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pressionism
근현대미술의 시작, 인상주의
근현대의 미술은 인상주의Impressionism로부터 시작된다. 이 시기의 유럽 사회는 1789년 프랑스 시민혁명 이후 새로운 시대로 진입하고 있었다. 혁명을 통해 과거 세상의 주인이었던 왕과 귀족들은 몰락하기 시작했고 평범한 시민들이 시대의 주인공으로 천천히 등장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귀족 중심의 과거와 시민중심의 미래라는 서로 다른 두 세계가 서로 뒤섞여 공존하는 것처럼 혼란스럽고, 또 희망 섞인 시대였을 것이다. 이 혼란스러운 시대의 분위기 속에서 수많은 젊은 예술가들은 파리로 하나 둘 모여들어 가난한 삶을 이겨내며 새로운 그림들을 그리기 시작한다. 이 젊은 화가들이 그리기 시작한 새로운 그림들은 이후 근현대 미술의 방향을 결정짓게 되는데, 인상주의는 그 첫 시작이 되는 사조이다.
고전 미술의 폐기
사람들은 보통 미술 하면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라던가, 루벤스나 푸생 같은 같은 고전 화가들의 아름다운 그림들을 떠올리는 경우가 많다. 이런 명화들이 수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 유명한 것은 여전히 사람들을 감동시킬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현대인들 중에 여전히 모차르트나 베토벤 같은 18세기의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이렇게 '사실적인 아름다움'을 강조하는 고전 회화는 15세기 르네상스부터 19세기까지 거의 400년 동안 서양 미술사를 지배해 왔다. 서양의 수많은 대형 미술관들이 미술품들로 흘러넘친다고 표현해도 될 만큼 많은 수의 미술품을 소장하고 있는 것은 고전 미술이 오래 지속되어 온 덕에 많은 수의 작품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이렇게 수세기 동안 유럽을 지배해 왔던 고전 미술은 인상주의의 등장 이후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 위의 두 그림의 차이에서 알 수 있듯이, 인상주의 이후부터는 과거와는 전혀 다른 느낌의 그림들이 그려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인상주의 화가들은 수백 년간 유럽 미술을 지배하던 '사실적인 회화'의 전통을 완전히 폐기시킨 것이다. 단적으로 표현하면 '모나리자'나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와 같은 명화들은 역사에서 더 이상 등장하지 않는 것이 된다.
아름다운 시대의 아름다운 삶을 살았던 예술가들
역대 미술 경매에서 가장 비싸게 팔린 그림 20개를 나열하면 거의 절반 정도가 인상주의 이후 50년 남짓의 짧은 시기에 집중되어있다. 벨 에포크belle Epoque(아름다운 시대)라고 불리기도 하는 이 시대의 미술들이 유독 비싼 이유는 미술사적으로 근현대 미술을 시작하는 기념비적인 작품들이 탄생한 시대라는 점, 또 인상주의 이후의 화가들 한 명 한 명의 삶 자체가 처절하고 아름다웠던 만큼 사람들의 관심을 많이 받았다는 점 등이 가치에 적용되는 것으로 보인다. 이 화가들이 살던 시대의 분위기를 떠올려 본다면 아마 영화 '타이타닉'(실제 타이타닉이 침몰한 해는 1912년이다)의 배경으로 나오는 시대, 말하자면 전형적인 근대의 모습이라고 생각하면 틀리지 않을 텐데, 귀족 문화의 흔적이 아직 남아있지만 근대의 시민들이 깨어나기 시작하는, 혼란스럽지만 한편으론 고풍스러운 시대인 것이다. 이 시대를 살아간 인상주의 화가들은 대게 가난하고 힘들게 그림을 그렸지만 그들이 죽고 나서 역사에서 가장 비싼 그림들로 팔린다는 것은 한편으론 아이러니하다.
인상주의의 탄생의 배경 – 카메라의 등장
그렇다면 이렇게 근현대라는 새로운 시대의 미술의 시작이 된 인상주의는 어떻게 탄생하였을까. 보통 인상주의의 시작은 근대의 사진기의 발명과 연결시켜서 해석한다. 사진기가 발명되면서 사실적으로 그리는 것 위주였던 고전회화가 밀려나기 시작했고 그 반작용으로 인상주의가 탄생했다는 것이다.
