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12세기~ 기원후 476년 서로마 멸망
요약한 서양 미술사
서양미술사는 크게 구분하면 4개의 시대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는 그리스 로마시대, 둘째는 중세시대, 셋째는 근세 시대, 그리고 넷째는 근현대이다. 시대와 그 시대를 대표하는 미술들을 연결시키면 위의 그림과 같이 된다. 모두 서양에서 태어난 미술들이지만, 시대에 따라 완전하게 다른 형태의 미술들이 나타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미술사와 서양사는 완전하게 같이 움직인다
미술이 시대마다 다른 형태로 다시 태어나는 것은 시기마다 그 시대상을 반영했기 때문이다. 미술은 언제나 예외 없이 시대를 반영해 왔다. 자연을 면밀하게 관찰하는 과학과 철학을 탄생시킨 그리스 시대는 자연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조각들을, 철저하게 기독교 중심이었던 중세 시대는 기독교 미술을 발달시켰다. 그리고 왕과 귀족들이 시대라고 할 수 있는 근세는 권력자들을 위한 유럽의 명화들을, 그리고 우리가 사는 근현대의 미술은 다양한 시민들의 삶의 방식이 공존하는 시대에 꽃피는 다양성의 미술을 탄생시켰다. 미술은 이렇게 항상 시대의 흐름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서양사를 알아야 서양 미술사를 알 수 있다
서양미술사를 이해하기 위해 서양사를 알아야 하는 이유가 이것이다. 예컨대 유럽 미술이 수묵담채화가 아닌 '천지창조'나 '모나리자'같은 그림들을 탄생시킨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어본다면, 이에 대한 대답은 그 그림들을 탄생시킨 르네상스라는 시대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개별 작품을 감상하는 것으로는 본질에 다가갈 수는 없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서양사는 아무래도 남의 나라 역사이기 때문에 무관심한 경우가 많은 것이 현실이다. 여기서 미술을 설명하고자 하는 사람의 딜레마가 생긴다. 미술사를 설명하기 위해 서양 역사 전체를 다루자니 그 양이 방대하기 때문에 무리가 있고, 그렇다고 안 다루자니 미술을 의미 있게 설명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민 끝에 짧게 요약해서 서양사도 같이 다루는 방법을 택하였다는 것을 말씀드린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어떤 미술이든 깊이 있게 이해하려면 반드시 역사와 시대관을 같이 이해할 필요가 있다. 앞으로의 네 개의 장에서 그 내용을 다룰 것이다.
기술하는 방식
기술하는 방식은 기본적으로 그리스 로마, 중세, 근세, 근대 시대를 역사 순서대로 설명하되 각 시대의 뒷부분쯤에 그 시대의 미술을 덧붙여 설명하는 방식이 될 것이다. 기본적으로는 머릿속에 서양사와 미술사의 전체적인 큰 그림을 그리는 것을 목표로 하지만 이는 결코 쉬운 일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양한 역사 이야기들을 알아야 결국 큰 그림도 그릴 수 있는 것인데 여기서 다룰 수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단편적인 역사들뿐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필요하다는 점은 확실하므로 인내심을 가지고 읽어주길 바라는 마음이다. 덧붙이자면 이 장을 통해 다행히 이 4개의 시대상이 어렴풋이나마 머릿속으로 그려진다고 해도 그 내부의 내용을 채우는 것은 결국 이후 개인의 '인문학적 노력' 여하에 달렸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서양사는 지중해의 역사다
서양사는 지중해의 역사이다. 대한민국의 역사를 한반도의 역사라고 한다면, 서양의 역사는 유럽의 가운데에 있는 지중해Mediterranean Sea를 중심으로 수많은 국가들이 죽음과 탄생을 반복해 오는 역사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 시대, 도시국가들의 시대
서양사의 출발이라고 할 수 있는 그리스 시대는 기원전 1100년 정도부터 시작된다. 그리스 시대는 간단히 말하면 이 지중해 주변에 수백 개에 이르는 도시 국가들이 드문드문 퍼져서 살아가는 '도시 국가들의 시대'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그리스 시대의 패권국은 아테네와 스파르타였다. 이 두 도시국가를 중심으로 그리스 문명이 꽃피게 되는데, 스파르타는 단순한 군사중심의 국가였던 반면, 아테네는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유명한 철학자들을 배출하며 '이성 중심의 서양 문명'의 초석을 만들어 놓게 된다. 그리고 이 그리스 아테네를 중심으로 서양 문명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서방의 경쟁자, 오리엔트
당시 그리스 외부를 살펴보면 계속 문제를 일으켰던 것은 그리스 동쪽에 위치한 페르시아 제국이었다. 이 페르시아 제국은 현재로 보면 이란, 이라크, 터키 같은 중동지역이라고 보면 거의 맞을 텐데 이 페르시아 제국이 그리스 도시국가들을 침략하면서 벌어진 전쟁이 '페르시아 전쟁'이다.
