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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신영 Jan 05. 2019

5장 모더니즘의 또 다른 줄기, 다다

다다이즘, 초현실주의, 팝아트

               

<뒤샹의 ‘샘’ 1917>

                                                          

또 다른 줄기

모더니즘 페인팅이 근대 미술의 중앙에서 가장 굵은 줄기라면 그 옆에서 자라난 또 다른 줄기가 있다. 이는 뒤샹의 '샘'으로 유명한 다다이즘Dadaism의 줄기이다. 이 줄기는 나중에 초현실주의와 팝아트로 자라나면서 모더니즘 페인팅과 함께 근현대 미술의 또 다른 축을 담당해 왔다. 

그런데 다다이즘의 줄기는 모더니즘 페인팅과는 전혀 다른 색채를 띄고 있었다. 가장 쉽게 표현하면 모더니즘 페인팅이 순수성을 추구하는 동안, 다다이즘의 줄기는 세속성을 추구했다는 것이다. 

모더니즘 페인팅은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회화란 무엇인가?'라는 가장 근본적인 질문을 쫓아가는 과정이었다. 이는 예술을 위한 예술Art for Art's sake, 즉 세상과 상관없이 예술 내부에서 답을 구하는 경향이다. 이 경향은 외부랑 단절된 채 가장 완벽한 의미에서의 회화의 정답을 구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순수성을 추구하는 미술로 이해할 수 있다. 

반면 다다이즘의 흐름은 내부가 아닌 외부 세계와 더 관련이 깊었다는 점에서 세속적이었다. 다다이즘은 예술 쪽에서는 드물게 시대적 사건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등장한 미술이었기 때문이다. 그 시대적 사건은 인류의 역사에서 가장 끔찍했던 전쟁, 1차 세계대전이었다. 그리고 다다이즘이 끝나고 그 흐름을 이어받은 후대의 미술들도 계속해서 세속적인 경향은 남아있었다. 

둘의 관계는 마치 '흑과 백' 혹은 동양의 '음과 양' 아니면 헤겔 철학에서 말하는 '정반합'에서 '정'과 '반'처럼 이항대립의 관계로 보이기도 한다. 이렇게 서로 다른 두 줄기는 서로 얽히고설키며 근대미술을 점차 완성시켜 왔다.

이 장에서는 또 다른 줄기였던 다다이즘의 흐름에 관해 살펴볼 것이다. 세속적인 미술이었던 만큼 주변 시대상황에 대해서도 같이 서술함을 미리 말씀드린다.

 


<라울 하우스먼의 ‘The Art Critic’, 1919-20>


1. 다다이즘 

인상주의Impressionism가 모더니즘 페인팅의 출발점이었다면 다다이즘Dadaism은 또 다른 줄기의 출발점이다. 다다이즘은 대중들에게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미술사조이지만 알아도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미술 중 하나이다. 대표 작품은 뒤샹의 '샘'이다. 뒤샹은 소변기를 전시장에 가져다 놓고는 예술이라고 주장했다. 이 주장은 지금 시점에서 봐도 황당하게 느껴지지만 이 작품이 처음 전시되었던 시대의 관점에서 보면 훨씬 더 납득하기 어려운 미술이다. 피카소의 입체주의가 1907년에 처음 나왔고, 뒤샹의 '샘'이 뉴욕에 처음 전시된 것이 1917년이었다. 피카소의 입체주의도 아방가르드 미술로 불리며 당시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는데 고작 10년 뒤에 소변기가 작품이라고 주장하는 황당한 예술이 등장한 것이다. 


다다이즘의 시작 - 1차 세계대전에 대한 저항

뒤샹은 왜 소변기를 예술이라고 주장한 것일까. 상식의 수준에서 생각해 보면 소변기를 두고 예술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도저히 말이 되지 않는다. 직관적으로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앞서 살펴본 모더니즘 페인팅의 잭슨 폴록도 마찬가지였지만 둘의 성격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잭슨 폴록의 그림을 보고 사람들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정보 부족에서 오는 '오해'였다면, 다다이즘에서 말이 되지 않는다고 느끼는 불합리는 그 자체로 '의도'였기 때문이다. 

