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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민 Aug 13. 2021

노모의 야바위 경험담

드디어 은퇴 후 가장 우선적으로 할 일을 찾다

요즈음 구순 노모의 큰 즐거움 중 하나는 미국에서 카톡으로 보내오는 오빠 손주들의 사진과 동영상을 보는 것이다. 노모의 증손주들이다. 핸드폰 작은 화면 속의 사진과 동영상이 노모의 눈에 시원찮게 보일 텐데, 아이들의 변화와 몸짓, 표정 등에 대한 노모의 코멘트는 젊은 우리가 미처 보지 못하는 것들이다.


“뭘 먹여 이렇게 토실토실 살이 올랐을꼬... 에미 힘들겠네”

“이제 인물이 나기 시작하네”

“입가를 좀 닦아줘야지...”

“아이고 할아버지 힘 다 빠지게... 저 녀석 보게. 신이 났네”    

 

그날도 오빠가 보내 준 카톡 속 손주들의 사진을 노모와 함께 보았다. 이미 함께 사는 동생이랑 본 것들이지만, 다시 보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다. 올해 태어난 둘째 증손녀의 모유 먹는 모습을 보더니, 갑자기 노모의 옛날이야기가 시작되었다.         

           


"너희 키울 때는 분유라는 것이 없었어.


너 낳고 니네 할머니는 또 딸 낳았다고 보러 오시지 않고, 대신 ***네 엄마를 보냈는데, 이틀 산바라지 해주고 휙 가버리더군.      


젖이 적으니 양이 차지 않아, 니가 빽빽 울어대더라고. 아무리 빨아도 젖이 안 나오니 성질이 난거지.

도와줄 사람이 없으니까, 하는 수 없이 애 낳고 사흘 만에 자리 털고 나와 숯불을 피워 흰 죽을 끓였지.


막내 빼고 너희 넷 모두 흰 죽 끓여, 채에 바쳐 내려서 거기에 연유 조금 넣어 먹였어.

당시 일제 연유였는데 엄청 비샀어.

다른 사람들은 설탕 넣어 먹였는데 그때도 내 생각에 설탕이 몸에 좋지 않을 거 같더라고...”     


여기까지 말을 하던 노모는 갑자기 박장대소하며 웃음을 참지 못하고 웃어 젖혔다. 자신이 민망했던 것을 이야기하려고 할 때 하는 노모의 버릇이다.     


"내가 처음 말하는 건데, 내 평생 처음으로 야바위를 해봤어. (또다시 박장대소를 했다)     

당시 연유가 일제니까, 무척 비쌌는데 도저히 너희 아버지한테 연유 산다고 돈 달라고 못하겠더라고.

연속으로 딸을 낳았으니... 한 달 생활비로 연유를 사기에는 빠듯했고...


불현듯 매일 장에 가면서 본 장 입구에 야바위꾼 생각이 나더라고.

몇 번 눈여겨본 적이 있는데 쉽게 알아맞출 수 있겠다 생각했거든.

그날 장에 가면서 야바위꾼들한테 돈을 따서 연유를 사야겠다고 맘먹고 집을 나섰지.


젊은 아낙이 부끄러운지도 모르고 야바위를 했는데, 글쎄 돈을 털려버렸어.

그날 저녁 찬거리를 사려고 가져간 돈을 다 날려버린 거지.

다 한 통속이라는 거는 나중에야 알았지..."                                  




노모는 중간중간 손뼉을 치고 눈물을 찔금거리며 숨이 넘어가듯 소리 높여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날 엄마의 이야기보따리는 무궁무진하게 펼쳐질 기세였다. 하지만 잠시 짬을 내어 방문한 거라 오래 머물 수 없었다. 아쉬움을 뒤로한 채 귀가하는 차 안에서 생각이 많아졌다.


구십 평생 입에 처음 내어보는 이야기가 있는 엄마의 삶에 대해 내가 모르는 것이 많구나 싶었다. 딸과 엄마로 60년을 살아왔는데 내 생활이 바빠, 엄마의 삶이 어떠했는지, 어떤 이야기가 있는지, 귀 기울이는 노력을 한 적이 없었다.


엄마의 어린 시절에 꿈은 무엇이었는지, 아버지와 결혼은 어떻게 하게 되었는지, 엄마의 엄마는 어떤 분이었는지, 엄마의 형제들과는 어떤 추억이 있는지, 언제 가장 행복했는지...      


은퇴 이후 가장 우선적으로 할 일이 생겼다. 은퇴하면 바로 몇 년간은 여유 있게 엄마의 이야기보따리를 펼쳐보도록 해야겠다. 자신의 이야기를 누군가가 귀담아 들어준다면, 분명 행복해질 것이기 때문이다.(2021.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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