지중해 서쪽의 그리스 문명과 동쪽의 오리엔트 문명은 역사 이래 지금까지도 계속 라이벌 관계였다. 페르시아 전쟁은 서쪽과 동쪽이 패권을 놓고 겨룬 최초의 전쟁이었다. 여러 번의 전쟁 끝에 그리스 도시국가 연합은 승리하게 되는데 이 전쟁 이후 서쪽의 그리스 문명이 지중해 전체를 장악하게 된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는 게 역사학자들의 불문율인 모양이지만, 이때 만약 그리스가 패배했었다면 지금의 유럽 세계는 중동문화가 장악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올림픽 마라톤 경기의 기원으로 알려져 있는 마라톤 전투나, 영화 '300'의 배경이 된 테르모필레 전투, 그리스가 페르시아에게 결정적 승리를 얻게 되는 살라미스 해전도 모두 이 페르시아 전쟁의 부분들이다.
한 가지 재미있는 점은 서양과 중동은 어째서 인지 여전히 계속 서로 싸우고 있다는 것이다. 현대의 중동 갈등은 고대처럼 패권 다툼도 아니었고 중세처럼 종교 갈등도 아니니까, 그들은 계속 서로 싸울 수밖에 없는 다른 이유가 있는 모양이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탄생 (기원전 356~323)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역사에서 가끔 나타나는 천재 형 인물의 전형이다. 아테네를 비롯한 그리스 도시국가들은 무역을 주로 했기 때문에 서로에게 호전적인 편은 아니었다. 무역국가 입장에서 다른 도시국가들은 무역 상대국이기도 하니까 싸워서 좋을 것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알렉산드로스가 태어나면서 시대의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기원전 356년, 그리스 북부에 위치한 도시국가 마케도니아의 왕자로 태어난 알렉산드로스는 왕위를 계승한 이후 정복전쟁을 시작하였고 계속된 정복전쟁에서 단 한 번의 패배도 한 적이 없는 진정한 의미에서 '전설적인 인물'이다. 알렉산드로스는 32세에 병으로 죽음을 맞이하기 전까지 그리스, 남쪽으로는 이집트, 그리고 오랜 숙적이었던 동쪽의 오리엔트 제국들, 이후 동쪽으로 더 나가서 인도 일부 지역까지 정복하고 거대 제국의 대왕이 된다.