고전 회화에서 '사실적인 묘사'가 중요했던 이유는 대부분의 화가들이 귀족들의 초상화를 그려주거나 그들의 대 저택을 장식할만한 그림을 그려 주면서 생계를 유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어떤 뛰어난 화가도 기술적인 측면에서 사진기보다 더 실제 같은 그림을 그릴 수는 없다. 말하자면 화가들은 카메라와의 실력 경쟁에서 밀리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근대에 사진기의 발명 이후 예술가들은 새로운 그림의 방법을 찾기 시작하게 된다. 실제와 똑같이 그리는 능력만 가지고는 사진기와 경쟁이 되질 않으니, 역설적으로 '사실적인 묘사를 포기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인상주의는 '사진기의 발명'이라는 시대 변화에 주저앉은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방식으로 변혁을 시도한 것이다.
과거에 없던 그리는 방법
그렇다면 고전회화와 다른 방식, 즉 사실적인 묘사를 포기한 그림은 어떻게 그려야 할까? 당시의 예술가들의 입장이 되어서 생각해 봐도 이에 대한 대답은 쉽게 알 수가 없다. 전에 없던 새로운 그리는 방법은 누가 알려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렇게 스스로 무에서 유를 창조해야 하는, 어둠 속에서 바늘을 찾는듯한 막연한 상황 속에서 인상주의자들은 매우 독특하다고 밖에 말할 수 없는 방법을 생각해 낸다. 이 방법은 '빛을 직접 그린다'는 것이었다. 그림은 결국 어떤 대상을 보고 그리는 것인데, 우리가 보는 것은 '대상에 반사된 빛'을 보는 것이므로 빛을 그린다는 것이다. 하지만 빛을 직접 그린다는 표현은 직관적으로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이는 무슨 뜻일까?
빛을 그린다
빛은 우리 주변에 항상 존재하지만 현대 과학에서도 빛에 대해 완전히 이해하고 있지는 못하다. 넓은 의미에서 에너지 정도로는 이야기할 수는 있겠지만 빛은 분명히 우리 주변에 항상 존재하지만 손을 잡을 수는 없는 알 수 없는 '그 무엇'이다. 과학자들은 이런 귀신같은 빛의 존재를 밝히기 위해 노력해 왔는데 가장 먼저 빛에 대해 물리적으로 이해하기 시작한 과학자는 바로 만유인력으로 유명한 아이작 뉴턴Isaac Newton이다. 뉴턴은 빛을 프리즘을 통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태양빛은 원래 모든 색의 빛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고, 그 빛이 프리즘을 통과하면서 원래 가지고 있던 색들이 분화하여 빨주노초파남보로 보이는 것이다.'
이 뉴턴의 빛의 물리학을 계속 따라가 보면 우리가 사물을 '보는 것'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예를 들어 우리가 사과를 빨간색으로 보는 것을 두고 과거의 사람들은 사과 자체에서 '빨간색 빛이 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것을 뉴턴의 빛의 물리학으로 이해해 보면 '사과는 빨주노초파남보의 빛 중에서 빨간색만 반사시키고 나머지의 빛은 흡수하기 때문에 우리 눈에는 반사된 빨간색으로만 보이는 것이다'라고 해석할 수 있게 된다. 지금에야 이렇게 무엇을 '본다'는 것의 물리적 의미는 중학생만 되어도 다 알고 있지만 과거의 사람들은 이를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정리해 보면 우리가 무엇을 본다고 하는 것의 정확한 의미는
'반사된 빛이 우리의 눈의 망막에 맺히는 것'
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무엇을 본다는 것은 사실 '반사된 빛'을 본다는 것이다. 인상주의는 이 빛의 물리학을 바탕으로 '빛을 그리는 그림'을 탄생시키게 된다.
인상주의의 대표적 예 - 모네의 성당 그림
그렇다면 '반사된 빛을 그리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구현해야 할까. 왼쪽은 인상주의의 대표화가 클로드 모네의 성당 그림이다. 그런데 모네가 그린 그림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유럽의 그림들과는 조금 다르다. 색도 불명확하고 전체적으로 뿌옇게 그려져 있으며 윤곽선 또한 선명하지 않다. 인상주의 그림을 처음 보는 사람이라면 아마 매우 정신없이 느껴질 텐데 모네는 왜 이런 방식으로 성당을 그린 것일까.
