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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끝이 나를 가르친다

짧고, 굵고, 둔하지만… 나는 친다

by 피터의펜

한동안은 손끝 물집 때문에 꽤 고생을 했다. 기구를 세게 잡다가 굳은살이 생긴 적은 많았지만 손끝에 회초리라도 맞은 듯 자국이 선명하게 파이고 퉁퉁 붓기까지 한 건 그야말로 처음이었다.


그저 기타 한 번 잡았을 뿐인데,

이토록 아플 수 있다니.

그땐 정말, 매일이 고통이었다.


손가락 끝을 찌르듯 올라오는 뻐근한 통증이 문득문득 내 인내심을 확인이라도 하듯 튀어 올랐다. 그렇다고 내가 하루 종일 기타만 친 것도 아니었다.


열심히 쳤다고는 하지만 생업을 제쳐두고 몰입할 정도로 집중한 건 절대 아니다. 나란 사람의 집중력은 길어야 30분 남짓이다.


그 이상 기타를 잡고 있는 건... 솔직히 말해 불가능하다. 그러니까 하루에 고작 30분씩 많아야 두세 번 쳤을 뿐인데 이렇게 손끝이 헐고, 물집이 생기고, 쓰라릴 정도라니...


나는 어쩌면 태생적으로 허약한 손가락을 타고난 건지도 모르겠다. 두 번째 수업 때, 선생님이 나를 보더니 딱 잘라 말했다.


"힘 좀 빼요. 그냥 살살 잡아도 돼요."
"굳은살 생기고 물집 잡히는 건... 코드를 정확히 못 잡아서 그래요."


그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 나는 그동안 손끝이 갈라지고 물집이 올라오는 걸 어떤 '통과의례'쯤으로 여겨왔다. 마치 애벌레가 허물을 벗고 나비가 되듯 고통을 견디고 나야 멋진 연주자가 될 수 있을 거라 착각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기타를 잘 치기 위해선 당연히 아파야 한다고 믿었던 거다. 순전히, 내 착각이었다.


"퉁퉁퉁~"

선생님은 아무 말 없이 내 손을 조심스레 잡고 코드를 정확한 위치에 얹어줬다.


"여기, 프렛 위에 손끝을 살짝만 올려놔도 소리가 나잖아요."
"불필요하게 세게 누르지 말고 정확한 자리를 익히는 게 더 중요해요."


말이 떨어지자마자 내 기타에서 울린 소리는 지금껏 내가 낸 것과는 전혀 달랐다.


깔끔하고,

묵직하고,

또렷했다.


'아, 이게 힘을 뺀 소리구나. 세게 누르는 게 아니라, 제자리를 찾아야 하는 거였구나'. 그제야 조금 이해가 됐다. 기타는 '힘'으로 치는 게 아니라 '자리'로 치는 거라는 걸.


그런데 이상하게 요즘 들어 내 손가락을 자꾸 원망하게 된다.


그러면서 문득,

내가 원래 내 몸에 대해서는 꽤나 관대한 사람이었다는 걸 떠올렸다.


신이 나에게 변우석 같은 190cm 키를 주지 않았어도 나는 불평 한 마디 안 했다. 시력이 독수리만큼 좋지 않아도 그저 안경 끼면 된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우사인 볼트처럼 빠르지 않아도 버스 놓치지 않을 만큼만 달리면 충분하다고 여겼다.


그러니까 나는 내 몸에 대해 크게 기대하지도, 크게 실망하지도 않으며 살아왔던 사람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조금 서운하다.


이놈의 손가락이 쓸데없이 짧고, 또 굵다. 그래서 기타 줄을 누르려면 손끝을 치켜세워야 하는데 그게, 생각보다 너무 어렵다.


아프기도 하고, 안 닿기도 하고, 그러다 보면 어느새 다른 줄까지 눌러서 소리가 이상해진다. 지금도 손끝이 욱신거린다. 연습을 마친 뒤 한참을 쉬어도 자꾸만 그 부위가 다시 뜨거워진다.


하지만 그렇다고 또 쉴 수는 없다. 이제 겨우 기타를 배우기 시작한 마당에 또 무슨 핑계를 붙여 손을 놓으려고? 내가 나 자신에게 실망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소림사 수련하듯 "딱 30분만"을 되뇌며 손끝의 고통을 참는다.


그리고 선생님 말대로 그 시간 동안엔 힘을 빼고 제자리에 살짝 올려두는 연습을 한다.


소리는 조금씩 달라진다.

내 손가락이 아직 서툴 뿐 기타는 생각보다 훨씬 친절한 악기라는 걸 알게 됐다. 그런데 짧고 굵은 것도 서럽지만 이 손가락들... 참, 둔하다. 반응도 느리고 기억력도 없다. 분명 방금 배운 코든데 5분만 지나면 다시 헷갈린다.


생각해 보면 왼손을 이렇게 따로 써본 적이 거의 없었다. 피아노를 잠깐 배우긴 했지만 그건 한참 전 일이고 그 이후로는 그냥 책상에 엎드릴 때 왼손을 '배게'처럼 쓰는 게 전부였다. 리코더? 단소? 그 정도나 다뤄봤을까. 그것도 두 손 같이 써야 했으니 왼손만 쓰는 건, 지금이 처음이다.


이제 와서 그런 손가락에게 정확한 코드 잡으라고 시키고 있으니 얼마나 당황스럽겠나.


나도, 손가락도, 둘 다 벅차다.

그래도 치고, 또 친다.
손끝이 이렇게 아파도, 멈출 수 없다.

아무리 둔한 손가락이라도 자꾸 치다 보면, 언젠간 따라올 거라 믿는다. 게다가 3일 뒤면 숙제 검사도 있다. 처음으로 코드 보여주는 날인데 내가 빠질 수는 없다. 내가 늦게 시작한 만큼 더 열심히 해야 한다.


그동안 미루고, 망설이고,
이유 없이 흘려보냈던 세월에 비하면
이 정도 아픔쯤이야.

정말 아무것도 아니다.


지금도 손끝이 나를 가르친다.

아프지만, 확실하게 알려준다.


20250906_181544.jpg


어디가 틀렸고,
어디를 바꿔야 하고,
어떻게 힘을 빼야 하는지를


이 손끝이

기타보다 먼저 나를 훈련시키고 있다.

아직도 짧고, 굵고, 둔하지만

나는 친다.
오늘도, 기타를 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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