한편 위의 조각상을 보면 '대왕'이라고 하기 에는 좀 어리다는 느낌이 드는데 이것은 실제로 32세라는 매우 어린 나이에 제국을 이루고 변방에서 병사했기 때문이다. 보통 지도자들이 인생에서 가장 역량을 발휘하는 시기가 50대 넘어서 부터라는 점을 생각해 보면 매우 일찍 성공을 이룬 것이다. 그런데 알렉산드로스에 관한 기록들을 찾다 보다 보면 세계 정복을 꿈꾸는 황제였다기보다는 호기심 많은 청년이라는 느낌을 많이 받게 된다.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는 것이 상식이었던 고대에, 알렉산드로스는 동쪽으로 계속 가다 보면 '세상의 끝'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모든 부하들이 그만 진격하라고 말렸는데도 동쪽 인도까지 고집스럽게 진격했던 이유는 어쩌면 '세상의 끝'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알렉산드로스의 영향력
알렉산드로스는 그리스 미술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는 '헬레니즘 미술'을 탄생시킨 인물이기 때문에 짚고 넘어가는 것이지만, 실제로 알렉산드로스는 고대 유럽 세계에서는 매우 중요한 상징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다. 말하자면 유럽 사회 최초의 영웅쯤 되는데 이런 종류의 남자는 다른 남자들의 야망을 불타게 하는 측면이 있다. 그리스 시대가 끝나고 로마시대가 되어서도 로마의 여러 영웅들, 예컨대 카이사르(시저)나 폼페이우스, 트라야누스 황제 같은 여러 야망 있는 로마인들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업적을 듣고 이를 뛰어넘고 싶은 야망을 갖게 된다. 알렉산드로스는 후대의 지도자들에게 일종의 '롤 모델'의 역할을 했던 것인데 이것은 자연스럽게 정복전쟁, 그리고 로마 제국의 영토 확장이라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로마인들이 알렉산드로스를 따라 하다 보니 어느새 로마가 제국이 되어버린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1세기 로마제국의 영토 – 지도를 보면 서쪽으로는 지금의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등등 그리고 동쪽으로는 그리스, 루마니아, 불가리아, 터키 등등 사실상 지중해 전체를 장악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영원의 제국, 로마 (기원전 753년, 지중해를 장악하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201년 이후 )
알렉산드로스가 제국을 세우고 그 제국이 쇠퇴하는 중에도 꾸준히 서쪽에서 성장하던 도시국가가 있었는데 그 도시가 바로 로마였다. 군소 도시국가들 중 하나에 불과했던 로마는 어느새 급성장하여 지중해 전체를 지배하게 된다. 로마의 등장은 말하자면 지중해 세계의 주역이 아테네와 같은 도시국가들에서 로마라는 하나의 거대한 제국으로 넘어가는 '바톤 터치'를 의미한다. 이탈리아 반도의 중간쯤, 한반도로 치면 서울과 비슷한 위치에 있었던 로마는 차근차근 주변의 다른 도시국가들을 점령하며 세력을 키우다가 이후 이탈리아 반도 전체, 그리고 서유럽과 북유럽, 북아프리카, 동유럽까지 차례로 정복하면서 지중해 전체를 장악하는 제국으로 성장하게 된다.
하지만 로마는 단순히 덩치만 큰 국가가 아니라 사실상 서양 문명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다. 로마는 정치 제도, 세계관, 기술력, 학문 등 전반적인 문명 수준을 매우 높게 끌어올리게 되는데 여기서 유럽 문명이 처음으로 꽃피기 시작하게 된다. 로마는 멸망한 후에도 중세, 르네상스, 근대, 그리고 현대까지 거의 모든 역사에서 계속 그 이름이 등장하게 되는데, 이는 영화로웠던 로마시대를 수많은 후대의 유럽 국가들이 본받고자 했기 때문이다. 이런 흔적은 심지어 지금까지도 서양 사회에 남아있다. 예를 들어 독일 나치의 손을 올리는 특이한 경례법이나 독수리를 당의 상징으로 삼은 것은 모두 히틀러가 로마제국을 흉내 낸 것이다. 그리고 지금도 미국이 독수리를 자국의 상징으로 사용하는 것이나 상원의원을 로마의 원로원, Senatus에서 따서 Senate라고 부르는 것 역시 비슷한 예가 될 수 있다.
