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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엔 샀다, 그리고 닦았다

이것은 내 기타를 향한 첫 의식

by 피터의펜

결국엔 샀다, 그리고 닦았다

사장님의 치밀한 계획 덕분에 나는 다행히 기타 없이 기타를 시작할 수 있었다. 시식 코너에서 맛을 보듯, 영화를 보기 전 미리 보기 3분을 누리듯, 단돈 3만 5천 원의 수강료로 현악기의 세계에 먼저 발을 담갔다. 아마 기타를 먼저 사야만 시작할 수 있었다면 나는 여전히 망설이며 그 앞을 서성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막상 시작하고 보니 흥겨움이 내 주위에 가득해졌다.


아침엔 출근길 버스 안에서 이어폰 너머 기타 반주에 몸을 까딱이고 점심시간엔 건강을 핑계로 견과류와 샐러드로 끼니를 때우며 혼자 음악 들으며 웃는다. 저녁엔 넷플릭스 대신 기타 유튜브 영상으로 감탄하고 "아, 나도 저렇게 치고 싶다"는 다짐으로 잠자리에 든다.


기타는 여전히 내 것이 아니지만 이미 내 하루엔 깊숙이 들어와 있었다. 그리고 갈수록 내 기타를 갖고 싶다는 마음이 커져갔다. 반복된 연습이 있어야 실력이 는다는 건 세계 공통의 이치 아니던가.


마음 같아선 당장 사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은... 카드값.

카드사는 하루가 멀다 하고 나에게 한도를 늘려주겠다는 달콤한 제안을 보내왔다. 그러면서도 꼭, "과도한 빚은 당신에게 고통을 안겨줄 수 있습니다" 작은 글씨로 경고도 빼놓지 않는다.


그렇다. 마음의 여유는 생겼지만 금전적 압박은 여전했다.


그래서 일단 하이엔드 기타는 제외. 대충 검색만 해도 3~400만 원대. 나랑 어울리지도 않는 과한 색감과 부담되는 장식들. 아니, 절대로 돈 때문이 아니라 그건 내 취향이 아니라며 스스로를 타일렀다. 그리고 빠르게 창을 닫았다.


200만 원? 애들의 반년치 학원비다.
100만 원? 나 혼자를 위해서는 사치다.
적어도 비틀스 친필 사인이라도 박혀 있어야 고민이라도 해보지.


기타는 아니지만 몇 해 전 아이들의 바이올린을 사려고 전문 악기점을 찾았던 기억이 있다. 줄이 자주 끊어지고 나무 넥이 부러지기도 했던 그 악기. 결국 오프라인에서 산 게 훨씬 나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격도 오프라인이나 온라인이나 큰 차이 없었고 무엇보다 '수리와 애프터서비스'는 확실히 중요했다. 그래서 이번에도 마음은 정해져 있었다.


가격 비교는 온라인으로 하되 결국 살 땐 오프라인에서 내 손으로 직접 고르자고.


"오늘은 수업 아닌데 왜 오셨어요?"

"아, 사장님. 오늘은 기타 좀 다시 보려고요. 그냥... 먼저 살까 해서요."

...


"얼마 생각하고 계세요? 아니, 내가 왜 물어보냐면... 좋은 놈 하나 있어서 그래요."


그 순간부터 나는 머릿속 수싸움을 시작했다.


300만 원은 오디션 나갈 것도 아닌데 과하다.
200만 원? 당장 먹고살 돈도 없는데 무리다.
100만 원이라면? 사장님이 199만 원짜리를 권할 것 같아 불안하다.
99만 원이라 하면? 진지하지 않은 사람처럼 보일 것 같다.

그래서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말했다.


"음... 한 50만 원 정도요."

"아이, 잘됐네. 이리 들어와 보세요."


그렇게 안내받은 작업실. 벽엔 공구, 케이스, 기타 줄, 여분의 기타들이 가득했다. 그야말로 사장님의 비밀 기지. 그곳에서 꺼내온 기타는 내가 지난번 점찍어 두었던 그 자개 장식이 들어간 예쁜 기타와 비슷한 것이었다.


"이거, 55만 원에 드릴게요. 가방이랑 사은품은 새 걸로 좋은 걸 넣어드릴게요."

"네? 이건 무슨 기타예요?"

"250만 원 주고 우리 회원이 샀던 거예요. 그런데 못 치겠다며 팔아 달라고 해서요. 그것도 제가 만든 겁니다. 믿고 사세요. 절대 후회 안 해요."


망설였다.

원래 중고 기타도 괜찮다고 생각하긴 했다.

그런데 막상 눈앞에 오니...


'이게 그 가격에 맞는 물건일까'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렇다고 사장님을 의심할 것도 아니다. 이 사람 덕분에 내가 기타를 시작했고 지금 이 자리에 온 거니까. 무엇보다 관상이 사기꾼은 아니다. 내가 관상가는 아니지만 40년을 살아오며 누적된 데이터를 활용해 보면 그렇다.


그래서 그냥 질러버렸다.


"네, 그렇게 할게요. 3개월 할부로 해주세요.

저기... 농협카드인데, 무이자 되죠?"


말 그대로 한순간에 드디어 내 기타가 생겼다.

집에 와서 꺼내 보니, 생각보다 더 예쁘고, 더 단단했다.

앰프 연결 단자도 달려 있어서 언젠가 공연을 하게 될 날이 오면 딱 이거면 되겠구나 싶었다.
나에게는 충분히 '하이엔드'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오늘부터는 집에서도 연습을 할 수 있다.

어쩐지 실력이 하루 만에 쑥쑥 늘 것 같은 근거 없는 자신감도 생긴다.


누군가의 손때가 묻은 기타.

나는 조심스럽게 항균 성분 들어 있는 물티슈로 정성껏 닦았다.


나는 기타에게,

붙박이장 밖 세상이 이렇게 빛난다는 걸 보여줬고,


기타는 나에게

처음으로 '소유권'이라는

기쁜 감각을 안겨줬다.



거실에서 가장 손이 잘 닿는 곳에 그렇게 조심히 눕혀두었다. 언제든 코드를 하나라도 더 잡아보려 한다.


"사장님은 역시 다 계획이 있었구나."


그래도 괜찮다.
이만하면, 아주 잘 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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