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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헨리포터 Oct 25. 2020

머그 하나만

하나 둘 들여오다 보니 어느 순간 여섯 개까지 늘어났다. 11년을 여섯으로 나누면 2년에 하나꼴로 새로 생겨났으니 그리 심각한 수준은 아닌 듯. 그리고 그들은 구석에 처박혀서 공간을 차지하거나 쓰레기 같은 몰골로 그 공간에 어두운 기운을 내뿜는 것도 아니고 그저 말끔하고 우아한 자태 뽐내며 각자의 위치에서 맡은 바 역할을 다하고 있으니 활용도도 우수하지 않은가. 하나는 박람회에 가서 경품으로 받았고 다른 하나는 건강식 열풍이 한창일 때 빅사이즈로 장만했다. 그리고 나머지 것들은 스타벅스에서 데려왔거나 맥도날드에서 받은 유리컵이다.


세어보니 스타벅스에서는  개를 가져왔다. 내가 커피맛에 대한 유별난 통찰이 있다거나 커피라는 그 분야에 조예 깊은 사람은 아니지만 자주 가긴 한다. 나는 그저 가슴속까지 뻥 뚫리는 시원한 한잔이나 향기 가득한 뜨거운 커피 한잔의 여유를 즐길 뿐이다. 얼마 전만 해도 길거리에 무수히 많은 커피 브랜드도 이제는 모두 사라진 듯하다. 그렇다고 내가 특정 브랜드의 커피만 추구하던 사람도 아니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스타벅스가 좀 특별한 것은 사실이고 우리 같은 사람에게 주는 의미가  다른 것도 사실이다. 아마도 그 시작은 사이렌 오더였을 것이다. 커피 한잔을 결제한 뒤에 내리고 담고 어쩌고 하다 보면 족히 10분은 걸리는데 먼저 온 사람이라도 줄 서서 기다리고 있으면 내 차례는 한없이 뒤로 밀린다. 1분 1초가 소중한 아침시간에 나보다 일찍 왔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의 커피 내리는 그 시간을 내가 기다린다는 것은 너무나 억울하다. 대략 1km 이전 지점부터 주문하며 걸어가면 얼추 나오는 시간과 비슷하다. 가는 길에 잠시 들러서 들고 그저 유유히 떠나면 그만이다. 그러다 보니 매일을 먹지는 않아도 1주일에 한두 번은 꾸준히 가게 되었고, 그 기분을 오후에 사무실에서도 느끼려는 목적에서 스타벅스 스틱커피와 머그컵을 가져온 것이 벌써 세 개가 돼버렸다. 정확히 말하면 머그컵은 한 개고, 텀블러와 유리 보틀이 하나씩이다


하나는 대략 400ml 되는 스테인리스 텀블러고 다른 하나는 뚜껑 달려있는 유리병인데 쓰임새는 서로 다르다. 최근에 환경에 대한 인식이 전반적으로 높아지고 있는데 나는 그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환경을 아끼고 보호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스테인리스 텀블러를 하나 장만했고 꽤나 오랜 시간 동안 함께 해오고 있다. 자리에서야 머그컵에 먹는다 치더라도 회의실로 움직여야 할 때는 텀블러 만한 것이 없다. 플라스틱도 아니고 스테인리스로 만들어져서 너무 뜨겁지만 않다면 들고 다니기도 좋고 덩달아 남들과 비교해서 일회용품을 하루한 번은 덜 썼으니 스스로도 만족스럽다.


유리 재질은 스타벅스 유리병과 맥도날드에서 받은 유리컵을 가지고 있는데 사실 코카콜라컵은 오자마자 연필꽂이로 활용했다. 유리가 너무 얇아서 물 뜨러 이리저리 들고 움직이기에 안 좋긴 해도 그 자체는 모양이 그럴싸해서 플러스펜 몇 자루 꽂아두면 감각적으로 공간이 변한다. 스타벅스에서 산 유리병은 회사에서 내가 가장 잘 활용하던 물품이기도 한데, 지금까지도 가장 많이 그리고 자주 쓰고 있다. 주둥이가 좁아서 닦기가 힘들 때도 있지만 매일같이 젖병 닦으며 애를 둘이나 키워낸 내가 이까짓 유리병 하나 못 닦을 이유가 없다.