로마가 제국으로 성장한 이유
그리스를 제치고 신흥세력으로 등장한 로마의 가장 큰 특징은 클레멘티아Clementia, 관용정신이다. 고대에는 보통 주변 국가들과 전쟁을 치르게 되면 패배한 도시들을 말살시키고 땅을 차지하거나 노예화시키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로마는 이와 다르게 전쟁에서 이기고 나서도 공생하는 길을 택했다. 예컨대 로마가 건국 초기에 정복했던 에트루리아인의 경우를 보면, 정복당한 에트루리아 인들을 로마로 이주시켜 같이 살게는 것뿐 아니라 나중에 로마의 왕으로 에트루리아인 중에서 선출하기도 하였다. 로마인들의 이 '관용정신'은 매우 놀라운 것인데, 이것은 마치 일제강점기에 일본이 우리나라를 식민지화하고 나서 몇십 년 뒤쯤 일본 대통령을 한국인으로 뽑는 것과 비슷하다. 관용정신은 기본적으로 타민족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다른 민족들을 흡수한 후 같이 성장하는 것이고 결과적으로 로마 제국의 통치 범위도 계속 넓어지게 된 것이다.
로마의 정치인 율리우스 카이사르 (기원전 100년 ~ 44년)
이 정복 과정은 당연히 로마의 정치인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 대표적인 사람 중 한 명이 바람둥이 로마인, 율리우스 카이사르Julius Caesar, 영어로는 줄리어스 시져이다. 이 인물이 중요한 이유는 이 책의 주제인 서양 미술사의 중심, 서유럽 세계를 근본적으로 창조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관용을 중시하는 전형적인 로마인이었던 카이사르는 알렉산드로스 같은 영웅이 되고 싶은 야망 있었고, 이 야망을 실현시키기 위해 이탈리아 북부, 지금의 프랑스, 독일, 스페인, 영국을 포함하는 서유럽 전체에서 정복전쟁을 시작하게 된다. 흔히 카이사르가 '유럽을 만들었다'라고 하는 이유는 이 정복 과정에서 유럽 전체에 로마식 문명을 퍼뜨렸기 때문이다. 지금의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스페인, 독일 등을 머릿속으로 떠올려 보면 발달된 선진국가라는 생각이 들지만 당시만 해도 그 지역에서 살던 유럽인들은 소규모 농사를 짓거나 사냥을 하면서 사는 부족단위의 야만인에 가까웠다. 그런데 카이사르가 이 지역들을 차례로 정복하면서 유럽 전체에 문명을 전파시킨 것이다. 진정한 의미에서 로마인이길 원했던 카이사르는 정복 전쟁 이후 이 지역 전체를 노예화하지 않고 로마 제국으로 편입시킨 다음 부족장들은 로마 정치계로도 등용시키게 된다. 로마 전통의 관용정신Clementia을 발휘한 것이다. 결국 이 카이사르의 정복 이후 서유럽 지역 전체에 본격적으로 유럽 문명이 시작된다.
로마의 역사는 결국 '정복과 통치'의 역사라고 할 수 있을 텐데, 카이사르 외에도 이후 여러 로마의 통치자들은 유럽지역을 점차 정복하고 문명을 퍼뜨리게 된다. 로마가 전 유럽에 문명을 퍼뜨렸다는 것은 지금 유럽의 지명들에 그 흔적이 남아있다. 예를 들어 영국의 런던London은 론디니움Londinium이라는 로마 요새가 정착하며 도시가 된 것이고, 독일의 쾰른은 로마어의 식민지란 뜻의 Colonia에서 기원하였다. 맨체스터처럼 영국에는 도시 명에 체스터Chester가 들어가는 경우 역시 로마 군단이 사용하던 카스트룸Castrum(군단기지라는 뜻)이었던 지역이 도시로 발전한 것이다. 고작 군단 기지들이 나중에 대도시로 까지 발전한 것이니까 그만큼 로마 이전의 서유럽은 낙후되어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대략 기원전 4년부터 기원후 30년)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정확하지는 않지만 대략 기원전 4년이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암살당한 것이 기원전 44년이니까 예수 그리스도와 카이사르는 사실 거의 비슷한 시대에 살았다고 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이후 유럽 1500년의 역사를 결정짓게 되는데 이는 기독교의 탄생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 사후 탄생한 기독교는 처음에는 가난한 서민들의 종교로 시작되었지만 이후 점점 세력이 커지다가 결국 로마 전역으로 퍼지게 된다. 그리고 서기 380년에 기독교인이자 로마의 황제였던 테오도시우스 황제에 의해 로마의 국교로 선포된다.
