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ncent Van Gogh(1853-1890)
반 고흐의 출현
인상주의의 탄생 이후 근현대 미술사에는 다양성이라는 큰 흐름이 생겨났고, 이후 수많은 예술가들은 각자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구축하기 시작한다. 이 현상은 마치 어떤 폭발이 있은 후 거기로부터 수많은 가지들이 갑자기 거미줄처럼 넓게 뻗어 가는듯한 느낌에 가깝다. 그런데 이렇게 탄생하는 수많은 예술가들 중에 근현대 미술의 형성에 매우 중요한 영향력을 끼치게 되는 예술가가 있는데 이는 미술사에서 가장 위대한 예술가 중 한 명으로 꼽히는 화가,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다. 고흐는 스스로는 매우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아름답다고 밖에 평할 수 없는 그의 삶과 예술을 통해 후대의 미술세계의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반 고흐와 피카소
근대 미술사에서 가장 유명한 예술가를 두 명 꼽으라고 한다면 아마 피카소와 고흐가 될 것이다. 그런데 고흐는 여러 가지 의미에서 피카소와는 많이 달랐다.
우선 피카소는 입체주의Cubism를 탄생시켰다는 명확한 설명 가능한 업적이 있는 반면 고흐는 입체주의처럼 특정한 미술사조를 탄생시킨 것은 아니었다.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고흐는 후기인상주의로 구분하지만 후기 인상주의는 고흐가 만들어낸 사조가 아닌 인상주의 직후의 예술가들을 한데 모아놓은 집합에 불과하다.
그리고 피카소는 대외적인 활동을 많이 하며 세상에 이름을 알렸고 생전에도 많은 부와 명성을 누렸지만 고흐는 자살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유명해지지 못했으며 평생 가난 속에 그림을 그렸다. 사람들은 어쩐지 예술가는 죽고 나서야 가치를 인정받는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역사에 이름을 남긴 예술가들은 대부분 생전에도 유명했기 때문에 사후에도 유명한 것이다. 죽고 나서야 인정받은 예술가는 오히려 고흐가 거의 유일하다.
그리고 이런 생애의 차이는 사적인 삶에서도 드러난다. 많은 부와 명성을 가졌던 피카소는 수많은 여성들과 사랑을 나누며 쾌락적인 인생을 살았지만 고흐는 본인이 그토록 원했음에도 결혼을 하지 못했고 자식도 남기지 못했다.
근현대 예술가의 새로운 롤모델
이렇게 고흐는 피카소뿐 아니라 다른 여느 예술가들과 비교해 봐도 공적인 영역에서든 사적인 영역에서든 생전에는 주목할만한 업적이 보이지 않는다. 반복해서 말하지만 지금까지 역사에 이름을 남긴 예술가들은 대부분의 경우 생전에 이미 유명했기 때문에 사후에도 유명한 것이지 죽고 나면 누가 갑자기 주목해 주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생전에 별로 알려지지 않았던 고흐는 왜 사후에 특별히 주목을 받은 것일까. 그리고 이후 근현대 미술사에서 가장 중요한 예술가로 남은 이유는 무엇일까.
고흐는 활동했던 10년 남짓의 짧은 기간 동안 예술의 화신이 되었다고 표현해도 좋을 만큼 그림에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 그런데 그가 남겨놓은 수많은 아름다운 예술과 예술에 대한 그의 태도는 후대의 예술가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기게 된다. 고흐가 중요한 이유는 이 때문인데 후대의 예술가들에게 새로운 시대의 예술가는 어떤 예술을 창조해야 하는가, 혹은 예술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가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롤 모델'을 제시한 것이다.
인간사를 보면 항상 새로운 시대가 시작될 때에 맨 처음 그 흐름을 주도하는 뛰어난 창조적 소수가 태어나고 그 소수의 영향력이 그 시대가 끝날 때까지 지속되는 경향이 있다. 고대 그리스 미술에서는 프락시텔레스나 페이디아스 같은 천재 조각가들이 헬레니즘 조각의 정점을 이룩하고 나서 이후 수백 년 동안 수많은 조각가들이 이들을 모범처럼 쫓아가는 현상이 있었다. 그리고 근세에는 르네상스의 3대 거장 미켈란젤로와 다 빈치 그리고 라파엘로가 등장한 이후 수 세기 동안 후대 예술가들에게 변하지 않는 '롤 모델'로써 작동했다. 이런 현상은 꼭 미술이 아니더라도 인간사에 전반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으로 보인다. 현대의 예를 들자면 컴퓨터 기술이 처음 등장했을 때 빌 게이츠나 애플의 스티브 잡스 같은 사람이 나타나 혁신을 이룩하면 후발 기업가들이 이를 따라가는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가장 순수한 목적을 추구하는 예술가, 예술을 위한 예술
마찬가지로, 고흐 역시 근현대라는 새로운 시대의 초창기에 등장하여 이 시대의 예술가란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선례를 남기게 된다.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첫 미술사조로 인상주의가 탄생했다면, 새로운 시대에 맞는 새로운 예술가의 전형 역시 필요한 것이다. 고흐가 제시한 롤 모델은 예술을 위한 예술, Art for art's sake, 즉 '가장 순수한 목적의 예술을 추구하는 예술가'의 전형이다.