다다이즘은 인류사에 가장 끔찍한 전쟁이었던 1차 세계대전에 대한 저항으로 나타난 미술이다. 1차 세계대전은 1914~1918년에 있었고 다다이즘은 1916년 처음 등장했으니까 다다이즘은 전쟁통에 탄생한 예술사조다. 미술사 전체를 뒤져봐도 전쟁통에 등장한 예술사조는 없었으니까 다다이즘은 매우 독특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다다이즘의 미술에서 느껴지는 '불합리'는 바로 그 전쟁에 대한 저항의 의미로 나타난 '불합리'였다. 쉽게 표현하면 일종의 '비행'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다. 


 

<백열전구는 1879년, 최초의 기관총은 1889년에 발명되었다. 우리가 지금 누리는 기술 문명은 이시기쯤 완성되기 시작했다>


1차 세계대전의 의미 - 전구와 기관총은 동시에 태어났다

그렇다면 1차 세계 대전을 당시 예술가들은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1차 세계대전이 발생한 시기는 근대 과학 문명이 처음 꽃피는 시기와 일치한다. 전구가 처음 발명되어 어두운 밤을 밝히기 시작한 것도 이 시기였고, 자동차와 비행기가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도 이 시기였다. 그리고 초기의 형태이긴 하지만 영화, 음악, 라디오 등의 대중문화도 이때 처음 나타나기 시작했다. 쉽게 말해 우리가 지금도 누리고 있는 '현대식 문명'이 처음으로 세상에 등장한 시기인 것이다. 당시의 사람들은 새로 등장한 신기한 문명들을 목격하면서 과학 문명의 발달이 인간의 삶을 점점 살기 좋고 편하게 만들어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런 전구, 자동차, 세탁기처럼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해 주는 기계들과 동시에 인류사에 처음 등장한 것이 바로 기관총, 폭탄, 탱크, 전투기와 같은 대량 살상 무기들이었다. 우리는 이런 전쟁무기들에 너무 익숙하기 때문에 당연히 원래 있는 것처럼 생각하지만 사실 이런 현대전의 무기들은 1차 세계대전 때 처음으로 세상에 전면 등장하였다. 그리고 이 전쟁기계들 덕분에 인류는 역사 이래 최초로 백만million 단위로 사망자의 숫자를 세어야 하는 전쟁들을 치르게 되었다. 1차 세계대전의 사망자는 16 millions, 1600만 명이었다.  

    

이유가 있는 죽음이었는가?

1차 세계대전에서 죽은 사람의 숫자는 1600만 명에 달한다. 그렇다면 이렇게 많은 숫자의 희생자들은 무엇 때문에 희생된 것으로 봐야 할까. 1차 세계대전의 원인에 대해서는 그간 많은 학자들의 연구가 있었지만, 종합해 보면 결국 식민지 싸움, 유럽 제국주의의 패권다툼에 불과했다. '인권'이나 '자유' 같은 어떤 목숨 걸고 지켜야 할 만한 정의를 위해 싸운 것이 아니라 그저 국가 간의 힘 싸움, 그리고 그 뒤에 있는 경제 권력들의 돈 싸움에 휘말려서 1600만 명이라는 어마어마한 숫자의 사람들이 희생당한 것이다. 생각해 보면 당시 전쟁에 참여한 수많은 젊은이들이 모두 복잡한 국제 정세를 이해하고 있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어쩌면 이 중 다수는, 자신이 왜 죽어야 했는지 정확히 이해조차 하지 못하고 죽은 것인지도 모른다.


        

<최초의 다다이즘 전시회, 베를린, 1920년, 천장에 돼지머리를 한 독일군 장교 모형이 걸려있다>

근대Modern 문명에 대한 지식인들과 예술가들의 생각

이런 전쟁이었으니 저항의 움직임이 있는 것은 당연하다. 이 시대 현상을 목격한 지식인들과 예술가들은 근대 문명에 대해 매우 비판적인 자세를 취하기 시작한다. 우리를 풍요롭게 만들어 줄 것으로만 알았던 과학 기술 문명이 대량학살의 도구도 동시에 만들어 내고 있는데 이런 문명을 인정해 줄 가치가 있냐는 것이다. 

이렇게 근대 과학 기술 문명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은 당시 유럽의 지성 세계에 전반적으로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이 흐름 속에서 등장한 예술운동이 바로 다다이즘이었다. 다다이즘은 1차 세계대전의 비극을 목도한 예술가들에 의해 근대 문명에 저항하는 예술 양식으로 나타난 것이다. 