기독교의 성장과 로마의 쇠락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로 선포되었다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의미가 있다. 그 넓은 지중해 전체를 지배하던 로마제국 전역, 그러니까 유럽 전체가 기독교화가 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물론 단순한 황제의 선포로 유럽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갑자기 기독교인이 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로마의 국교로 선포되었다는 것은 천년 동안 유지되었던 그리스 로마 신화 중심의 다신교 세계관이 끝나고 이제부터는 새로운 유일신 세계관, 즉 기독교의 시대가 시작되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 시기 즈음에 로마제국의 국력은 점차 쇠락하게 된다. 결국 찬란했던 로마는 지금의 독일 지역에 살던 야만족들인 '게르만족'들의 침입에 의해 476년 멸망하게 된다. 이렇게 고대의 로마가 멸망하는 시점을 보통 중세의 시작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리스 미술에서 시작되어 로마 미술까지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그리스 시대는 아테네와 스파르타와 같은 도시국가들의 시대를 말하고, 로마시대는 로마가 유럽 전체를 지배하는 제국의 시대를 말한다. 엄밀히 따지면 역사적으로 두 시대는 다르지만 보통 '그리스-로마 시대'로 묶어서 부르고 미술에서도 '그리스-로마 미술'로 같이 묶는다. 같이 묶는 가장 큰 이유는 두 시대의 세계관이 유사하기 때문이지만, 미술 쪽에서 보면 실제로 로마인들은 그리스 미술을 계속 복제하기만 하고 더 발전시키지는 못했기 때문에 두 시대의 미술을 구분 지을만한 특이점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인들과 다르게 로마인들은 '실질 강건'을 중시하는 실용적인 민족이었기 때문에 순수 예술을 발전시키는 데는 그다지 흥미가 없었던 것 같다. 로마인들이 발전시킨 것은 군사력과 기술력, 정치제도와 같은 실용적인 것들이었고, 로마인들만의 독특한 '문화'라고 할 만한 것들은 검투사 시합(이것도 원래 로마인들이 만든 것은 아니긴 하지만)이나 목욕 문화 정도가 있을 뿐이다.
로마인들은 이렇게 자신들 스스로는 예술문화를 발전시키지 못했지만, 앞선 그리스의 예술과 문화를 존중하고 받아들였다. 실제로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로마에 정복당한 이후에도 '자유도시' 자격을 부여받았는데, 이것은 로마가 자신이 지배자임에도 불구하고 두 두시를 존중하는 의미로 특별대우를 해준 것이다. 그리고 로마에서는 수준 높은 교양인들이라면 그리스어를 기본적으로 사용했는데, 이것은 현대에 영어가 공용어로 사용되고, 높은 수준의 영어를 사용하는 것이 일정 정도 '교양의 척도'가 되는 것과 비슷하다. 그리고 로마가 정복하고 통치하는 와중에도 지중해 전체의 공용어 역시 그리스어였다. 로마인들은 자신들이 언어인 라틴어보다 그리스어를 더 우대한 것이다. 로마가 그리스의 예술을 기계처럼 복제한 이유에는 이런 문화적 배경이 있는 것이다.
그리스 미술의 특징
그리스 미술은 보통 그리스 조각과 건축으로 대표된다. 그리스 시대의 주 세계관은 그리스 신화였기 때문에 거의 모든 조각상들은 그리스 신화의 신들을 주제로 하고 있다.