모네의 생각을 이해하려면 과거의 그림과 비교해 보면 된다. 오른쪽 고전회화에서 성당을 보면 벽면을 회색으로 칠했는데, 이는 성당 건물 자체가 회색 벽돌로 만들어져 있기 때문이다. 누구라도 위와 같은 성당을 크레파스로 그리라고 하면 회색 크레파스를 집어서 성당 전체를 회색으로 칠할 것이다. '회색 벽돌로 지어진 성당은 회색으로 그려야 한다' 당연한 생각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인상주의자인 모네는 접근방식이 조금 달랐다. 모네는 대상의 본래 색이 아닌 순간 반사되어 자신의 눈에 비치는 빛을 그대로 그려내려고 했다. 그러니까 성당의 회색 벽돌색 그 자체보다는 햇빛이 성당에 반사되어 우리의 망막에 맺히게 될 때의 빛의 색을 그려내려고 했던 것이다. 쉽게 말하면
'노을빛이 져서 회색 성당이 붉은색으로 비치면 붉게 그리는 것'
이다. 그건 너무 당연하지 않냐고 반문할지 모르겠지만 고전 화가들의 생각에는 회색 성당의 본질은 회색이므로 회색으로만 그리는 것이 정답이었고, 노을이 졌다고 붉은색으로 칠하면 틀린 그림이 된다. 고전의 화가들은 눈에 보이는 대로가 아니라 일정 정도 '알고 있는 대로' 그렸기 때문이다.
인상주의 화가들은 과거의 화가들처럼 알고 있는 대로 그린 것이 아니라 정말 자신의 눈에 비친 순간적인 빛을 포착하기 위해서 계속 관찰하면서 그림을 그렸다. 모네는 여러 장의 루앙 성당 그림을 그린 것으로 유명한데 같은 성당이라도 낮인지 저녁인지에 따라 다른 빛으로 보인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모네는 말년에 거의 눈이 멀었는데 이렇게 빛을 포착하려고 너무 장시간 관찰하다 보니 햇빛에 의해 망막이 많이 손상되었기 때문이다.
덧붙이자면 이 시기를 전후로 야외에 나가서 이젤을 세워놓고 그림을 그리는 방법이 보편화하게 된다. 현대에는 학교에서 하는 사생대회처럼 밖에서 나가서 풍경을 그리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는데, 사실 밖에서 그림을 그리는 것은 낭만을 위해서라거나, 혹은 소풍처럼 즐기면서 그리기 위해서 시작된 것은 아니었다. 인상주의자들은 실제로 빛의 변화를 직접 관찰하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에 물감과 캔버스(그림을 그리는 빳빳한 천)를 들고 밖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얀색을 쓰지 않은 하얀색 드레스
한 가지 그림을 더 살펴보자. 왼쪽의 그림은 모네가 자신의 아내와 아들을 그린 그림이다. 이 그림에서 하얀 드레스의 표현을 보면 인상주의가 의도했던 바를 명확히 이해할 수 있다.
오른쪽 그림에서 처럼 고전회화에서는 하얀 드레스는 일단 하얗게 그리는 것이 정답이었기 때문에 흰색만을 사용했다. 하지만, 왼쪽 모네의 그림을 잘 살펴보면 흰색 드레스지만 오히려 흰색은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모네는 드레스를 하늘색, 연보라색, 노란색 등으로 섞어서 그렸는데 흰색이라는 드레스의 본래 색을 고려하지 않고 주변에 반사되어 눈에 비친 색을 그대로 그린 것이다. 분명 흰색은 전혀 사용하지 않았지만 우리는 여전히 그녀가 흰색 드레스를 입고 있다고 인식할 수 있다. 실제로 맑은 날 밖에서 하얀색 옷을 입은 사람을 유심히 관찰해 보면 푸른 하늘빛이 흰색 옷에 비쳐 약간 푸르게 보인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모네는 그렇게 '반사된 빛'을 그리려고 한 것이다.
또 한 가지는 붓질이다. 모네의 그림에서 풀밭의 표현을 보면 풀들을 자세히 묘사하지 않았고 정신없는 붓질로 색만 찍어 놓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인상주의의 그림들은 주로 대상을 자세하게 묘사하기보다는 물감을 캔버스에 바로바로 찍어버리는 방식을 택했다. 이는 인상주의자들에게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는데, 이유는 시간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빛을 그려내려는 인상주의자들 입장에서 태양 빛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한다. 따라서 빛이 변하기 전에 최대한 빨리 그려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인상주의 그림들은 주로 형태가 뚜렷해 보이지 않고, 부분만 봐서는 정확히 무엇을 그린 것인지 알 수 없는 그저 혼란스러운 붓질의 집합처럼 보이기도 한다.
무엇이 더 진실한가?
