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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헨리포터 Oct 27. 2020

이번엔 뭐 살까? 그러다 쌓였다.

어떠한 기관이나 단체에서, 전체적이며 일반적인 사무 또는 그것을 맡아보는 사람을 일컬어 우리는 '총무'라고 한다. 이미 대학 동아리나 동호회 같은 다양한 모임에서 총무라는 역할을 경험해서 알겠지만 그 역할이 사실은 별 볼 일 없다. 회장도 아니고 반장도 아닌 그저 총무를 하고 싶어 할 리 없는 것도 당연하다. 하지만 그 역할이어쩔때는 재밌. 배정된 예산을 내 의도에 맞춰서 집행하거나 내 취향을 한껏 반영하며 운용할 수 있는 점이 그랬는데 별건 아니지만 그 재미없는 공간에서 이런저런 즐거움이라도 찾으며 살아야지 별수 있어?


어릴 적을 떠올려보면 필통에 이것저것 빼곡하게 채우며 다닐 때 소소한 뿌듯함을 느끼곤 했는데, 아마도 내가 이런 문구류를 모으거나 풍족하게 가짐으로써 얻는 즐거움이 기본적으로 있었나 보다. 그때는 필요한 것이 많아도 용돈은 항상 정해져 있었으니깐 맘대로 살 수가 없었겠지만 지금은 필요한 것들을 살 수 있잖아? 그것도 회사의 예산을 공식적으로 집행하는 범위에서 말이다.


품목에 대한 선택권이나 구매에 대한 결정을 내가 하다 보니 나의 취향저격 사무용품들이 내 책상 곳곳에 많아지게 된 것은 어찌 보면 너무도 당연하다. 굳이 수집 욕구까진 없더라도 사람들이 별 관심 안 갖다 보니 자연스럽게 내 책상에 온갖 아이템들이 머무르게 되었고, 그 이후로 팀 사람들이 여럿 바뀌고 팀장도 바뀌고 그리고 이번엔 내가 팀을 바꾸는 여러 번의 물리적인 변화를 겪으면서 그 많은 용품들이 기억에서 잊힌 채 내 책상의 어딘가로 숨어들었다. 마치 언젠가는 다시 만날 그날을 기다리는 망부석처럼 한번 잡힌 자리는 바뀌지 않고 먼지만 쌓여간다. 낭비나 과소비의 관점에서 불필요한 물건들을 산 것도 아니고, 구매 요구가 전무한 상황에서 주도적으로 팀의 살림을 책임지다 보니, 말일부로 사라질 예산이 아까워 뭐라도 사야 했고 그러다 보니 이것저것 골라 담았을 뿐이다.


사실 10여 년 전만 해도 이런 것들이 모두 엄청나게 쓸모가 있었고, 너도나도 공용물품이 아닌 자기 책상 위에 하나쯤 두고 싶어 했다. 한때는 예산을 휘두르는 총무의 그럴싸한 권한 때문에 자기 것을 먼저 사달라며 은밀하게 사내 메신저로 요청하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물론 그때는 무언가 보람을 느끼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는 사무실에 서류를 주고받는 일 마저 사라져 버렸고 더 이상 좋은 펜이나 화이트처럼 문구류를 예전만큼 필요로 하지도 않는다. 물론 언제부터인지 나도 심플한 장비만을 갖추는 게 더 좋아지고 있다. 플러스펜에 손바닥만 한 노란색 노트만을 필요로 할 뿐 나머지는 내게 그저 철 지난 물건들같이 이젠 별 감흥이 없는데, 나도 나이가 들면서 변했겠지만 아마도 세상이 그렇게나 빨리 변해버린 건 아닐까.


최근 몇 달간 나도 별다른 주문을 넣지 않고 있음은 물론 돈이 남아도 굳이 새롭게 살 필요가 없다고 느낀다. 책상 한편에 잔뜩 쌓여있는 나의 필기구들 중 대다수는 어쩌면 잉크가 이미 말라버린 채로 그저 관상용이 되어 자리 나 차지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제법 커다란 크기의 둥그런 연필꽂이 하나로는 몇 년 전부터 이 많은 양을 전부 담아내지 못해 머그컵에 그 역할을 나누었음에도 이제는 그것마저 모자라 서랍으로 일부 들어가 있으니 많긴 많나 보다. 펀치는 세 개나 있고 스테이플러 심을 뽑아내는 제침기도 성능 좋은 놈으로 미개봉 제품이 무려 두 개나 되는데 이제는 쓸 일이 없어 보인다. 예전 팀에서 총무 할 때부터 가지고 있던 것이다 보니 족히 5년 동안은 내가 처다도 안 본 물건들이다.


뿐만 아니라 나를 막아주고 가려주는 칸막이에는 개당 5천 원씩이나 하던 초강력 자석부터 둥근 머리 자석이 색깔별로 붙어 있는데,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서류들을 종류별로 클립으로 집어서 자석 위에 붙여두며 걸어두며 살았다. 윗사람이 내게 무엇이든 물어보기만 하면 마치 그 질문이 올 것을 예상이라도 했던 것처럼 벽에 붙여둔 문서를 꺼내보여 주면 스스로 일을 잘하는 것 마냥 뿌듯하던 시절도 분명히 있었다. 하지만 불과 몇 년 지났다고 시대는 더욱 디지털화되었고 빠르게 진화하며 이제 프린터 앞에 서서 한 뭉치 뽑고 있노라면 마치 시대를 역행하며 사는 옛날 사람 느낌마저 든다(최근에는 학습 꾸러미 외에는 프린터도 쓰지 않았다). 분명 사무용품을 사고 모으는 재미가 있었고, 팀 총무의 특권 아닌 특권이던 것이 이제는 한물간 옛날 얘기처럼 들린다.


우리는 이미 펜과 종이가 없어질 그 시대에 적응하고 있고 나는 이 사실을 이제는 실감하게 되었는데, 아마도 이 불필요한 것들을 비울 때가 되었다고 누군가가 내게 알리는 신호가 아닐까. 위에서 말한 대로 나도 이미 페이퍼리스에 어느정도는 적응이나 한 듯 검은색 플러스펜 한 자루와 노란색 노트 하나면 충분하다. 그 외의 것들은 이미 내 마음을 떠난 지 오래니 치워버려도 아쉬움 조차 없다. 연필꽂이 하나로도 모자라서 머그컵과 책상 서랍까지 나누어 보관할 정도라면 이미 많아도 너무 많다.


일일이 써보며 쓸만한 것들은 공용물품함에 기부(?) 했고, 단출한 장비만 그저 책상 서랍에 몇 개 남겼다. 그 많던 물품들을 정리하고 나니 책상 한쪽에는 찬바람이 불며 조금은 썰렁해졌지만, 내 책상이 그토록 필요로 하는 미니멀 라이프에는 한걸음 더 다가간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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