그리스 미술의 가장 큰 특징을 꼽는다면 사실적인 인체 묘사였다. 그리스인들은 왜 사실적인 인체 조각을 만드는 것에 열을 올렸을까.
그리스 미술이 사실적인 묘사 중심으로 발달한 것은 그들의 세계관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스인들은 기본적으로 현세적인 민족이었다. 그리스인들이 현세적이었다는 것은 내세를 중시했던 이집트인들과 비교해 보면 확연히 드러난다.
내세를 중시했던 이집트인들은 미라를 만들었고 피라미드, 스핑크스 같은 초현실적이고 상징적인 미술들을 발전시켰다. 반면 현실의 삶을 중시했던 그리스인들은 자연을 연구하는 과학과 철학을 발달시켰고 비너스나 라오콘 같은 아름다운 인체를 묘사한 조각들을 발전시켰다.
그리스 미술에서 '사실적인 인체 묘사'가 강조된 이유는 아마도 그리스의 철학과 과학에서 나타난 자연을 객관적으로 이해하려는 태도와 맞닿아있을 것이다. 과학에서 자연을 이해하기 위해 객관적으로 연구하고 관찰했던 것처럼 미술에서도 인체를 관찰하고 보이는 그대로 조각하는 것이다.
그리스 미술의 발전단계
그리스 미술은 위의 그림처럼 보통 3번의 발전 과정을 거쳐서 완성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초기에는 전체적으로 투박하고 뻣뻣한 느낌이 나는 아르카익 미술, 그다음은 거의 완벽한 수준의 사실적 표현을 보여주는 클래식 미술,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클래식의 완벽성을 뛰어넘어 화려함과 조형적인 측면에서 정점 이르는 헬레니즘 미술의 순서로 발전하게 된다. 다시 정리해 보면 아르카익 - 클래식 - 헬레니즘의 순서이다.
아르카익 시기
아르카익이라는 말은 그리스어로 '옛날의'라는 뜻이다. 간단히 말해 그리스 초기의 미술이다. 아르카익 시기의 조각상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비너스상 같은 조각상과는 전혀 느낌이 다른데 다소 뻣뻣한 느낌이 난다. 단순히 초기의 미술이기 때문에 실력이 부족했기 때문일까.
그리스 초기의 미술이 경직되어 보이는 이유는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의 미술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는 그리스보다 훨씬 앞서서 문명을 탄생시켰고 이 문명이 그리스로 넘어가면서 그리스의 문화도 탄생한 것이다. 두 선진문명은 앞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현세보다는 내세를 중시하는 미술을 발달시켰고 이것이 그대로 그리스에 이식되었기 때문에 초기 그리스 미술이 다소 투박해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서양 미술의 출발점을 말한다면 정확히는 이집트다.
아르카익 시기의 그리스 미술은 자연을 그대로 묘사하는 것이 아닌 초월 세계를 표현하려 했다는 점에서 숭고Sublime의 아름다움이다. 위의 아르카익 조각의 얼굴에 드러나는 은은한 미소를 '아르카익 미소Archaic Smile'라고 부르는데, 이 미소는 '아름다운 미소'라기보다는 '신비한 미소'에 가깝다. 이는 우리나라의 석굴암이나 반가사유상에서 보이는 미소와 비슷해 보이는데, 모두 종교적 초월성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그리스의 미술은 클래식기로 넘어가면서 완성을 이루었다고 표현하는데, 이 과정은 이집트 예술의 영향력이 남아있던 아르카익으로부터 벗어나 그리스만의 미술을 완성하는 독립의 과정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클래식 시기
클래식 시기는 아르카익 시기를 극복하고 완벽한 인체 표현을 완성하는 시기이다. 조각상의 자세들은 대체로 규격화되어 있었는데 대표적인 자세는 콘트라포스토Contrapposto라고 하는 짝다리를 짚고 있는 듯 한 자세이다. 그리고 카논Canon이라고 불리는 완벽한 신체 비율이 존재한다고 믿었다. 우리가 보통 8등신 미인이라고 할 때의 그 기준은 그리스 클래식 시기에 완성된 것이다.