합리성에 저항하기 위한 비합리성

근대문명에 저항하는 예술이었던 다다이즘은 '비합리성과 반이성'이라는 기본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르네상스와 계몽주의 이후 유럽사회의 중심 사상이었던 '합리성과 이성'의 정반대의 길로 간 것이다. 다다이스트들은 왜 합리성과 이성을 비판해야만 했을까. 다다이스트들의 생각을 이해하기 위해 이런 질문해 볼 수 있다. 

'1차 세계대전의 비극은 비합리적 결정들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발생했는가?'

1차 세계대전은 각 국가의 정치인들과 경제 권력들이 각자 자기 나라의 권익을 지키고 타 세력의 확장을 억제하기 위한 나름대로의 '합리적 결정들'에 의해 발생했다. 예를 들어 어느 국가가 우리를 공격했다면, 우리도 그에 맞서서 반격해야 균형이 맞는다와 같은 상식적인 결정들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1차 세계대전의 발생은 광기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앞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1차 세계대전에 등장한 수많은 전쟁 무기들은 근대 과학을 기반으로 탄생한 것인데, 근대 과학은 르네상스 이후 서양사회의 중심 사상이 된 '합리주의와 이성'의 결과물이었다.

인류를 행복으로 이끌어 줄 것으로 믿었던 이 '합리주의와 이성'의 결과물들은 결국 1,2차 세계대전이라는 인류사 최악의 전쟁을 일으키는 바탕이 되었다는 것이 다다이즘의 생각이었다. 그래서 다다이즘은 이 '합리성'에 저항하기 위하여 '비합리성'을 중심 가치로 선택하게 된 것이다. 


다다이즘은 전쟁에 저항하는 '비합리'의 맥락이다

뒤샹의 '샘'이나 아니면 라울의 신문지를 오려 붙여 만든 콜라주는 이 '비합리성'을 바탕으로 나타난 다다이즘의 예술이다. 소변기를 고급 예술의 상징 같은 곳인 미술관에 가져다 놓고 예술이라고 주장하는 행위, 혹은 신문지를 대충 오려 붙여서 만든 그림을 예술이라고 주장하는 행위는 전혀 합리적이지 않은데, 사람들이 이런 작품들을 보면서 예술은 사기라고 느끼는 것, 혹은 그저 몇몇 예술가의 치기 어린 장난처럼 여기는 것 자체가 의도였던 것이다. 이것은 1차 세계대전의 참혹함을 목격한 예술가들이 근대문명의 '합리성'에 저항하는 의미로 내세운 '비합리성'의 예술, 다다이즘의 의도였다.


다다이즘의 끝과 이후

이렇게 다다이즘이라는 예술 사조는 1차 세계대전에 대한 저항으로 나타난 사조였다. 하지만 결국 1차 세계대전이 1918년 끝나면서 다다이즘도 자연스럽게 사라지게 된다. 저항할 대상이 없어지면 사라지는 것이 저항세력의 숙명이기도 하다. 다다이즘은 전쟁 당시 중립국이었던 스위스 취리히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는데 전쟁이 끝나고 취리히에 모여 있던 예술가들은 각자 고국으로 돌아가서 개별적인 다다이즘 활동을 벌이기도 했지만 그렇게 큰 반향을 일으키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의미 있는 활동을 이어간 예술가는 뒤샹이 거의 유일하다.

      


<살바도르 달리의 '기억의 지속' 1931, 호안 미로의 '할리퀸의 축제' 1924>

2. 초현실주의

다다이즘은 전쟁과 함께 끝났지만 이후 이 흐름은 초현실주의Surrealism에서 이어받게 된다. 우리에게는 살바도르 달리의 '흘러내리는 시계 그림'으로 유명한 초현실주의는,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근대문명에 대한 저항'의 목적을 가지고 있었고 다다이즘의 생각을 그대로 이어받은 예술이다. 실제로 다다이즘에서 활동했던 많은 예술가들은 나중에 초현실주의로 옮겨가서 '저항의 활동'을 이어나갔다. 

초현실주의는 살바도르 달리나 호안 미로,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들로 유명하다. 초현실주의는 크게 두 가지 계열로 구분되는데 왼쪽 달리의 그림 같은 '꿈을 그리는 초현실주의'와, 오른쪽 호안 미로의 '낙서 같은 초현실주의'다.