과거의 예술가들은 왕과 귀족의 권력에 얽매여 있었기 때문에 주로 권력의 만족을 위한 그림을 그리고는 했다. 하지만 시민혁명 이후 권력으로부터 풀려난 예술가들은 이제 스스로 예술의 목적을 찾아야 한다. 자신이 만족시켜야 할 대상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근현대의 예술가들은 누구를 위한 또 어떤 목적의 그림을 그려야 할까. 고흐는 근현대미술의 초창기에 등장하여 세상과 분리된 채 예술 내부에서 답을 찾는, '가장 순수한 목적의 예술을 추구하는 예술가'의 전형을 제시했다. 그리고 근현대의 예술가들은 부정적 의미에서든 긍정적 의미에서든 그 방향을 지금까지 쫓아가고 있다.
근현대 시민들의 예술가에 대한 인식
고흐가 영향을 끼친 예술가에 대한 인식의 변화는 대중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잘 생각해 보면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예술가의 상투형은 대부분 고흐로부터 출발한다. 가난하고, 소박하며, 순수하고, 진정성 있지만 광적이며, 속세를 경멸하는 예술가의 전형. 현대인들은 예술가들이란 원래 이런 존재일 것이라고 짐작하지만 사실 이런 예술가의 전형은 과거부터 이어져오는 전통은 아니었다. 예컨대 고전시대만 해도 예술가들은 괴팍한 광인이라기보다는 성실한 천재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고, 또 지금 동시대를 살아가는 여러 예술가들을 살펴봐도 꼭 예술가들이 이렇게 괴팍한 종류의 사람들이다라고 보기는 어렵다. 예술가들도 사실은 그저 성공하길 바라는 평범한 사람들 중 하나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대중들에게 '괴팍한 예술가'의 전형이 생긴 것은 그만큼 고흐의 삶이 강렬했고 사람들에게도 강한 인식을 심어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고흐의 예술의 아름다움
고흐는 현대에도 여전히 팬이 가장 많은 화가 중 한 명이다. 이는 무엇보다 그의 그림이 아름답기 때문일 텐데, 누군가 나에게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예술가가 누구냐고 물어보면 나는 주저 없이 빈센트 반 고흐라고 답할 것이다. 고흐는 미술사 전체를 통틀어 봐도 가장 아름다운 그림들을 탄생시켰고, 그의 그림들에는 그냥 보는 것만으로도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강한 힘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고흐의 그림은 테크닉이나 사실적 묘사의 관점에서 보면 뛰어난 그림이 아니다. 그래서 고전회화의 아름다움에 익숙한 사람들은 고흐의 그림에 대해 그저 '유명하니까 유명한 그림'이라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고전회화의 핵심이었던 사실적 묘사의 고정관념을 버리고, 이미지 자체로만 고흐의 그림을 볼 수 있다면 분명 또 다른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고흐의 짧은 전기
한편 고흐의 그림이 아름다운 이유는 그가 힘든 삶을 살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근대의 화가들에게 가난은 오히려 평범한 것이었지만 고흐는 그런 와중에도 유독 고생을 많이 한 느낌이다. 고흐의 편지들을 읽다 보면 마치 운명이 그를 이유 없이 자꾸 한쪽으로 몰아붙인다는 느낌이 드는데, 고흐의 예술은 그런 그의 고통스러운 삶이 양분이 되어 피어났다는 것이 특징이다.
그래서 고흐의 예술을 이해하기 위해선 그의 다난했던 삶을 먼저 이해할 필요가 있다. 아래 간단히 고흐의 전기를 정리해 놓았다.
