띵동♪ 턱샵 주문! 아침에 주문하면 점심에 교실 앞까지 배달해드립니다!
앞서 말한 “스퀴드. 우웩!” 사건에 적잖은 충격을 받았던 나는 그날부터 친구들의 도시락을 열심히 훔쳐보며 애들이 뭘 싸오는지, 뭘 먹는지를 열심히 연구했다.
애들은 생각보다 다양한 메뉴들을 싸왔다. 볶음밥, 쿠스쿠스, 파스타. 샌드위치가 제일 많기는 했다. 내용물은 주로 햄과 치즈 또는 스프레드 잼과 버터처럼 심플한 것이었는데, 대신 빵의 종류가 가지각색이었다. 호밀빵, 곡물이 콕콕 박혀 거칠거칠한 통밀빵, 바게트, 동글동글 베이글, 터키쉬 브레드 등등. 마트에서 판매하는 피자빵을 랩에 싸서 가져오는 아이들도 있었다.
그렇게 차근차근 호주의 도시락 문화를 배워가던 중, 나에게 큰 혼란을 선사하는 것이 하나 나타났으니, 그건 바로 교실 앞에 위치한 의문의 하얀 바구니였다.
그 바구니는 수업이 시작됨과 동시에 교실 밖으로 자취를 감추었다가, 점심시간이 되면 다시 교실 문 앞에 짠! 하고 나타났다. 그것도 맛있는 냄새를 풍기는 갈색 종이봉투를 잔뜩 품은 채로. 그럼 몇몇 아이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바구니에서 봉투를 집어 든다. 그리곤 그 안에 담긴 음식을 꺼내 제 자리에서 냠냠 맛있게 먹는 것이었다!
이 종이봉투 속에서 튀어나오는 음식은 날마다 조금씩 달랐다.
어떤 날에는 김말이 초밥, 그다음 날엔 알루미늄 용기에 담긴 소스 범벅의 무언가. 그다음엔 구운 샌드위치, 카레. 그랬다가 다시 김말이 초밥이 등장한다.
약 이주일 정도 이 기묘한 시스템을 유심히 관찰한 끝에, 나는 일종의 규칙을 알아내게 되었다.
-아침에 교실에 들어오면 일부 아이들이 하얀 바구니 안에 종이봉투를 던져 넣음.
-봉투를 던져 넣을 때 짤랑 소리가 나는 걸로 보아 안에 동전이 들어있는 것으로 추정됨.
-봉투 겉에 이름, 반 번호, 음식 이름이 적혀있음.
-점심시간 10분 전, 어떤 아주머니(아주머니와 무척 닮은 반 친구가 창 너머로 그분께 반갑게 인사를 한 걸로 보아, 학부모 자원봉사자 추정)께서 바구니를 도로 교실 앞에 놓고 감.
-아침에 바구니에 봉투를 던져 넣었던 아이들이 자기 이름이 적힌 봉투를 꺼냄.
-요일별 고정 메뉴와 상시 판매 메뉴가 존재함.
여기까지 알아냈으니, 난 이걸 한 번 따라 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러기 위해선 제일 먼저 종이봉투가 필요했고, 엄마께 부탁을 드렸더니 바로 쇼핑몰에서 봉투를 사다 주셨다. 갈색이 아닌 하얀색 종이봉투를.
"이거 아니에요 엄마. 갈색이어야 해요."
"그래? 꼭 흰색이어야 한다던?"
"그건 아닌데... 애들 다 갈색 종이봉투만 그 바구니에 넣는단 말이에요. 흰색을 넣었다가 뭔가 잘못되면 어떡해요?"
"색이 그렇게까지 중요하지는 않을 것 같은데..."
"아니에요 엄마. 혹시 모르잖아요. 돈만 받아가고 음식을 안 줄 수도 있잖아요. 갈색이어야 해요!"