이 두 계열의 초현실주의는 이미지는 다르지만 모두 '무의식'의 세계를 그리려고 노력했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무의식Unconsciousness은 프로이트가 생각해낸 심리학 개념인데 왜 갑자기 미술에 등장한 것일까. 이는 초현실주의에서 무의식을 인간의 이성이나 합리주의에 반대되는 개념으로 보았기 것이다. 다다이즘의 '반이성과 반 합리주의'를 이어받은 것이다. 


꿈을 그리는 초현실주의

왼쪽 살바도르 달리의 그림을 보면 시계가 흘러내린다던가, 아니면 사람의 눈, 코, 입 모양이 이상하게 바닥에 널브러져 있다던가 하는 알 수 없는 이미지들로 가득하다. 이는 달리가 꿈속에서의 이미지, 혹은 꿈속에서 봤을법한 이미지를 그려낸 것이다.

달리는 왜 이런 '꿈같은 그림'을 그린 것일까. 이는 우리가 꿈속에 겪는 일들은 인간의 무의식의 반영이고, 이 무의식은 근대의 이성이나 합리성의 반대에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예컨대 꿈에서 나타나는 상상의 세계를 이성적, 혹은 합리적 세계라고 할 수 있을까. 우리는 꿈에서 갑자기 하늘을 난다거나 아니면 동물과 대화를 한다거나 하는 전혀 맥락이 맞지 않는 일들을 겪게 되는데, 이렇게 꿈속에서 겪게 되는 경험들은 전혀 개연성이 없다는 점에서 이성이나 합리성과 거리가 멀다. 초현실주의 화가들은 이렇게 근대의 이성과 합리에 저항하는 방법으로 무의식의 꿈을 그리는 방법을 택한 것이다. 


낙서 같은 초현실주의 - 자동기술법Automatism

또 다른 초현실주의는 낙서 같은 느낌의 초현실주의이다. 미술 초심자의 입장에서 보면 달리의 시계가 흘러내리는 그림은 뭔가 꿈같은 느낌이 나니까 초현실주의 그림으로 이해해도, 오른쪽 호안 미로의 낙서 같은 그림은 왜 초현실주의로 불리는지 의아해할 것이다. 하지만 두 그림 모두 인간의 '무의식'을 표현하려고 했다는 점에서 본질은 같다. 

호안 미로를 포함현 몇몇 초현실주의 화가들은 자동기술법Automatism이라는 기법을 사용했다. 자동기술법은 쉽게 말해 머릿속을 완전히 비우고 손이 흘러가는 대로 그림을 그린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학교에서 수업을 들을 때 멍하니 아무 생각 없이 노트에 펜을 끄적거리며 무언가를 그린다면 이 낙서 무엇을 의미할까. 아무 의미 없어 보이는 낙서들은 어쩌면 우리가 평소에 깨닫지 못하는 우리의 내면, 즉 무의식이 밖으로 꺼내져 나오는 것일 수도 있다. 

호안 미로는 같은 방식으로 아무 생각 없이 낙서를 그리듯 그림을 그렸다. 그리고 이 같은 그림이 인간 내면에 숨겨진 '무의식'을 꺼내어 보여준다고 생각했다. 마찬가지로 이성과 합리에 저항하는 의미로써 '무의식'을 그린 것이다. 


<르네 마그리트, '빈 서명' , 1965>


이렇게 초현실주의는 다다이즘에서 근대의 '이성과 합리주의'저항하는 흐름을 이어받은 사조이다. 한편 초현실주의는 문학이나 연극 등 다른 여러 문화의 분야와 함께 나타난 종합적인 예술운동의 형태를 뗬다. 실제로 초현실주의 운동에서 가장 중심적인 역할을 했던 사람은 앙드레 브르통André Breton이라는 시인이었다. 

하지만 초현실주의에서 대중적으로 가장 많이 알려진 분야는 아무래도 미술 쪽이었다. 이는 초현실주의의 그림들이 이미지 자체로 매우 매력적이기 때문일 텐데 지금도 르네 마그리뜨나 샤갈 같은 초현실주의 그림을 좋아하는 사람은 많다. 아마도 사람들은 사상적 배경보다는 초현실주의 그림 자체에서 느껴지는 신비한 느낌에 끌리는 듯하다. 