고흐는 1853년 네덜란드에서 평범한 시골 목사님과 평범한 어머니 밑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 곤충 채집에 열을 올렸다는 것 말고는 특이할만한 기록은 없는데, 독서를 많이 하는 조용하고 평범한 학생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흐는 학교를 졸업하고 고흐의 삼촌 세명이 운영하는 프랑스의 구필Goupil&Cie이라는 미술 화랑에서 일하게 된다. 고흐의 동생인 테오Theo도 나중에 이 화랑에서 일하게 되니까 구필화랑은 반 고흐 가문의 많은 남자들이 일하는 곳이기도 했다. 그런데 고흐는 이 시절 화랑에서 일할 때 고객들과 미술에 관한 언쟁을 자주 벌였다고 한다. 결국 이 때문에 일을 그만두게 되는데, 사실 그림을 팔아야 할 사람이 고객과 언쟁을 벌이는 것 자체가 상식적이지 않다. 이는 고흐가 너무 강직한 인물이기도 했고 또 전반적으로 인간관계가 서툴었기 때문이다. 한편으론 이 시절 고흐가 왜 고객들과 언쟁을 벌였는가를 살펴보면 고흐의 인간성에 대해 어느 정도 유추해 볼 수 있다. 고흐가 평생에 걸쳐 가장 좋아했던 화가는 '만종'이나 '이삭 줍는 여인들'로 유명한 밀레였다. 밀레는 가난한 농부들을 주로 그린 것으로 유명한데 요즘으로 치면 '민중 미술가'라고 할 수 있다. 고흐는 이 민중미술가를 자신의 롤 모델로 삼은 것이다. 그런데 고흐가 미술 판매상으로써 고객들에게 판매해야 하는 미술들은 서민적인 그림이 아니라 살롱전과 같은 국전에서 수상한 일종의 '엘리트적 그림들'이었다. 계속적으로 가난한 자들을 향해 마음이 쏠려있었고, 인생의 의미에 대해 깊이 고민하는 진지한 사람이었던 고흐에게는 자신의 정체성과 맞지 않는 그림을 팔아야 하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삼촌의 화랑에서 해고당한 이후, 고흐는 23세에 감리교의 목사가 될 결심을 한다. 이때 정식으로 신학대학에 가서 신학공부를 하지 않고 시골로 내려가서 광부들에게 무작정 전도를 시작하게 되는데, 고흐는 광부들의 삶이 그토록 험난하고 고통스러운데 자신은 편안한 집에서 살면서 이들을 전도한다는 것은 위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스스로 헛간에 들어가서 짚더미 위에서 살면서 광부들을 구제하게 된다. 그런데 이런 고흐의 '너무 과한 헌신'을 '광신'으로 판단한 교단과의 마찰 때문에 이마저도 결국 그만두게 된다.
성직자가 되는 것도 좌절된 고흐는, 27세가 되는 1880년에 본격적으로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다. 인상주의가 세상에 나타 난지 10년이 채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동생으로부터 화가로써 성공할 때까지 재정적인 도움을 받기로 한 고흐는, 이때부터 37세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1890년까지 약 10년간 오로지 그림에만 몰두하여 살게 된다.
고흐와 여인들
고흐의 그림을 좋아하는 여성들은 많지만 실제 삶을 보면 고흐는 별로 이성에게 인기 있는 타입은 아니었던 듯하다. 고흐와 애정관계를 가졌던 여인들을 나열해 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1873년(20세 때) - 유진Eugenie, 구필화랑 런던지점에서 일할 때 만났던 하숙집 딸. 거절당한다.
1881년(28세 때) - 케이Kee, 과부, 질녀(외삼촌의 딸), 역시 거절당한다. 이 시절 테오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케이에게 너무 깊이 빠져서인지 편지마다 케이에 관해 쓰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거절당한 후에도 어떻게든 케이로부터 긍정적인 신호를 찾으려고 애쓰는 안타까운 모습이 보인다.
1882년(29세 때) - 시엔Sien, 임신한 창녀, 같이 1년 반 동안 동거하고 결혼도 하고 싶어 했지만 동생 테오와 아버지의 극렬한 반대로 결별한다. 둘은 헤어지고 나서 매우 고통스러워하였다. 이후 시엔은 다른 남자와 결혼했지만 고흐에게 '난 창녀예요. 꼭 물에 빠져서 세상을 끝내야죠'라고 했던 말을 실현하듯 고흐가 죽고 나서 몇 년 후쯤에 바다에 빠져 자살하게 된다.
1884년(31세 때) - 마르호트Margot, 이웃집 10년 연상의 여인. 이번에는 마르호트가 고흐를 사랑했지만 양가 부모의 반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마르호트는 절망해서 음독자살을 기도했지만 살아난다.
고흐는 이 4명의 여자 중 결국 어느 누구와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고흐는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이 친척이자 과부였던 케이kee와 결혼했다면 다른 방식의 삶을 살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아내와 아이를 돌보기 위해 안정적인 삶을 추구하는 평범한 남자로 살 수도 있었다는 뜻이다. 하지만 고흐는 케이로부터 거절당했고 이는 고흐의 가슴에 큰 상처를 남기게 된다.
고흐는 결국 결혼을 하지 못했다. 고흐가 인물화를 유독 많이 그린 것은 사람에 대해 항상 관심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랬던 고흐가 삶에서 가장 친밀한 인간관계를 맺는 배우자를 평생 얻지 못한 것은 너무나 안타까웠다고 밖에는 말할 수 없다. 한편 여기서도 고흐의 인간성을 추측해 볼 수 있는데, 케이는 과부였고 시엔은 과부이자 창녀였으며 마르호트는 41세의 노처녀였다. 고흐는 자기 자신도 비참한 삶을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뭔가 힘들어하는 사람들을 돕는 것으로 자신의 기쁨을 찾는 사람이 아니었을까.
고흐와 친동생 테오Theo Van Gogh
우리가 생전에 별로 유명하지 않았던 고흐의 삶에 대해 자세히 알 수 있는 이유는 고흐와 동생 테오 사이에 오간 편지들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고흐는 글을 매우 잘 썼기 때문에 편지들 자체만으로도 일종의 문학작품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한다.
