니어 스쿨 시절에, 도시락에 스퀴드를 싸온 한국애가 있었지'라고 말을 꺼내는 C의 모습을 내 맘대로 상상했더니, 조금 웃음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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