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으로 돌아오는 방법
우리 가족의 첫 해외여행 계획을 세웠다. 괌이다. 하지만 어이없는 일로 무너졌다. 내가 50대 중반이 된 지금까지 처음 가족여행 기회였는데.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속이 쓰린다. 괌으로 출발하는 날, 우리는 강릉으로 떠났다.
나는 종교도 없고 사후 세계도 믿지 않는다. 30년 전이다. 목사님께 '아무래도 신은 없는 것 같다'라고 당돌하게 말씀드리고 교회 문을 나왔다. 가끔 급똥 상황이 되면 내가 아는 모든 신을 한꺼번에 부르짖으며 살려달라고 빌기는 한다. 그럴 땐 하느님이 항상 첫 번 째다. '내가 그때 생각이 짧았다'라고 싹싹 빈다. 진심으로. 이번의 위기만 넘기게 해 주신다면 다시 당신 앞으로 달려가겠다고 말이다. 지금까지 수십 번 반복했으니 매번 비는 나는 참으로 뻔뻔하고, 계속 들어주시는 하느님은 보살 같다. 이러다 벌 받아서 언젠가는 바지에 똥 쌀까 걱정은 된다.
재미로 점을 보러 가서 만난 생전 처음 보는 아주머니가 던진 말! '가족들하고 먼 곳으로 여행을 하지 마라, 특히 괌 같은 곳은 가지 마라' 그 한 마디에 모든 것이 엉망이 되었다. 그냥 해외여행도 아니고 콕 짚어서 괌이라니. 수년 전에 딸아이와 난생처음 점을 보러 갔던 감성으로 가볍게 방문했는 데 화근이 되었다. 추억속에 있던 멜로 드라마는 호러물로 변했다. 괌 여행을 취소했다. 수십 만 원을 위약금으로 날렸다. 아이들에게는 '엄마, 아빠 미친 거 아니냐'라는 소릴 들어야 했다. 할 말이 없지만 비행기를 탈 수 있는 용기는 나지 않았다. 내가 이렇게 한심한 사람이구나를 되뇌면서 자책했지만 떠날 용기는 없었다. 평소 샤머니즘을 비웃던 내 꼴이 우스워졌다. 재미로 본 점 때문에 집안 분위기는 완전히 망가졌다.
괌 여행을 취소하고 상한 속을 달래야 했다.
아니, 아이들을 달래줘야 했다. 대학생인 아이들도 나름대로 스케줄을 조정한 것인데 다 망쳤다. 우리 부부는 강원도 여행을 제안했는데 억지로라도 따라나서준 녀석들이 고맙다. 바닷바람도 쐬고 술도 한 잔씩 했다. 대화는 평소 단답식으로 하던 방식에서 꼬리 질문을 하는 토론으로 발전했다. '아빠가 그런 일이 있었어?' '내가 모르는 일이 이렇게 많았어?' 깔깔거리며 시간을 즐긴다. 상했던 속도 소주 한 잔에 풀려 갔다.
술 병이 비어 갈 무렵, 딸아이가 펜션 구석에 놓여있던 장난감을 들고 왔다. 예능 프로에서 보던 거짓말 탐지기다. 손을 기계에 올려놓고 질문에 답을 하는데 거짓말이면 약한 전류를 흐르게 하는 방식이다. 아이들은 맥박 등의 변화를 감지하는, 나름 과학이라고 우긴다. 우리는 술도 한 잔 했겠다. 대학시절의 MT분위기가 되어 간다. 그 시절도 밤이 깊으면 모닥불가에 둘러 앉아서 진실 게임을 하곤 했는데. 우리 가족의 진실게임이 시작되었다.
첫 번째는 내가 자원했다.
손을 올리고 아이들 질문에 답을 한다.
'엄마를 사랑하느냐?'라는 질문에 '이제는 정으로 사는 거지'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사랑한다고 말했다. 사랑이 익으면 정이 되는 거니까 거짓말은 아니지 않은가? 호흡도 침착하게 다스리며 편안하게 답했다. 찌찌직!! 손바닥을 통해서 올라오는 짜릿한 느낌은 예상보다 강력했다. 깜짝 놀랐다. X발이라는 욕도 절로 튀어나올 정도다.
두 번째 마눌님도 보기 좋게 당했다.
아마도 나와 비슷한 마음이었겠지만 '아악' 하고 소리를 지르면서 펄쩍 뛰어올랐다.
세 번째 딸아이도 거짓!
제법 큰 비명을 질렀다.
마지막은 아들이다. 첫사랑은 잊는 게 아니라던데.... 아들 녀석은 '지금은 그녀를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라는 뻔뻔한 답을 했지만 통과! 표정은 분명히 아니었는데 말이다.
늦은 시간까지 즐겼다. 평소 하지 못했던 깊은 대화를 하면서 우린 그렇게 가족으로 익어 갔다. 친구처럼 즐기면서 어려울 땐 믿고 의지하는 따듯한 가족이 있어서 다행이다. 어지러운 마음에 재미 삼아 찾았던 점집이었다. 예상치 못한 상황 속에서 잠시 혼란도 있었지만 우린 아주 쉽게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가족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