그리스인들은 왜 이런 완벽한 비율을 추구하기 시작했을까. 그리스인들은 과학과 철학을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자연이 어떤 법칙에 의해 통제된다고 믿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그렇다면 아름다움 역시 그 아름다움을 발생시키는 어떤 완벽한 자연법칙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결과적으로 클래식 시기의 미술은 어떤 '절대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했던 것이다.
그런데 클래식 시기에 이미 완벽한 인체를 표현해 냈으므로, 다음의 헬레니즘 시기에서 더 발전시킬만한 무언가가 남아있었을까 하고 생각할 수도 있다. 왜 이미 완벽한 인체를 표현한 클래식 시기가 아닌 헬레니즘 시기를 그리스 미술의 정점이라고 표현하는 것일까.
그리스 미술과 정 반대의 오리엔트 미술
클래식 그리스 조각은 인체를 매우 완벽하게 묘사하기는 했지만 이런 '완벽성의 추구'는 반대의 관점으로 보면 '경직성'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다. 이 그리스의 '완벽성을 추구하는 미술'과 반대쪽에 있는 미술은 동쪽의 오리엔트 제국의 미술들이다. 오리엔트 제국의 미술들은 '화려함', 다르게 표현하면 '세속미'와 '관능미'를 가지고 있었다. 오리엔트 제국의 미술이 화려한 것은 아마도 오리엔트 세계의 중앙집권체제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을 텐데 그리스가 최초의 민주주의 시스템을 완성시킬 동안, 앗시리아나 페르시아 같은 동방의 오리엔트의 제국들은 한 명의 군주가 전 제국을 통치하는 시스템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 강력한 권력을 중심으로 화려한 예술 문화가 발달하였던 것이다.
헬레니즘 미술 - 반대를 만나 정점을 이룬 미술
헬레니즘 미술은 그리스의 클래식 미술과 오리엔트 미술의 융합으로 탄생한 미술이다. 이 두 전혀 다른 문화의 만남은 시너지 효과를 발휘하게 된다. 원래 그리스 조각이 가지고 있던 인체 표현의 '완벽성', 혹은 부정적인 의미에서의 '경직성'은 전혀 상반된 성격인 오리엔트의 문화의 '화려함'혹은 '관능미'와 만나게 되면서 예술적 정점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 미술을 대표하는 헬레니즘 미술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비너스상, 라오콘 군상, 사모트라케의 니케상 등 유명한 그리스 조각은 대부분 이 그리스 미술의 정점, 헬레니즘 시대에 탄생한 미술들이다. 헬레니즘 조각들은 완벽한 인체 표현과 함께 오리엔트의 화려함이나 관능미까지도 가지면서 예술적 정점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헬레니즘 미술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업적이다. 이는 알렉산드로스가 '세상의 끝을 보겠다'는 호기심에 동쪽으로 정복전쟁을 나갔고 자연스럽게 이 과정에서 그리스 문화와 동방 문화를 융합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한편 헬레니즘 미술은 알렉산드로스가 마지막으로 진군했던 인도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다. 헬레니즘 미술이 인도에까지 영향을 주면서 나타난 미술이 인도의 간다라 미술이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경주 석굴암은 인도의 간다라 미술에 영향을 받은 것이니까 우리나라도 어떻게 보면 멀리나마 알렉산드로스의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로마 미술
로마 미술은 간단히 말하면 로마가 그리스의 헬레니즘 미술을 그대로 이어받아서 복제한 것이다. 우선 로마는 그들이 동경하던 그리스의 미술들을 소유하기 위해 기술자들을 고용해 수많은 그리스 조각 복제품을 남기게 된다. 실제로 우리가 미술관에서 볼 수 있는 '라오콘' 같은 유명한 헬레니즘 시대의 조각들은 원본품은 남아있지 않고 대부분 로마인들이 남겨놓은 복제품들이다. 제국을 통치하면서 엄청난 부를 쌓은 로마인들, 특히 원로원 귀족계층들은 어마어마한 양의 그리스 조각들을 복제하여 자신들의 별장을 장식했는데, 어떻게 보면 우리가 지금까지 그리스 미술의 아름다움을 감상할 수 있는 것은 부유했던 로마인들이 많은 복제품을 남겨준 덕이기도 하다.