안타깝지만 박람회에서 받아온 그 머그컵에는 다른 회사의 로고가 붙어있고 별다른 애착이나 연결고리도 없다. 그저 받아온 날부터 지금까지 로고를 뒤로 돌려 안 보이게 위치시키고 온갖 잡동사니를 넣는 수납함 정도로 써왔는데 어쩔 때는 무선 마우스에 넣고 남은 배터리를 보관하기도 했고, 때론 연필꽂이로 때로는 치약과 칫솔을 담아두는 보관함 정도로만 써왔다. 그러다 보니 머그컵이라는 그 이름이 무색해질 때가 오히려 더 많았다. 어디서 샀는지 기억조차 없는 그 빅사이즈 머그컵도 마찬가지로 점심을 그대들과 함께 먹으러 가지 않겠다고 선언한 그날부터 그레놀라를 우유에 말아먹는 용도로 썼을 뿐이다. 어쩌면 진짜로 무언가를 말아먹기 편해서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기보다는 먹을거리를 싸왔으니 더 이상 나에게 점심을 왜 안 먹고 굶고 있냐는 질문을 하지 말아 달라는 일종의 보여주기 위한 목적으로 잘 보이는 그 위치에 둔 것은 아니었을까 생각도 든다.


함께 한 세월만큼이나 이야깃거리는 많겠지만 구구절절한 사연을 머금고 있는 이 머그컵들을 이제는 정리할 때가 온 것 같다. 책상 정리 말고 머그컵 정리 말이다. 들여올 때야 목적이 서로 다르고 필요한 이유가 있었지만 11년의 세월이 지나며 이제는 처음에 그 목적과 르게 쓰이는 것들이 보인다. 내 책상의 미니멀 라이프를 찾아주기 위해 머그컵 먼저 시작하고자 마음먹었지만, 머그컵에 귀천이 있으랴, 그것들이 내게 모두 소중했다는 것은 분명히 해두자.


머그컵의 목적인 무언가를 마시는 용도로 안 쓰고 있는 박람회에서 데려온 컵이나 맥도날드 유리컵을 먼저 솎아냈다. 빅사이즈 머그컵도 마찬가지로 이제는 내가 더 이상 그레놀라를 먹는다든지 점심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렸을 때 쭈뼛쭈뼛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세상이 많이 변했다. 이것도 여기까지다. 어찌 버릴까 고민 고민하다가 사무실 쓰레기통은 분리수거가 제대로 되지 않을 것 같아서 집으로 가져온 뒤 유리 수거함에 고이 보내주었다.


분명 내 책상에 그리고 서랍에 있던 컵들은 모두 귀하지만 우연처럼 먼저 버려진 컵들은 메이커가 누군지를 모르는 녀석들이었다. 남은 컵은 스타벅스 머그컵과 유리병 그리고 스테인리스 텀블러인데 어차피 커피를 마시든 차를 우려서 마시든 아니면 물을 벌컥벌컥 들이기든 어느 것으로나 가능하기 때문에 이 중 하나만 남기기로 결정했다. 그중에서 스테인리스 텀블러는 튼튼한 만큼 거칠게 다룬 탓인지 이리저리 쓸리고 부딪히며 찌그러진 채로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함께 회의실 다니며 홀짝홀짝 마시던 내 모습이 떠 오르긴 했어도 뭐 별수 없이 이것도 분리수거다. 남은 두 개는 머그잔과 유리병인데 닦기는 귀찮아도 쓰임새는 분명 유리병이 더 좋다. 유리도 두껍게 만들어진 덕에 이리저리 들고 다녀도 부담이 없다. 물도 마실 수 있고, 티를 우려내기도 좋을뿐더러 요즘 같은 시기에 비말 차단을 목적으로 뚜껑도 잠글 수 있으니 내 입장에서는 더 생각할 것도 없이 '원픽'이다. 이로써 머그 정리는 끝. 일단 출발은 좋다.

스타벅스 머그컵은 집으로 가져와서 물컵으로 쓰고 있다. 모양도 이쁘고 이렇듯 활용도 좋은데 굳이 버릴 필요는 없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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