편지를 읽어보면 고흐와 동생 테오의 각별한 관계를 느낄 수 있다. 착한 동생이었던 테오는 인간관계에 서툴고 무척 예민했던 고흐를 끝까지 품어주고 격려해준 사람이었다. 그리고 고흐의 삶에 대한 식견과 태도를 진심으로 존경하고 있었다. 자신의 아들의 이름을 형의 이름을 따라서 빈센트Vincent로 지어 주었을 정도니까. 고흐는 사람을 매우 좋아했기 때문에 사람을 관찰하는 그림을 많이 그렸지만 막상 사람들과 만나기만 하면 다투고 또 그로 인해 고통스러워하곤 했다. 그나마 테오가 이런 고흐를 붙들어 주고 있었기 때문에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고립되는 것은 막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추측이긴 하지만 고흐와 동생 테오가 사이가 좋았던 것은 오히려 서로 자주 만나지 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고흐와 테오는 한 때 파리에서 같은 집에서 지내기도 했는데 이 시절 테오는 아무리 존경하는 형이지만 꽤 스트레스를 받았던 모양이다. 나중에 서로 떨어진 이후로는 테오는 생업인 그림 판매하는 일이 바빴기 때문에 둘은 대부분 편지로만 소통했다. 고흐는 말년으로 갈수록 예민함이 극도로 심해졌으니까 어쩌면 이렇게 서로 떨어져서 살았던 것이 둘의 관계가 깨지지 않고 이어졌던 이유였을지도 모르겠다.
둘의 관계에서 가장 극적인 순간은 아마도 고흐가 자살한 이후 이어진 테오의 죽음일 것이다. 1890년 고흐는 테오가 아들을 얻었다는 소식을 듣고 오베르에서 동생이 사는 파리로 와서 얼마간 같이 지낸 뒤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한 달 뒤 고흐는 자살했다. 동생 테오는 고흐의 자살소식을 듣자마자 오베르로 한걸음에 달려왔고 임종을 지켜본다. 그리고 고흐가 자살한 후 6개월 뒤 갑자기 병으로 죽어 버리게 된다.
어떤 사람은 이 갑작스러운 태오의 죽음에 대해 고흐가 자살한 이후 테오 역시 삶의 의지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둘은 혼란스러운 시대에 서로의 꿈을 붙잡고 같이 이겨내 온 사이였기 때문이다. 테오와 고흐의 관계는 짧은 글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무언가가 있었다. 둘 사이는 평범한 형제관계라기보다는 '영혼의 동반자'라고 해야 할 만큼 각별했던 것이다.
고흐에 대한 오해 - 정신병
고흐는 전혀 미치광이가 아니었고, 겸손하며 사명감 있고, 독서를 매우 많이 하는 사려 깊은 사람이었다. 다만 인간관계에 서툴렀고 사람들은 그를 무시했을 뿐이다. 사람들은 고흐가 당시 친구 사이였던 고갱과 다툰 이후 갑자기 자신의 귀를 잘라버렸다는 스토리 때문에 미친 사람이라고 오해하는 경우가 많은데 (실제로 정신분열증으로 추정되는 병이 있었으니 문제가 있었던 것은 맞지만), 사실 이런 자극적인 스토리들은 고흐의 본질과는 거리가 멀다. 예컨대 귀를 자른 후에 테오에게 보낸 편지들을 보면 고흐가 행했던 미친 행동과는 이질감이 느껴질 만큼 이성적으로 자신의 상황에 대해서 이해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편지에서 고흐는 누구보다 자신의 정신병이 도지는 것에 대해 괴로워하고 있었고 이 병이 고쳐지길 바라고 있었다.
고흐가 이런 '광인'의 이미지를 갖게 된 것은 아무래도 매체에서 자극적인 이야기를 중심으로 고흐를 다루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하는데 이는 일종의 '예술가 신화'만들기다. 실제의 고흐는 평소에도 독서량이 상당히 많은 편이었고 테오와의 편지를 보면 삶과 문학, 인간에 대해 매우 깊이 고민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광인이라기보다는 교양인에 가깝다는 것이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동생 테오는 형의 이런 삶에 대한 식견을 매우 존경했기 때문에 자신의 아들의 이름을 형과 똑같은 이름인 '빈센트'로 지어준 것이다. 테오의 편지를 보면 존경하는 형의 이름을 아들에게 물려주게 된 것을 매우 기뻐하는 내용이 나오는데 아무리 가족이라도 형이 정말 미친 사람이었다면 자신의 아들에게 형의 이름을 물려주었을 리가 없다.
어떤 확신
고흐가 동료들과 했던 대화 내용이나 동생에게 쓴 편지를 읽어보면 고흐는 자신의 그림에 대해 완전히 확신에 차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고흐는 평생 동안 판 유화 그림이라곤 위의 붉은 포도밭 한 점뿐이었다. 사실 아예 안 팔리는 그림을 8~9년 정도 그리다 보면 '내 그림에 문제가 있다'라고 의심을 할 법도 한데, 고흐는 자신의 그림이 후대에 인정받을 것을 완전히 확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을 뻔뻔하다고 봐야 할까 아니면 예술에 대한 통찰력이 있었다고 봐야 할까. 어쨌든 실제로 고흐는 스스로가 확신했던 것처럼 죽은 후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인정을 받았다. 그리고 좀 더 정확히는, 죽기 얼마 전부터 이미 어느 정도 인정받기 시작하고 있었다. 고흐가 죽는 해인 1890년에 '르 메르퀴르 드 프랑스'라는 프랑스 미술 매거진에서 '고독한 화가, 빈센트 반 고흐'라는 고흐에 관한 특집기사가 실리기도 했기 때문이다. 아마 고흐가 몇 년만 더 살았더라면 경제적으로도 성공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생전에 그토록 바라던 일이었던 동생 테오에게 졌던 빚들을 갚는 것도 가능하지 않았을까.