3. 유럽 미술의 종언

초현실주의는 서양사에서 전간기(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 사이의 기간)라고 부르는 시기에 나타났다. 하지만 초현실주의를 끝으로 유럽에서는 한동안 더 이상 새로운 사조가 나타나지 않았는데, 이는 1939년 2차 세계대전이 터졌기 때문이다. 앞장에서 설명하였던 바와 같이 파리를 포함한 유럽의 주요 도시들은 완전히 폐허가 되었고 유럽 사회는 더 이상 미술을 발전시킬만한 힘도 여유도 사라지게 된다. 그리고 미술의 중심은 파리에서 미국 뉴욕으로 이동하게 된다.

                                               

4. 뒤샹의 미국의 다다이즘

다다이즘의 흐름은 유럽에서는 끝이 났지만, 뒤샹을 통해 미국으로 건너간 후 조금 더 이어지게 된다. 뒤샹이 1차 세계대전이 한참이던 시기에 다다이즘을 들고 유럽을 떠나 미국으로 이주했기 때문이다. 미국은 1차 세계대전 중에 가장 안전한 나라였기 때문에 이 시기에는 뒤샹 말고도 많은 유럽의 예술가들이 전쟁을 피해 미국으로 이주하기도 했다. 


뒤샹의 예술세계 레디메이드Ready-made

그런데 뒤샹의 다다이즘에서 눈여겨봐야 할 부분이 있다. 뒤샹의 다다이즘에서는 '공산품'을 예술의 소재로 삼았다는 것이다. 뒤샹은 '샘'을 포함한 자신의 미술을 레디메이드Ready-made라고 불렀는데 이는 아마도 이미 만들어져 있는 공산품을 사용한다는 의미로 그렇게 이름을 붙인 것으로 보인다. 공산품을 미술에 사용한 것은 유럽의 다다이즘에는 없었던 현상이고 미술사에서도 처음 나타난 현상인데 후대에 미친 영향을 생각해 보면 뒤샹의 미술에서 가장 중요한 특징이라고 할만하다.

그렇다면 뒤샹은 왜 공산품을 사용하기 시작했을까. 뒤샹은 이를 두고 유럽 다다이즘의 연장선이라고 주장했다. 다다이즘이 유럽의 근대문명에 저항하는 것과 같은 맥락으로 '유럽의 전통 미학에 대한 저항'이라는 것이다. 뒤샹이 말한 '전통 미학에 대한 저항'의 의미는 유럽 예술은 역사 이래 줄곧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미술'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에 저항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아무래도 소변기를 예술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전통 미학의 방식은 아니기 때문이다. 


의심

하지만 뒤샹의 말대로 정말 공산품의 사용을 '전통 미학에 대한 저항'으로 읽을 수 있을까. 뒤샹이 자신의 예술에 대해 주장한 것이니까 그대로 믿어주고 싶지만 여기서는 짧게 반론을 주장하려고 한다.  

의심의 이유는 뒤샹이 동료 예술가이자 조각가였던 브랑쿠시에게 했던 언급 때문이다. 뒤샹은 브랑쿠시와 함께 1912년 파리 그랑 팔레에서 열린 비행기 전시회에 참석하여 전시된 비행기의 프로펠러를 보며 이렇게 말했다. 

“이것은 하나의 조각이야! 이제 조각은 이보다 못해서는 안 돼.”

“이것 봐, 이제 회화는 망했어, 누가 이 프로펠러보다 아름다운 것을 창조할 수 있을까? 말해봐 자넨 할 수 있나?”

이 말을 해석하자면 이렇다. 이 시기는 산업혁명 이후 수많은 공산품들이 본격적으로 시장에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 시점이다. 그런데 상품을 많이 팔기 위해선 최대한 세련된 디자인으로 생산될 필요가 있다. 그렇게 해서 생긴 전공 분야가 '산업디자인'이다. 그러니까 뒤샹이 이런 말은 한 이유는 이렇게 세련된 아름다움을 갖춘 제품들이 공장에서 수도 없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 상황에서 하나씩 손으로 만드는 전통적 미술에 미래가 과연 있느냐는 것이다. 그리고 뒤샹은 1년 뒤쯤인 1913년에 최초의 레디메이드 작품 자전거 바퀴를 만들었다. 추측이기는 하지만 뒤샹은 새롭게 쏟아져 나오는 산업 제품들의 아름다움을 깨닫고는 이것을 순수예술로 가져오기 위해 레디메이드Ready-made라는 개념을 만들어 낸 것일 수도 있다. 