나는 부정적인 쪽으로 상상력이 좋은 아이였고, 엄마는 결국 갈색 봉투를 다시 사 오셔야만 했다.
엄마께서 다시 사 오신 그 봉투에는 아예 이름과 메뉴, 학급 번호를 적을 칸이 프린트되어 있었다.
영수증에 찍힌 그 봉투의 이름은 ‘tuckshop paper bag (턱샵 페이퍼 백)'이었다.
Tuckshop은 우리나라로 치면 매점과 같은 곳이다. 다소 생소한 이 이름은 음식을 뜻하는 호주의 속어 tucker(터커)에서 tuck(턱)을 떼와 가게를 의미하는 shop(샵)을 합쳐서 만들어졌다 한다. 턱샵에서는 아이스크림, 쿠키, 컵케이크, 젤리와 같은 간식류도 팔고, 주스와 우유도 팔았으며, 다양한 식사 메뉴들도 판매했다. 학부모 자원봉사자들이 점심시간에 맞춰 신선하게 조리해 교실로 직접 운반해주시는 것들이라 하나같이 따듯하고 맛있었다.
아래는 내가 좋아했던 메뉴들이다:
-Sushi with tempura prawn (새우튀김이 들어간 김말이 초밥)
고소한 마요네즈 소스를 끼얹은 통통한 새우튀김 하나가 통으로 들어간 김말이 초밥.
나와 언니가 제일 좋아하는 메뉴였다.
-Nachos with salsa, sour cream and cheese (나초)
앞서 말했던 “알루미늄 용기에 담긴 소스 범벅의 무언가”가 바로 나초였다.
나초칩 위에 살사와 치즈를 듬뿍 얹어 오븐에 살짝 구워낸 뒤 사워크림을 얹었다.
Chicken & cheese jaffle (익힌 닭고기와 치즈가 듬뿍 들어간 구운 샌드위치)
-Jaffle은 토스트 샌드위치를 뜻하는 호주 말이다. 후추와 소금으로 살짝 간이 된 닭고기를 깍둑썰기 해 모차렐라 치즈와 함께 빵 사이에 넣어 샌드위치 프레스에 꾹 눌러 구워낸 것이다. 닭고기의 양도 많았고, 쫀득쫀득한 치즈가 정말 맛있었다.
Sausage roll (소시지 롤)
소시지 롤이라는 이름을 듣자마자 소시지빵을 떠올렸는데 그것과는 조금 다른 음식이었다. 소시지가 들어가는 게 아니라 소시지를 구성하는 고기—그러니까 소시지 껍데기 안에 들어가는 다진 고기를 페스츄리 반죽으로 감싸 구워낸 음식을 말한다. 소시지 껍데기를 페스츄리로 대체한 느낌? 맛은 있었지만 토마토소스가 없으면 좀 느끼해서 40센트짜리 토마토소스도 꼭 함께 주문했었다.
지금은 코로나19로 상황이 많이 바뀌었겠지만, 내가 유학하던 시기의 호주는 아직 음식 배달 서비스가 크게 자리잡지 못하고 있었다. 배달이 가능한 가게보다 불가능한 가게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그런데 학교에서 배달의 사치를 누릴 수 있다니!
그러나 턱샵 배달 시스템은 주니어 시절에만 누릴 수 있는 혜택이었다. 시니어 스쿨에 올라가자마자 같은 반의 개념이 사라져 턱샵 바구니는 더 이상 사용할 수 없었다. 이제는 턱샵 앞까지 가서 줄을 선 다음 음식을 주문해야 했다.
조금 일찍 턱샵에 가면 봉사하시는 어머님과 아버님들이 주니어 스쿨로 운반할 바구니에 음식들을 차곡차곡 정성스럽게 담는 모습을 구경할 수 있었다. 나도 모르게 '부럽다, 주니어 스쿨 후배들아!'라는 생각을 하며 그 바구니를 오랫동안 바라보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