노동자 같았던 고흐의 삶과 예술
테오와의 편지에 따르면 고흐는 마치 매일 노동자가 일하는 것처럼 열심히 그림을 그렸고, 완성 후에는 피곤해서 탈진해 버리곤 했다고 한다. 10년 동안 그린 총 2100점의 그림, 그중 900점 정도가 유화이고 고흐의 유화는 거의 생애 마지막 시기에 집중되어있으니까 대충 계산해 봐도 거의 한주에 3~4개의 유화를 완성한 꼴이 된다. 게다가 가난 때문에 끼니도 거르며 그림을 그리는 날도 많았으니 몸이 망가지는 것은 당연했을 것이다. 이렇게 미술에만 집중되어있는 고흐의 삶은 늘 외로웠고 말년에는 정신병까지 겹치면서 삶은 점점 고통스러워졌다.
고흐의 예술에 대한 해석 - 표현적 미술
고흐의 예술에 대한 해석을 살펴보자. 고흐의 예술이 위대해진 것은 얄궂게도 그가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기 때문이었다. 고흐의 예술의 가장 큰 특징은 '표현적 미술'이라는 것인데 이는 고흐의 힘든 삶을 살면서 그림을 그리면서 나타난 현상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표현적 미술'이라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위는 고흐의 '밀밭과 까마귀들'이다. 고흐는 이 그림을 그리고 얼마 후에 자살을 택했으니까 고흐의 유작이다. 아마 어떤 사람들은 이 그림을 보고 그저 거친 붓질밖에는 보이지 않는데 왜 대단한 그림이라고 말하는 걸까 하는 의문을 가질 것이다. 실제로 고흐는 테크닉적인 그림은 그리지 않았다.
고흐의 그림에서 중요한 것은 테크닉이 아닌 '내면의 표현'이다. 고흐는 말년에 심한 우울증을 가지고 있었고 주변 인간관계도 별로 좋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그림 그리는 것 밖에는 없었기 때문에 정신적으로 피폐한 상황에서도 쉬지 않고 그림을 그렸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고흐의 그림에는 그가 당시 느꼈던 삶의 고통이 그대로 묻어 나오게 된다. 위의 '밀밭과 까마귀들'도 테크닉의 관점으로 보면 특별할 것이 없어 보이지만, 이미지 자체로 고흐가 삶의 마지막 시기에 느꼈던 어떤 격한 느낌을 발견할 수 있다. 말하자면 그림을 그리는 화가의 감정이 그림에 그대로 '표현'되어 있다는 것인데 이것이 우리가 고흐를 '표현적 미술'의 시초라고 부르는 이유이다.
표현적 미술이 중요한 이유
그림에 화가의 감정상태가 드러난다는 것이 뭐가 그렇게 대단한 걸까 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잘 생각해 보면 서양 미술사 전체에서 그리스, 중세, 고전시대 어떤 시대의 미술도 이런 종류의 이미지를 만든 적이 없다. 과거의 그림들은 항상 눈에 보이는 대상을 그리는 것이었다면, 고흐는 눈에 보이지 않는 감정의 세계를 이미지화시킨 것이기 때문이다. 감정이 이미지화한다는 것은 다르게 표현하면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도록' 시도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시각예술의 발전사의 관점에서 보면 전혀 새로운 이미지 제작의 방법을 탄생시킨 것이 된다.
감정이 시각화한다는 것의 의미
표현적 미술, 즉 감정이 직접 시각화한다는 것의 의미를 좀 더 쉽게 이해하려면 고전회화와 비교해보면 된다. 인간의 '고통'은 감정이므로 눈에 보이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고전회화에서는 이런 눈에 보이지 않는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어떤 방법을 사용했을까. 고전 회화에서는 인간의 '고통'이라는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어떤 연극적 상황을 연출하고는 했다. 예를 들어 루벤스의 '예수의 채찍질당하심'를 보면 '고통'이라는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예수라는 인물이 고통을 겪는 상황을 연극처럼 연출하여 표현하는 간접적 방법을 택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고전회화의 표현과는 다르게 고흐의 그림에서는 거친 붓질 자체로 고흐 내면의 '고통'이라는 감정이 표현되어있다. 고흐가 이런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이 의도였는지 아니면 우연이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고흐는 어느 순간쯤부터 자신의 그림에 자신의 감정이 점차 투사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었고 이 현상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더 강화시켰다. 이렇게 인간의 내면을 직접 이미지화시키는 방법은 고흐를 통해 탄생했고 이후 계속 발전해 나간다.
