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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헨리포터 Oct 19. 2020

'볼 수 있는 것'이 많아서 좋겠다

누구 들으라고 하는 얘기는 아니고 그저 허공에 대고 내뱉는 독백이다. 푸념이나 신세한탄 아닌데 그렇다고 시기나 질투도 아니다. 그저 이런 좋은 시대를 살고 이는 너희가 부워서 그래. 려서 아빠가 일본으로 출장을 다녀오면서 떼 깔 좋은 비디오 플레이어를 하나 사 오셨는데, 내가 제법 클 때까지도 티비장의 센터 자리를 떡하니 차지하고 있었으니 정말 오래도록 함께 했다. 


정확히 내가 몇 살 때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느 날 엄마는 마치 보물이라도 찾은 듯 들뜬 얼굴로 내게 빨리 옷을 입으라며 보챘는데, 그때까지영문도 모른 채 시키는 대로 했다.


"아들, 빨리 옷 입어 지금 엄마랑 어디 좀 같이 가자."

"어딜 가길래 그래요?"

"일단 가서 보자. 빨리. 빨리"


도착한 곳은 단지 내 상가 2층에 있는 비디오 가게였는데, 알고 보니 그 옆에서 옷수선집을 운영하는 엄마 친구분의 제보(?)로 그리도 급하게 나를 이끌었던 것이다. 미래소년 코난의 복사본 거기에 있었고, 테이프 값에 얼마를 더 얹으 구할 수 있었다. 일단 그 당시는 코난이라는 애가 누군지도 몰랐고, 미래소년이라는데 미래가 무언지도 몰랐는데 그저 무언가 볼 것이 생긴 그 자체가 너무 기뻤다.


지금이야 그저 손쉽게 복사와 붙여 넣기를 하지면 그만이지만 '라떼 말이야' 비디오 하나를 복사하려면 온전히 러닝타임을 기다려야 했고, 그나마도 2배속을 지원해주면 다행이었다. 동네 사람들이 모두 몰려서 줄이라도 서게 되면 지루하고 골치 아픈 상황은 불 보듯 뻔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마도 옆에서 열심히 재봉틀 돌리던 그 아주머니의 제보는 그런 필요한 상황을 방지하고자 도움을 주셨던 것이다.


"지금 비디오 가게에 사람 없어!!"


그분의 도움으로 나는 바로 비디오테이프 받아 들 수 있었고 그날부터 시작해서 테이프가 구간구간 늘어질 때까지 보고 또 보며 코난 행세를 하는 재미에 푹 빠져 보냈다.


기다리던 사람이 정말로 없다는 사실을 알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뿌듯해하던 그 상황은 아직도 진한 여운으로 남는다.  아빠가 되어보니 그 기분을 정확히 안다. 이제는 대부분의 물건이 하루 배송되고, 그마저도 어떤 것은 아침 일찍 주문하면 저녁에 받아볼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좋은 시대임에도 어쩔 때는 고작 10시간 남짓 그 시간을 우리 아이들이 기다려주지 않는다.


그런 아이들이 야속할 때도 있지만 그래도 빨리 줄 수 있어 다행이다. 아마도 재봉틀 집 아주머니가 바쁘게 전화를 하셨던 이유나 앞뒤 제쳐두고 바쁘게 향하던 우리 엄마나 결국 목적과 목표는 기다림 없이 바로 제품을 손에 넣는 것이었을 테고, 커보니 마음이 더욱 따스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2020년을 살고 있는 우리 아이들에게 아마도 이제는 더 이상 이런 고생스러운 추억은 없지 않을까. 티비를 틀면 하루 종일 볼 것이 넘쳐나고, 시간 맞출 필요도 없이 간편하게 다시 보기도 가능하다.


포켓몬스터나 카봇처럼 애들이 좋아하는 만화를 처음에는 곁눈질로 보다가 어느 순간부터 나도 그냥 대놓고 보게 된다. 정말 재밌다. 근데 더 황당한 것은 이건 월정액에 포함된 그저 무수히 많은 볼 것 중에서 한두 개 일 뿐이다. 시리즈까지 구분한다면 선택의 폭은 더 넓어진다. 비디오 한두 개를 보고 또 보던 나와는 달라도 너무 다른 시대다. 그럼에도 이런 호사를 아는지 모르는지 우리 아이들은 여전히 볼 것 없다며 불평이다.


물론 어쩔 때는 기왕 보는 만화 디즈니 봤으면 좋겠고, 기왕 보는 거 영어로 보면 더 좋겠고, 기왕 보는 거 자막 없이 보면 더더 좋겠지만 욕심 덕지덕지 붙은 내 마음일 뿐이다. 그저 원하는 것들 집에서 볼 수 있는 이 시대가 나는 감사하다. 공부는 잠시 접어두고 재미난 거 많이 보자. 어차피 오늘 주말이잖아. 


아니. 사실은 내가 좋다. 세상이 이리도 많이 변했는데, 보고 싶은 거 보면서 깔깔거리고 웃는 모습 보며 뿌듯해하는 이 마음은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나 보다.


....


아무리 그래도 너무 최신은 말고, 웬만하면 월정액에 포함된 시리즈 중에서 골라주면 안 되겠니? 그럼 더 고맙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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