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을러지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시작했다. 저녁 반이었는데 지각없는 개근을 했더니 뿌듯하다. 낮술을 하고 만취상태로 참석했던 날도 있었던 건 '안 비밀'이다. 수강생 중 제일 나이가 어린 분은 97년생으로 우리 아들과 동갑이다. 어쨌든 우리는 동기다. 30대, 40대, 60대까지 다양한 나이와 직업을 가진 분들이 모였다. 수업은 보통 5~6명, 적은 날은 3~4명이 참석한다. 서로 가볍게 눈인사만 하고 별도 모임은 물론이고 대화도 거의 없이 지냈다. 오로지 수업에만 집중한다. 수업은 밤 10시에 마친다.
요즘 같은 세상에 모르는 누군가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었을까? 최대한 서로의 영역으로 넘어가지 않으려 신경을 쓰는 분위기였다. 자신의 결핍을 메꾸기 위해서 늦은 시간 자기계발에 힘을 쏟는 사람들. 서로에게 비친 자신의 모습에 조용히 박수를 보내는 것 같았다.
마지막 수업 날, 각자 준비한 스피치를 했다. 서로 따듯한 시선으로 들어주었고 평소보다 큰 박수를 보내면서 마무리했다. 지난 두 달은 연말연시였다. 서로 私談 없이 지내온 모호한 분위기의 강의실에는 서로에 대한 격려와 배려가 눈처럼 소복소복 쌓여 있었던 것 같다. 우리 아들 동갑내기인 강 선생님은(서로를 선생이라 불렀다) 우리 모두에게 귤 하나씩을 나누어 주면서 '수고하셨습니다'라고 마지막 인사를 했다. 얼결에 귤을 받아 들고 고맙다는 인사도 제대로 못했다. 짧지 않은 시간 동안 함께 수업을 들었다. 그 인연에 대해서 이렇게라도 아쉬움을 전하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집에 돌아와 귤을 바라보다 문득 호기심이 생겼다. SNS에서 그분에 대해서 아는 정보로 해시태그를 달면 혹시 전달이 될까? #강민지#크로스핏#스피치강의#빨간머리#97년생#디자인업무#귤#전해주세요#고맙습니다 '혹시 주변에 #강민지 님 지인이 계신다면 스피치 강의를 함께 들었던 아저씨가 귤 때문에 너무 감동해서 감사 인사를 전하고 싶다고 꼭 전해주세요'라고 인스타그램에 올리면 전달이 될까?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기 돌보기의 핵심에 돈과 권력을 뺄 수는 없다. 돈이 있어야 자기를 돌볼 수 있다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니까. 그런 이유일까? 우리는 결과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 많은 일들이 결과로 평가받고 거기에 따라 운명이 좌우되기도 한다.
지난 시간 동안 강의실에 모였던 그분들에게서 결과보다는 과정에 만족하는 모습을 보았다. 이웃을 배려하는 따듯한 마음도 느꼈다. 고된 회사 업무를 마치고 늦은 시간, 스스로의 걸음으로 배움을 선택했다. 오랜 시간 밤을 태웠던 자신들의 노력에 대해서 뿌듯함을 주머니에 담아 그렇게 모두 떠났다. 난 그날 밤 '삶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살짝 엿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