고흐 이후의 영향력
고흐의 표현 방식은 이후 후대의 예술가들에 의해 계승되어 여러 '표현적' 그림들의 시초가 되었다. 고흐는 직접 사조를 만들지는 않았지만 이후 '절규'로 유명한 뭉크에 의해 표현주의Expressionism로 계승되었다. 뭉크의 '절규'에서 나타나는 구불거리는 이미지들은 그 자체로 고흐 말년의 작품들과 유사한 점이 많다.
그리고 고흐의 영향력은 이후 야수주의Fauvism, 독일의 다리파The bridge, 청기사파The blue rider, 그리고 후대의 수많은 추상 화가들에게로 계속 그 영향력을 이어 나가게 된다. 근대 화가들에게 후기인상주의 화가들의 그림은 그 자체로 교범이었는데 고흐의 그림을 본 많은 예술가들이 영향을 받은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독일 청기사파의 칸딘스키에서 최초의 추상화가 나오게 되니까 멀리 보면 고흐는 근현대 회화를 대표하는 장르인 추상화의 시초가 된 것이기도 하다.
나중에 설명하겠지만, 추상화Abstract Painting의 특징은 어떤 사물이나 풍경처럼 눈에 보이는 것을 묘사한 것이 아니고 인간의 내면세계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그 무언가를 그림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도록 그린다는 말은 앞뒤가 맞지 않는 말 같지만, 고흐 이후 미술계에는 이런 현상이 생긴 것이다.
감정이 시각화한다는 것 – 관객의 감상의 변화
고흐는 이렇게 표현적 미술의 첫 시작을 열게 된다. 표현적 미술이 중요한 이유는 보이지 않는 인간의 감정을 처음으로 이미지화시키기 시작했다는 의미도 있지만 한편 이는 감상하는 관객에게도 의미가 있다.
과거의 미술은 예술가들이 그린 그림을 관객들이 먼발치에 서서 감상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고흐의 미술을 볼 때, 사람들은 그냥 관조하는 것이 아니라 고흐의 그림에서 느껴지는 고통이나 고뇌와 같은 감정들을 그대로 자신에게 이입해서 보게 된다. 이 차이를 이해하기 위해 인상주의 미술의 감상과 고흐의 그림의 감상을 비교해 보자.
고흐의 그림에는 삶이 반영되어 있다.
인상주의 화가들은 주로 풍경을 많이 그렸다. 이는 고흐도 마찬가지였는데 근대 초기의 화가들은 공통적으로 풍경화를 많이 그렸다는 특징이 있다. 그래서 무엇을 그렸는가의 측면에서 보면 인상주의의 모네와 고흐는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우리에게 무엇이 전달되느냐의 관점에서 보면 두 예술가의 작품은 전혀 다르다.
우선 모네의 인상주의에서는 '빛을 그린다'는 아이디어가 가장 중요하다. 그래서 인상주의의 가치는 인상주의라는 그림의 '형식' 자체에서 발생한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우리는 모네가 어떻게 살았는지는 별로 관심도 없고 모네가 어떤 삶을 살았느냐에 따라 모네의 인상주의 그림들의 가치도 변동되지 않는다.
하지만 고흐의 예술에서의 가치는 '표현적 미술'이라는 형식만큼이나 고흐라는 예술가의 삶에서도 발생한다. 고흐의 고뇌하는 삶 자체가 그의 예술에 직접적으로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위의 두 성당을 비교해 보면 왼쪽의 그림에서 우리는 모네가 빛을 포착하여 그리려고 했다는 형식적인 아름다움을 보지만, 오른쪽 고흐의 그림에서는 구불거리는 성당과 길, 그리고 혼자 걷는 아낙을 보며 고흐의 내적 고뇌를 발견한다.
이렇게 내적 표현이 강조된 회화를 보는 것은 마치 어떤 연기자의 진실된 연기를 보는 것과 비슷하다. 형식적으로 완벽하게 훈련된 연기보다 오히려 마음이 담긴 연기를 보는 것이 더 감동적인 것처럼 고흐의 미술에도 그의 내면이 담겨있다는 것이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것이다.
감상자가 느끼는 것
'별이 빛나는 밤Starry night'은 고흐의 대표작이다. 사람들이 이 그림을 아름답다고 느끼는 이유 무엇일까. 고흐의 독특한 붓질이 시각적으로 흥미로워서 일까 아니면 그림에 고흐의 감정이 반영된 이미지에 동화되기 때문일까. 미술의 감상은 개인마다 다르겠지만 어떤 사람들은 이 그림을 보면서 고흐가 느꼈던 감정들, 생 레미의 정신병원 창문 밖을 보며 느꼈던 고흐의 외로운 감정을 느낄 수 있고 그 때문에 더 아름답다고 느낀다.