다만 로마 미술이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는 이유는 그리스의 복제품이라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 미술을 받아들인 후 더 발전시키지는 못하고 그저 복제하는 것에서 그쳤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복제품들 말고 로마인들만의 예술이라고 할 만한 것도 있다. 이는 당대의 유명 정치인들, 앞서 언급한 카이사르와 같은 정치인들의 조각상이다. 위의 조각상도 로마 전성기의 지도자이자 영어에서 8월 August의 기원이 되는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조각상이다. 사실 로마 역사 자체가 철저하게 정복과 통치의 역사이기 때문에 로마의 미술들이 군인과 정치인들 위주인 것은 당연하다고 볼 수 있다. 물론 로마 미술이 정치인물들의 상 위주인 것은 예술적으로는 조금 지루하다고 느낄 수도 있겠지만 어떻게 보면 이런 역사의 인물들을 직접 보는 즐거움이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비교하자면 한국 사람들이 세종대왕이나 광개토대왕 같은 한국사의 위인들이 실제 모습을 궁금해하는 것처럼, 서양인들의 입장에서는 로마 역사의 여러 영웅들과 정치인들, 예컨대 카이사르, 클레오파트라, 마르쿠스 황제와 같은 인물들을 살펴보는 즐거움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신은 신발을 신지 않는다.
단편적인 지식이긴 하지만 미술관에 가서 그리스 로마 조각들을 볼 때 한 가지 알아 두면 재미있는 것은 신은 신발을 신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스 로마 조각을 보다가 신발을 벗고 있는 조각이 있다면 그 조각상은 신을 조각한 것이라고 보면 거의 틀리지 않다. 이것은 그리스 사람들은 신은 불멸Immortal의 존재이기 때문에 신을 벗어도 상처가 나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만 로마의 정치인들 중에도 신을 벗고 있는 조각상들이 있는데, 이는 사후 신격화된 경우로 이해할 수 있다.
동, 서 로마의 분열과 그리스 로마시대의 종료, 그리고 중세의 시작
이렇게 그리스 로마시대와 그 시대의 미술을 알아보았다. 다음 시대는 중세시대이다. 중세는 로마제국의 멸망과 함께 시작된다. 로마제국은 멸망하기 직전 동로마와 서로마로 분리되는데 전 유럽을 통치하던 로마가 동서로 분리되는 것은 당시로 보면 엄청난 사건이다. 지금 만약 미국이 서부와 동부로 갈라져서 두 개의 나라가 된다면 전 세계의 질서가 바뀔 텐데 그와 비슷하지 않았을까.
분리된 두 개의 로마 중에, 서로마는 영국, 이탈리아, 프랑스, 독일, 스페인 같은 지역의 서유럽 지역을 지배하게 되었고, 동로마는 새로운 수도인 콘스탄티노플(현대 터키의 이스탄불)을 중심으로 한 터키, 불가리아, 그리스, 시리아 지역 등의 동유럽을 차지하게 된다. 동유럽과 서유럽은 지금도 상당히 분위기가 다른데 어느 정도는 당시 제국의 분열에서 영향을 받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거대한 로마제국이 동서로 분열한 이유는 제국 말기가 급증한 야만족의 침입 때문이었다. 쳐들어오는 북방 야만족을 방어하기 위해서 로마는 어쩔 수 없이 동서로 분리해서 방어하기 시작했고 이것이 제국 분열의 단초가 된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분리해서 방어하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제국의 수도인 로마가 476년 북방 야만족에 의해 점령당하면서 로마는 멸망하게 된다. 그리고 중세가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