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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빠와따 Feb 04. 2023

소주와 삼치구이

 기쁜 우리 젊은 날의 추억

나는 첫사랑이 마눌님이라고 말해왔다.

내가 그런 얘길 하면 마눌님은 항상 웃기지 말라고 한다. 이유는 결혼 후에 마눌님이 내 일기장을 훔쳐 읽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날 이후 일기장을 안 본다.거기에 뭐라고 끄적였는지 모른다. 잊었다. 생각나지 않는다. 모든 정치인의 뻔뻔한 그 말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나도 그걸 좀 이용해야겠다. 누가 뭐래도 첫사랑은 마눌님이다. 그렇게 우겨야 '한다'. ('한다'라고 적고 '산다'라고 읽는다)


그런데 아주 가끔 생각나는 여자가 있다.

이렇게 아주 추운 겨울날이면 말이다.

착하고 예쁜 여학생이다.

일기장에는 없는 얘기다.




89년 대학교 2학년 겨울 방학이다. 다음 해는 휴학을 할 예정이다. 군대를 가야 한다. 더 이상 이런 식으로 학교 생활을 할 수는 없다. 학점이 너무 엉망이다. 왜 그때는 방학에도 학교에 가서 어슬렁거렸는지 알 수가 없다. 어느 날 선배가 느닷없이 소개팅을 하란다. 내년에 군대 가면 누가 편지라도 써 줘야 한다면서 등을 떠민다.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그다지 싫지도 않았다. 


장소는 허름하기 짝이 없는 선술집이다. 선배는 합석을 해서 소주 한 잔 마시더니 '잘해보라'며 부러 자리를 비켜줬다. 소주, 삼치구이와 함께 했던 어느 겨울날 소개팅이다. 첫 소개팅이었고 그 후로 더 이상의 소개팅은 없었다 배는 고팠고, 날은 춥고, 안주는 부실하기 짝이 없다. 금방 취기가 올랐다. 허기진 속에 힘껏 빨아들인 담배 탓도 있었을 터. 담배연기와 희뿌연 형광등. 그리고 생선 굽는 연기가 버무려진 좁은 공간은 맨 정신에도 어질어질했을 것이다.


피부가 유난히 하얗고 어깨까지 내려오는 생머리, 귀여운 여학생이다. 아버지는 고등학교 교장선생님이고 그녀는 교대 휴학 중이다. 본인 소개가 특이했다. 낮에는 공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학생들을 가르친다. 집에서는 학교를 다니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고, 등록금은 야간학교 학생들 교육비로 사용했다. 추운 날인데 파카를 입지 않았다. 애들 벗어 줬단다. 장갑도 없다. 목장갑을 보여주면서 '이거 은근히 예쁘지 않냐'라고 밝게 웃는다.


소개팅을 주선해 준 선배가 운동권이라 이런 상황이 당시엔 별로 놀랍지 않았다. 마음이 예쁘다. 만약 사귀게 된다면 내 옷도 공장에 있는 근로자들에게 벗어 줘야 할 것 같다. 엄마한테 혼날 거라, 나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고 얼근하게 취기가 오른 채 밖으로 나왔다. 그녀가 너무 추워 보였다. 내 옷을 벗어 주려고 했다. 자기는 괜찮다면서 파카의 지퍼를 내리는 내 손을 막아서는 목장갑에서 단단한 힘이 느껴진다. 우리는 양손을 내 가슴 쪽에서 마주 잡은 어색한 모양이 되었다. 그녀의 목장갑에 내 손을 잡혔는데, 잠깐 스쳐간 감정은 분명 설렘이 맞다.


“전철역까지만 입고 가”

“진짜 괜찮아요”


하얀 입김이 하나 되어 밤하늘로 사라진다.


그녀는 집 전화번호를 주더니 군대 가기 전에 전화를 하라고 한다. 안 했다. 나는 군대 영장이 언제 나올지 모른다. 그녀가 편지 써 줄 만큼 한가해 보이지도 않았다. 다음 해 봄, 영장은 쉽게 나오지 않았고 나는 가끔 학교에 놀러 다니고 있었다. 선배에게 그녀의 소식을 들었다. 아버지에게 휴학한 사실을 들켰고, 머리를 깎인 채 집에 감금(?) 되었다고 한다.


나는 한참을 지나서 8월에야 영장이 나왔고 강원도 양구로 끌려갔다. 거기서 6주 훈련을 마친 뒤 엉뚱하게도 전투경찰로 차출되었다. 내가 배치된 부대는 경기도 성남, 하루가 멀다 하고 시위 현장에 출동했다. 나는 서울과 경기 지역에서 벌어지는 시위 진압 현장에 나갈 때마다 그녀를 찾고 있었다. 시위 현장에서 목덜미를 잡혀 닭장차로 끌려 들어오는 생머리 여학생이 있으면 자꾸만 바라보게 된다. 그녀일까 봐.




어느새 세월이 많이 흘렀다.

TV 뉴스에서 진보 정당 소식이 나오면 화면 구석구석을 빠르게 스캔하는 습관이 생겼다. 일본 대사관에서 위안부 할머니들 집회 소식이 나오면 유심히 보게 된다. 왠지 그녀가 어딘가 있을 것 같았다. 안 보인다. 


복학해서 선생님이 되었을까? 

어떤 인생을 살았을까? 

궁금하다. 

겨울이면 가끔 그녀가 생각난다.

<삼치구이와 소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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