예술가의 삶이 예술에 반영되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관객들이 작품을 보면서 예술가의 감정을 공감하는, 전혀 다른 감상을 주기 때문이다. 고흐 이전의 예술에서 관객들은 일종의 '객관적 관찰자'였다. 예를 들어 모나리자 같은 고전의 명화들을 볼 때 관객들은 마치 채점자처럼 팔짱을 끼고 먼발치에 서서 그림의 아름다움을 관찰하고 판단하게 된다. 하지만 고흐의 그림을 볼 때 관객들은 단순히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고흐가 그림을 그리면서 겪었던 감정들을 느끼면서 보게 된다. 그래서인지 다빈치의 '모나리자'를 보면서 마음이 뭉클한 사람은 별로 없지만, 고흐의 그림을 보며 마음의 움직임을 느끼는 사람은 있다.
표현적 미술의 강점
관객의 마음을 움직이는 미술은 힘이 있다. 표현적 미술의 강점은 이것이다. 아마 지금까지도 고흐의 미술을 좋아하는 사람이 많은 것은 이 때문이 아닐까. 고흐의 미술은 관객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고전 미술과는 다른 종류의 아름다움과 감상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고흐는 오로지 자신의 인생을 온전히 소비하여 예술에 몰두하였다는 것 밖에는 없지만 결과적으로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과거의 미술들과는 전혀 다른 감상을 주는 미술을 만들게 된 것이다.
근현대 예술가의 롤 모델
고흐는 자신의 삶을 예술에 몰두시키는 것으로 '표현적 미술'의 경향을 만들었다. 그런데 이렇게 예술에 몰두되어 있는 그의 태도는 한편 근대 예술가들에게는 따라가야 가장 모범적인 태도로 여겨졌다. 생각해 보면 주변을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예술 자체에만 몰두되어 예술적 완성을 달성하는 예술가의 모습은 근대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과거의 예술가들도 물론 예술적 완성을 위해 노력한 것은 매한가지였지만 그들은 예술 자체의 완성만큼이나 자신의 고객이었던 권력자들을 만족시키는 것 또한 예술에서의 중요한 목표였다. 그 위대한 미켈란젤로나 레오나르도 다빈치 조차도 메디치 가문과 교황의 만족 없이는 예술을 지속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가운데 시민혁명 이후 권력으로부터 독립한 근현대의 예술가들이 가야 할 방향을 무엇이었을까. 고흐는 예술을 완성하는 것이 마치 신에게 부여받은 지상 명령인 것처럼 그림 그리는데만 모든 것을 다 바쳤는데, 가난과 배고픔도 상관하지 않았고 세간의 평가도 신경 쓰지 않았으며 오로지 예술적 완성을 위해 삶을 소비했다. 고흐의 예술에 대한 이런 태도는 그 자체로 근현대의 예술가들에게는 상징적인 역할을 했다. 근대의 예술가들은 이를 두고 Art for art's sake, 즉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권력에 얽매이지 않고 오로지 스스로만을 위해 존재하는 예술, 예술이라는 분야 자체에만 온전히 몰두하여 만들어내는 '완벽한 순수성을 지향하는 예술'의 경향인 것이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어떤 시대든 그 시대에 이룰 수 있는 것의 정점을 찍은 사람들은 시대의 초창기에 등장하여 후대의 사람들에게 계속적인 롤 모델로써 남게 된다. 고흐는 이러한 점에서 그 중요성을 강조할 수밖에 없다. 시민혁명 이후 근현대라는 새로운 시대에 등장하여 고전 미술에서는 존재하지 않던 새로운 예술가의 롤 모델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고흐의 마지막
고흐는 자살로써 생을 마감하게 된다. 들판에서 스스로에게 총을 쏜 후 바로 죽지 못하고 피를 흘리며 자신이 살던 집으로 돌아온 고흐는 이틀 동안 침대에 누운 채로 죽음을 기다리게 된다. 고흐의 소식을 듣고 파리에서 급한 마음에 달려온 동생 테오의 품에서 고흐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슬픔은 영원하다”였다고 한다. 고흐가 평소에도 편지를 통해 테오에게 말해왔던 것처럼 예술에 모든 인생을 바치고 얻은 것이라고는 피폐한 삶뿐이었고 결국 고통스럽게 생을 마감하게 된 것이다. 고흐가 자신이 후대에 얼마나 위대한 예술가로 인정받게 될지, 후대의 예술가들에게 얼마나 중요한 영향력을 끼칠지를 알았다면 그에게 조금이라도 위안이 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고흐는 결국 아무것도 누려보지 못한 채 자살로써 생을 마감하였다. 그리고 후대의 예술가들에게 귀중한 유산을 남긴 채 '영원히 꺼지지 않는 예술가'로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게 된다.
아래는 고흐의 수많은 편지 중 어머니께 보냈던 고흐의 편지이다. 이 장은 고흐가 예술가로서 후대에 어떤 영향력을 끼쳤는가에 대해 주로 다루었는데 실제로 고흐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고흐의 편지에서 더 잘 드러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편지는 고흐가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1890년에 쓰였다.
어머니께
어머니께서 지난 편지에서 누에덴에서 어머니가 한때 가지고 있던 것들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으로 다시 생각하게 되셨다고 해서 놀랐습니다. 이제는 그 모든 것 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기쁨으로 남겨주신다고요.
