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희는 라지(Large) 사이즈 주문했는데 왜 휴지(Huge)가 나와요?
호주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나는 제일 먼저 이 나라의 거대함에 크게 놀랐다.
지구에서 여섯 번째로 큰 나라라고 하더니, 그 때문일까? 이 나라는 모든 것이 다 컸다.
난생처음 보는 보랏빛 꽃을 피우는 나무들도 컸고, 도로도 인도도 넓고 컸으며, 푸른 하늘과 그 하늘을 가득 채운 구름들까지 전부.
특히 호주의 하늘을 올려다보며 내가 받았던 인상은 이랬다.
한국의 하늘이 오밀조밀 예쁘고 부드러운 수채화 같은 느낌이라면, 호주의 하늘은 박력이 넘치는 유화 같았다. 호주에 서식하는 벌레들의 위상(주로 크기에서 비롯된)에 대한 이야기는 이미 국내 커뮤니티와 SNS에서 여러 차례 화제가 된 바 있으니 굳이 내가 더 장황하게 보태지는 않겠다.
살짝 과장해서 개미들의 이목구비가 보일 정도긴 했다.
조금 샛길로 빠졌는데, 아무튼 당시 12살 어린 내게 이런 거대함은 꽤나 신선한 충격이었다.
내가 어렸기 때문에 주변 환경이 더 크게 느껴졌던 걸지도 모른다. 어렸을 때의 기억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보정이 되지 않던가. 쌓인 기억들 중 제일 임팩트가 컸던 부분만 더 확대된 채로, 더 진해진 채로 기억된다.
하지만 이런 보정 치를 염두에 두지 않더라도 호주는 그 광활한 땅덩이부터 시작해 많은 것들이 큰 나라라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많은 것들’의 범주에는 음식도 들어간다.
내가 살던 동네의 쇼핑센터 2층에는 아담한 푸드코트가 있었다. 규모는 작아도 다양한 식당이 알차게 입점해 있었는데, 호주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우리 가족에겐 하나같이 낯선 브랜드들이라 어딜 들어가서 무얼 먹어야 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이렇게 된 거 '촉'에 맡기자 싶어, 소위 말하는 '삘'이 딱 꽂히는 가게를 찾기 위해 2층을 한 번 쭈욱 스캔했다. 바쁘게 데굴데굴 굴러가던 나의 작은 눈동자가 이윽고 한 지점에 딱 멈추었다. 익숙하지 않은 이름들 가운데 번쩍번쩍 빛이 나는, 너무나도 친근한 이름 석자. KFC!
영어는 못했지만 ‘징거버거’는 말할 줄 알았던 나는 '징거버거는 호주에서도 징거버거겠지'라는 확신에 차 엄마와 언니의 손을 붙잡고 성큼성큼 주문을 하러 갔었더랬다.
당연하게도 주문은 원활히 이루어지지 못했다.
호주에는 햄버거 ‘세트’라는 표현 자체가 없다. 햄버거에 감자튀김과 음료가 딸려오는 이 구성을 그들은 ‘밀(meal)’ 내지는 ‘콤보(combo)’라고 불렀는데, 이를 알 턱이 없던 우리는 계속 세트, 세트를 되뇌었던 것이다. 주문을 받는 직원은 무척 혼란스러워 보였고, 그 얼굴을 보는 우리들도 점점 혼란스러워졌다.
그 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우리는 어찌어찌 주문을 마쳤고, 잠깐의 기다림 끝에 무사히 음식을 받아올 수 있었다.
그렇게 받아온 호주의 햄버거 ‘콤보’는... 한국의 햄버거 ‘세트’와는 많이 달랐다.
모양새는 얼추 비슷했지만 스케일이 달라도 너무 달랐다.
동일한 과에 속하지만 엄연히 다른 개체, 그러니까 마치 캥거루와 왈라비 같은 느낌이었다고나 할까. 실제로 캥거루가 왈라비보다 훨씬 덩치가 크다는 걸 감안한다면 제법 그럴싸한 비유라고 생각한다.
버거는 웬만한 호주 어린이의 얼굴만큼 컸고, 감자튀김은 어른 손바닥 정도의 너비와 길이, 성경책 가까이 되는 높이의 종이 상자에 꽉꽉 담겨있었으며, 콜라가 담긴 컵은 유명 커피 전문점의 벤티 사이즈보다도 더 컸다. 우리가 주문한 건 라지 콤보였는데 그건 라지(large)가 아니라 휴지(huge)라 불러야 했다.
머잖아 알게 된 사실이지만 비단 KFC뿐 아니라 호주의 식당들은 대부분 크기가 크고 양이 많은 음식을 제공했다. 때문에 유학을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몸무게가 무시무시하게 불어 덩치가 제법 커졌다. 당시에는 이로 인해 크나큰 스트레스를 받았었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덕분에 골격과 체격이 크게 타고난 또래 호주 아이들과 나란히 서있어도 별다른 위화감 없이 자연스레 섞여들 수 있었다. 어떨 땐 내가 걔네들보다 크기도 했다. 어쩌면 어마어마하게 크고 양이 많던 음식들은, 모든 게 다 크고 거대한 나라에서 작은 동양인 여자애가 짓눌리지 않게 하기 위한 나라 차원의 배려였던 건 아닐까? 이런 실없는 생각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