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문현식
비밀번호
-문현식
우리 집 비밀번호
□□□□□□□
누르는 소리로 알아요
□□□ □□□□는 엄마
□□ □□□ □□는 아빠
□□□□ □□□는 누나
할머니는
□ □ □ □
□ □ □
제일 천천히 눌러도
제일 빨리 나를 부르던
이제 기억으로만 남은 소리
보 고 싶 은
할 머 니
그리움이라는 단어는 때로는 따뜻하고, 때로는 외롭습니다. 문현식 시인의 동시 <비밀번호>는 보고 싶은 할머니를 그리워하며 쓴 작품입니다. 문현식 시인은 1974년생으로, 시집 《팝콘 교실》(2014)에 이 시를 수록했지요. 여러분에게 보고 싶다는 감정은 어떤 것인가요? 그리고 아이들에게 그리움이란 어떤 것일까요? 시 속에서 이야기하는 사람(시적화자)은 엄마, 아빠, 누나와 살고 있는 남자아이입니다. 아이는 할머니와도 함께 살았지만, 지금은 계시지 않습니다.
시 속의 아이는 이제 할머니를 현관문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로만 추억하고 있습니다. 다르게 말하면, 현관문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아이는 할머니가 보고싶습니다.
시의 처음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우리 집 비밀번호/□□□□□□□” 아이의 집 비밀번호는 일곱 자리이군요.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만 들어도 아이는 누가 들어오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가족마다 누르는 소리가 다르다고 이야기합니다.
“누르는 소리로 알아요/□□□ □□□□는 엄마/□□ □□□ □□는 아빠/□□□□ □□□는 누나”
가족들마다 리듬을 가지고 있습니다. 엄마와 아빠, 누나는 모두 각자의 리듬으로 비밀번호를 누릅니다. 아이는 그 리듬만으로도 누구인지 아는 것이죠. 할머니의 리듬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할머니의 리듬은 가족들과는 사뭇 다릅니다. 숫자판을 의미하는 ‘□’가 다른 가족과 달리 많이 떨어져 있네요. 할머니가 숫자를 누르는 시간이 더디다는 뜻일 겁니다. 그리고 아이는 말하죠. “제일 천천히 눌러도/제일 빨리 나를 부르던/이제 기억으로만 남은 소리”라고요. 할머니가 비밀번호를 누르는 시간은 가족 중에서 가장 느립니다. 그러나 아이는 그 소리를 듣고 가장 먼저 현관문으로 달려갔습니다. 아이에겐 “제일 빨리 나를 부르던” 소리였기 때문입니다. 누구보다도 가장 할머니를 반긴 것을 보니 아이는 할머니와 함께한 시간이 소중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 할머니가 이제는 가족 곁에 없습니다. 그리고 아이는 할머니가 누른 비밀번호의 리듬에 맞추어 그리움을 노래합니다.
보 고 싶 은
할 머 니
마지막 연은 우리에게 큰 울림을 줍니다. 어떤 말보다 그리움의 감정을 잘 표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시에서 감정을 직접 드러내기보다 감정을 표현해줄 대상을 찾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은유라고 말합니다. 이 시가 울림을 주는 이유도 은유에 있습니다. “할머니 보고싶어요”라고 말하지 않고, 할머니가 눌렀던 비밀번호의 리듬에 맞춰 “보 고 싶 은/할 머 니”라고 이야기합니다. 비밀번호는 할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가장 잘 표현해줄 대상이었던 것이지요. 시라는 세계 안에서 표현되는 감정은 일상과는 많이 다르지요? 누구나 느끼는 그리움의 감정도 시라는 형식을 통해서 보면 새롭고 놀랍기만 합니다. 이것이 시가 우리에게 주는 선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