유리벽 너머로 보는 것처럼 흐릿하게, 저에게는 이 모든 것이 그렇게 흐릿하게 남아있습니다. 지나온 삶 속에서 왜 사람들과 헤어져야 하는지, 왜 죽어야 하는지, 사는 내내 계속 지속되었던 삶에 대한 혼란스러움 조차... 저는 이렇게 유리벽 너머로 보는 것처럼 밖에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저는 아마 계속 이렇게 외롭게 살아갈 것 같습니다. 저는 저와 가장 가까웠던 사람들조차도 이렇게 유리벽 너머에 있는 사람들을 보는 것처럼 대할 수밖에는 없었으니까요.
요즘 그리고 있는 그림들은 그래도 많이 조화로워진 것 같습니다. 느끼는 것을 말씀드리면 그림에는 그 안에서 찾을 수 있는 무언가가 있는 것 같습니다. 작년쯤 어디선가 읽었던 글에서 글을 쓰는 일이나 그림을 그리는 일은, 아기를 낳는 것과 비슷하다고 했던 내용이 기억이 납니다. 과거에는 항상 아이를 낳는 일이 훨씬 자연스럽고 귀중한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정말 그 글이 말하는 것처럼 아이 낳는 것과 그림을 그리는 것이 같은 일이라면 -아기 낳는 일에 대해서 내가 감히 그렇게 말해도 될는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어쩌면 그것이 제가 제 일에 목숨을 걸고 극단적으로 매달리는 이유일지 모르겠습니다. 비록 아직은 그림에 대해 조금밖에 이해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은 확실하지만요. 그래도 그림만이 저의 과거와 저의 현재를 이어주는 유일한 끈인 것 같습니다.
지금 제가 사는 마을에는 많은 화가들이 살고 있습니다. 옆집에 사는 가족은 미국에서 왔다고 하는데 밖에서든 안에서든 그림을 열심히 그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직 그들의 그림을 보지는 못했지만 저에게는 보통 사람들이 그리는 그림은 좀 약하다고 느껴지곤 했던 것 같습니다.
테오와 제수씨와 조카는 지난 일요일 날 이곳에 왔습니다. 그리고 여기 의사 가셰 씨의 집에서 같이 점심을 먹었습니다. 그리고 나의 작은 조카는 여기서 '동물의 왕국'을 처음 본 모양입니다. 여기는 고양이 여덟 마리, 개 세 마리, 그리고 닭, 토끼들, 오리들, 비둘기들이 꽤 많이 있거든요. 조카가 이 모든 걸 확실히 이해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지만요. 그래도 조카는 꽤 좋아 보였습니다. 그리고 테오와 제수씨 조Joe도요. 이렇게 동생네 가족과 가까이 지낼 수 있다는 것이 저에게는 매우 안심이 되는 기분입니다. 어머니도 테오네 가족을 곧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편지 보내주신 것 다시 한번 감사합니다. 어머니와 동생 윌 모두 잘 지내길 바랍니다.
마음으로 끌어안으며, 당신이 사랑하는,
빈센트.
1890년 6월 12일
인상주의와 고흐 이후의 미술 세계 - 20세기의 모더니즘 페인팅
이 장에서는 고흐의 삶과 예술, 그리고 그 이후의 여파에 대해 살펴보았다. 근현대의 미술은 인상주의가 그 첫 기틀을 마련했고 이후 고흐와 같은 위대한 예술가들에 의해 점차 채워져 나가게 된다. 이후 근현대 미술세계는 계속 강조했던 것처럼 다양성이 확대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미술을 조금이라도 공부한 사람이라면 들어봤을 표현주의, 야수주의, 입체주의, 팝아트, 추상표현주의, 초현실주의, 다다이즘, 미니멀리즘 등과 같은 새로운 사조들, 그리고 피카소, 뭉크, 잭슨 폴록, 샤갈, 에곤 쉴레 같이 수많은 뛰어난 예술가들이 다양하게 활동하는 시기이다. 보통 '20세기 미술'이라고 부르는 근현대미술은 수많은 예술가들이 새로운 예술들을 폭발적으로 창조하는, 미술사에 전례 없는 창조의 시대이다.
한편 이 새로운 근현대의 미술세계는 관람자에게는 곤혹스러운 시대이기도 하다. 미술이 더 이상 뻗어나갈 곳이 있을까 싶을 만큼 다양하게 창조되는 시기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관객의 입장에서는 점점 미술의 이해가 어려워지는 시기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다양성 가운데 큰 줄기
이렇게 미술이 다양하게 발전하는 가운데 근현대 미술사의 중앙을 관통하는 가장 굵은 흐름 하나를 찾을 수 있는데 이는 '모더니즘 페인팅Modernism Paintings' 즉, 근대 회화의 발전사이다. 모더니즘 페인팅은 미리 요약하자면 인상주의 이후 약 100년의 기간 동안 '회화의 정답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의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었다. 회화에 정답이라는 것이 정말 있는 것인지는 쉽게 말하기 어렵지만 이 과정은 수많은 예술가들과 평론가들에 의해 마치 건물을 세우듯 차근차근 완성되어왔다. 근대 회화의 발전사, 즉 모더니즘 페인팅에 대해서는 다음장에 이어서 살펴보도록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