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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피스토 Jul 26. 2021

그림이 그려지는 시 이야기

묵화(墨畫)-김종삼

Photo by Rhema Kallianpur on Unsplash




묵화(墨畫)

-김종삼

 

물 먹는 소 목덜미에

할머니 손이 얹혀졌다.

이 하루도

함께 지났다고,

서로 발잔등이 부었다고,

서로 적막하다고,

 

 

여기 여섯 행짜리 짧은 시가 있습니다. 시가 짧으니 슥- 하고 쉽게 읽히겠구나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시는 그림 한 점을 감상하는 마음으로 차근차근 읽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행과 행 사이의 여백이 주는, 시 읽기의 즐거움을 선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김종삼 시인은 1912년 황해도 은율에서 출생하여 1984년 작고하였습니다. 이 시는 그의 첫 시집 《십이음계》 (1969) 수록된 작품이지요


럼 제목부터 하나씩 살펴볼게요. ‘묵화(墨畫)’라고 되어 있네요. 묵화는 수묵화를 뜻합니다. 수묵화란 채색을 하지 않고 먹의 농담을 이용하여 그린 동양화입니다. 김종삼 시인은 친절하게도 제목에서 이미 “이 시는 한 폭의 동양화를 그렸습니다”라고 언질을 주고 있군요. 그렇다면 우리는 시인의 안내에 따라 수묵화 한 폭을 감상할 마음의 준비만 하면 됩니다. 


이제 시를 읽어봅시다. “물 먹는 소 목덜미에/할머니 손이 얹혀졌다.”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소는 물을 먹고 있어요. 소가 물을 먹고 있는 것을 보니 목이 마른 모양입니다. 아마도 밭일을 하고 있거나, 일을 끝마친 게 아닐까 싶습니다. 소 옆에는 할머니가 있습니다. 그리고 할머니의 손은 소의 목덜미 위에 얹혀 있네요.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할머니가 소의 목덜미 위에 손을 ‘얹은’ 것이 아니라, ‘손이 얹혀졌다’는 데 있어요. 시인은 할머니의 손이 ‘얹혀졌다’는 피동사를 썼습니다. 할머니의 고단함을 표현하려 한 것이지요. 예를 들어, “할머니가 누웠다”라는 표현과 “할머니가 눕혀졌다”라는 표현이 전혀 다른 뜻을 담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할머니의 손이 ‘턱’ 얹혀질 만큼 하루는 힘이 들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시의 첫 두 행에서 일을 마친 지친 소와 고단한 할머니를 그려볼 수 있습니다. 


다음 두 행을 읽어보겠습니다. “이 하루도/함께 지났다고,” 힘든 하루를 함께 보낸 것에 대해 서로 위로하는 듯하네요. 시인은 하루가 간 것을 두고 “함께 지났다”고 표현합니다. ‘함께 지냈다’고 했다면 서로가 한곳에 머문 안온함이 느껴졌겠지만, ‘함께 지났다’고 하니 마치 고갯마루까지 서로 밀고 당기며 힘겹게 올라가는 풍경이 그려집니다. 어찌보면 비문인 이 표현이, 거슬림 없이 물흐르듯 흘러가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시인은 행 끝에 쉼표를 찍는 것을 잊지 않습니다. 이 쉼표는 다음으로 이어지는 두 행에서 더 시름 깊어집니다.  


서로 발잔등이 부었다고,/서로 적막하다고,” 이 부분은 ‘묵화’의 여백을 가늠할 수 있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여러분도 한번 “-다고,”를 반복하는 세 행을 다시 찬찬히 읽어보세요.


함께 지났다고,/서로 발잔등이 부었다고,/서로 적막하다고,” 


한 행마다 한숨을 내뱉듯 넘어가는 쉼표에서 곡절의 삶과 힘든 하루의 끝이 느껴지나요? 이처럼 고된 하루의 마지막은 서로의 발잔등이 부었다며 보듬어주는 것이었습니다. 할머니는 소에게 있지도 않은 발잔등을 쓰다듬어주고 싶을 만큼 안쓰러웠던 것이지요. 하지만 소도 역시 할머니의 부은 발잔등이 안쓰럽기는 마찬가지입니다. 할머니와 소, 그 풍경을 뒤로 한 채 하루가 저물어갑니다. 하지만 그 하루의 “적막”함마저 할머니와 소는 “서로” 나누고 있네요. 이 절제된 시 안에서 김종삼 시인은 “서로”라는 시어를 두 번이나 쓰게 됩니다. 그만큼 할머니와 소 사이에는 둘만의 언어가 여백처럼 흐르고 있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었던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어떤가요? 김종삼 시인의 시 <묵화>는 눈 앞에 보이는 풍경을 그대로 묘사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화려한 수식이나 꾸밈 하나 없이 가장 동양적인 수묵화를 그려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시에서 어떤 풍경이 떠오르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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