<뒤샹의 '병 건조대' 1914, '자전거 바퀴' 1913>


아름다움의 배제

위의 두 작품은 가장 초기의 레디메이드들이다. 이 두 작품을 정말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전통 미학에 대한 저항'으로 이해할 수 있을까. 왼쪽의 '병 건조대Bottle rack'를 보면,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예컨대 샹들리에 같은 공산품 특유의 구조적인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다. 뒤샹이 이 아름다움 때문에 병 건조대를 레디메이드로 선택했다고 해도 크게 이상하지는 않아 보인다. 자전거 바퀴도 마찬가지로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고전회화나 조각의 아름다움과는 다르지만 분명 세련된 아름다움이 존재한다.

하지만 뒤샹은 병 건조대나 자전거 바퀴를 아름다움 때문에 선택한 것은 아니라고 했다.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은 전통 미학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병 건조대와 자전거를 레디메이드로 선택한 구체적인 이유는 무엇인가'라고 물을 수밖에 없는데 사실 뒤샹은 이에 대해 똑 부러지게 대답하지는 못했다.  


전통 미학에 대한 저항 vs 산업화 시대의 필연적 미술

뒤샹의 레디메이드가 근대 산업사회에서 공산품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면서 시작된 게 아닐까 하고 의심해 보는 것은 기본적으로는 뒤샹이 브랑쿠시에게 했던 언급 때문이지만, 시대적 변화를 생각해 보면 필연이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뒤샹 이후에 나타난 팝아트를 이해하기 위해서도 한 번쯤은 생각해 볼 문제이다.

미술은 항상 시대를 반영한다. 뒤샹이 레디메이드를 처음 만들었던 시대는 산업혁명 이후 본격적으로 공산품이 세상에 쏟아져 나오는 시기였다. 그런 시대라면 뒤샹이 아니더라도 분명 '공산품'을 예술로 활용하는 예술가가 탄생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뒤샹의 주장처럼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전통 미학에 저항하기 위해 공산품을 선택했다'라고 이해하는 것보다는, 공산품이 넘쳐나는 산업화 시대에 '공산품의 아름다움을 미술에 이용하는 예술가가 등장했다'라고 해석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물론 이 반론은 뒤샹의 주장에 의심을 제기하는 이 책에서의 주장이므로 뒤샹의 주장을 받아들일지 아니면 반론을 받아들일지에 관해서는 독자들에게 남겨두고 싶다.


뒤샹 이후

뒤샹은 사실 예술가로 오래 활동하지 않았다. 뒤샹의 작품 수는 손에 꼽을 만큼 적은 편인데 이것은 뒤샹이 1923년 이후로는 작품 활동을 전혀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술사에서 그렇게 유명하지만 실제로는 고작 10년 정도 밖에는 활동을 하지 않은 것이다. 뒤샹은 이렇게 금방 미술을 그만두고는 '프로 체스 기사'로 활동하였다고 한다. 이 모습이 꼴 보기 싫었던 뒤샹의 아내 리디에가 체스 말을 접착제로 판에 붙여버렸는 이야기도 있으니까. 

하지만 뒤샹이 중요한 이유는 뒤샹이 예술가로 얼마나 많이 활동했느냐 보다 후대에 끼친 영향 때문이다. 뒤샹의 다다이즘은 이후 미국의 팝아트Pop Art라는 유산을 남겼다. 뒤샹의 예술에서 가장 큰 특징은 소변기나 자전거 바퀴 같은 공산품을 최초로 예술의 소재로 삼았다는 것인데, 팝아트의 기본은 산업사회의 대중문화와 공산품들을 예술로 활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엔디 워홀의 '캠벨 수프 캔2' 1969, 클래스 올덴버그의 ‘톱, 톱질’ 1996>

4. 팝아트

팝아트는 잭슨 폴록의 추상표현주의와 함께 미국을 대표하는 미술이다. 팝아트에 대한 가장 쉬운 해석은 산업사회의 공산품과 예술, 또는 대중문화와 예술의 결합이다. 가장 대표적인 예술가는 엔디 워홀(Andrew Warhol, 1928~1987)인데 엔디 워홀은 마트에서 판매하는 캠벨 통조림, 아니면 코카콜라 같은 미국 자본주의를 상징하는 공산품들을 그렸다. 또 다른 예로는 우리나라의 청계천에 설치된 다슬기 조각으로 유명한 클래스 올덴버그(Claes Oldenburg, 1929~)가 있다. 그는 톱이든 연필이든 공장에서 생산된 일상의 사물들을 극단적으로 크게 만드는 조각가로 유명하다. 

팝 아트는 미국을 대표하는 미술인만큼 위 두 명 외에도 다양한 많은 예술가들이 있지만 모두 근본적으로는 공산품이나 대중문화를 예술의 소재로 사용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공산품을 처음으로 예술의 소재로 사용한 사람은 뒤샹이었으니까 미국의 팝아트는 근본적으로 뒤샹의 유산 위에 있는 것이다.

만약 미술이 시대를 반영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미국이 양차 대전 이후 전 세계 대중문화와 자본주의 시장을 잠식해나가는 시점에 팝아트가 등장하는 것 역시 필연적이다. 팝아트는 '미국식 자본주의'를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미술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미국식 자본주의'가 여전히 전 세계적 주도권을 놓치지 않고 있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팝 아트는 적어도 당분간은 미술사에 주류 예술의 한 경향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실제로 여기서 다루지는 못했지만 현대의 예술가들 중에 '팝 아트의 경향'을 가진 예술가들은 여전히 많다. 


팝아트는 다다이즘의 줄기의 끝 지점이다

팝아트는 다다이즘 줄기의 끝나는 지점이다. 이 흐름을 다시 정리해 보면 1차 세계대전에서 발생한 다다이즘이 그 시작이었고 유럽에서는 초현실주의로 이어졌다. 그리고 뒤샹이 미국으로 다다이즘을 들고 온 이후 미국 팝아트의 탄생에 까지 영향을 미치는 일련의 과정이다. 

이 흐름의 마지막이었던 팝아트의 탄생 시기는 1960년대였고 이 시기는 잭슨 폴록과 그린버그가 근대회화의 정점을 이룬 시기와 거의 비슷하다. 그러므로 모더니즘 페인팅과 다다이즘의 줄기는 모두 근대 미술의 끝자락에서 만난 것이다. 두 줄기는 시작점도 달랐고 서로 독립적으로 발전했지만 결국 비슷한 시기에 끝 지점에 도달했다는 것이 재미있다. 마치 포스트모더니즘 미술의 등장을 예견이나 한 듯이.


근대 미술Modern Art의 두 줄기, 숭고와 복제

모더니즘 페인팅과 다다이즘의 줄기는 근대 미술사에서 가장 중요한 두 줄기이지만 서로 상반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어떤 비평가는 근대미술의 두 줄기를 숭고의 미학과 복제의 미학으로 해석하려고 했다. 그리고 이 해석은 두 장에 걸쳐 다룬 근대미술을 이해하는 실마리가 될 수 있다.

여기서는 이 두 미학에 대한 해석을 할 만큼의 여유는 없지만 나타난 현상만 보면 다음과 같다.

모더니즘 페인팅은 '회화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 다르게 표현하면 가장 완벽한 회화를 완성하려고 했다는 점에서 가장 순수한 미술이었다면, 다다이즘의 줄기는 시대사와 직접적으로 얽혀있다는 점에서 세속적 미술이었다. 

미학적으로 보면 모더니즘 페인팅은 철학적이고 숭고한 아름다움을 추구했다면, 다다이즘의 흐름은 대중문화와 복제의 미학을 추구했다. 

지향점을 보면 모더니즘 페인팅은 고급 예술(아방가르드)을 지향했다면 다다이즘의 미술은 대중 예술(키치)을 지향했다.

이 두 개의 줄기를 철학적으로 어떻게 정의하느냐, 혹은 시대적으로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근대 미술사에는 다양한 해석이 있을 수 있다. 어떤 식으로 해석하든 이 두 줄기가 근대 미술사를 이끌어 왔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근대 미술사에 정 반대의 예술 현상이 자연스럽게 나타났다는 것이 재미있다. 그렇게 보면 헤겔이 주장했던 '정반합'은 정말로 존재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항상 인간사에는 서로 정 반대의 경향이 어울릴 때 시너지가 발생하는 일들이 있어왔다. 엄격한 그리스와 관능적인 오리엔트가 만난 헬레니즘, 그리고 신 중심의 중세와 인간 중심의 근세 사이에 있는 르네상스가 그러했다. 마찬가지로 모더니즘 페인팅과 다다이즘의 줄기도 서로 반대의 성향을 가지고 있었지만 서로 얽혀 시너지를 만들어 냈다. 시민의 시대의 새로운 미술, 근대 미술Modernism Art을 꽃피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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