모네의 그림은 얼핏 보면 정신없어 보이지만 우리에게 매우 생동감 있는 아름다움을 전해준다. 반대로 고전 미술에서처럼 풀과 꽃들을 하나하나 완벽하고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것이 우리가 실제로 풀밭을 바라볼 때의 감상을 더 정확히 전달한다고 할 수 있을까? 정확한 묘사가 반드시 정확한 감상을 전달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공원에 산책을 나와 저 여인과 아이를 바라본다고 가정했을 때 우리는 여인과 아이의 자세한 모습, 옷 색, 주변 환경과 같은 모든 것을 이미지 그대로 저장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방금 본 모네의 그림에서 우리는 저 여인이 무슨 색 리본으로 목을 장식했었는지 기억하고 있을까? 우리는 무엇을 볼 때 그 순간적인 '느낌'을 기억할 뿐 구체적인 이미지를 하나하나 저장하듯 기억하는 것은 아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맑은 날 햇빛이 아내에게 반사되어 눈이 부시는 그 순간적인 '인상'을 전달하기를 바랐던 것이 모네의 생각이었고 부분 부분만 보면 이상한 색들이 의미 없이 섞여있는 것 같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오히려 우리가 느끼는 감상을 더 정확하게 전달한다고 말할 수도 있다. 이것이 인상주의의 아름다움이다.
우리는 바다를 파란색으로 '알고 있다'
한 가지 예만 더 살펴보자. 모네의 '인상, 해돋이'는 미술사에서 최초의 인상주의 그림으로 알려져 있다. 이 그림은 분명 바다를 그린 것이지만 우리가 보통 '알고 있는' 바다의 색으로 그려지지 않다. 그렇다면 바다의 색은 무엇이라고 해야 할까. 사람들은 보통 바다를 파랗다고 생각하는데 어린아이들에게 바다를 그려보라고 하면 파란색으로 전체를 칠하곤 한다. 이는 고전 화가들도 마찬가지였는데, 고전 회화에서의 바다는 대부분 파란색으로 그려져 있다. 하지만 인상주의의 모네는 우리가 '파랗다고 알고 있는' 바다의 색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오로지 물결에 반사되어 자기 눈에 순간 들어오는 색에만 집중해서 그렸다.
실제로 바닷가에 가서 아침 해가 뜰 때쯤의 바다를 관찰해 보면 물안개 가득한 아침의 바다는 위 모네의 그림처럼 회색빛으로 뿌옇게 보인다. 그래서 별로 자세히 묘사하지도 않은 모네의 그림은 오히려 우리가 해가 뜰 때 느끼는 아련한 감상을 더 비슷하게 전달하게 된다. 인상주의자들은 이렇게 묘한 그림을 탄생시켰다.
인상주의를 통해 나타난 인식의 전환
인상주의자들은 이렇게 '빛을 그린다'라는 새로운 아이디어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대상을 관찰하고 그대로 그리려고 했다는 점에서는 고전 미술의 기본 태도와는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히려 더 그 본질에 충실하려고 했던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문제는 인상주의자들에 의해 그려진 결과물들이 당시의 관점에서 보면 너무도 혁신적이었다는 것이다. 인상주의의 '빛을 그린다'는 아이디어를 통해 탄생된 그림들은 현대의 일러스트 디자인이라고 해도 될 만큼 독특한 느낌을 준다. 그 시대의 사람들 입장에서는 과거에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완전히 새로운 이미지들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인상주의 그림을 처음 본 화가들은 이 새로운 그림들에 충격을 받고는 고전 회화처럼 대상을 곧이곧대로 그리는 것이 미술의 전부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하게 된다. 고전 미술의 획일성으로부터 탈출하는 길을 찾은 것이다.
인상주의 이후 - 다양성의 탄생
다양성의 탄생, 이것이 인상주의 이후 나타난 변화이다. 인상주의를 처음으로 접한 당대의 젊은 화가들은 수백 년간 이어져왔기 때문에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믿었던 고전회화의 전통으로부터 벗어나기 시작했다. 미술이 사실적 묘사 중심이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탈출하면서 무한한 가능성이 열리기 시작하게 된 것이다. 이때부터 예술가들은 각자 자신의 생각에 따라 새로운 그림들을 그리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유럽 미술사에서는 마치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것처럼 양식을 규정할 수 없는 다양한 종류의 미술들이 우후죽순 등장하기 시작한다. 프랑스의 루브르 박물관이나 오르세이 미술관, 영국의 대영박물관, 미국의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등 서양의 대형 미술관에 가면 이 시기의 유럽 회화들을 감상할 수 있는데, 인상주의 직후부터 나타나는 그림들을 보면 고전의 명화들과는 다른 수많은 다양한 형식의 그림들이 갑자기 대거 등장하는 것을 알 수 있다.
후기 인상주의 Post-impressionism
인상주의 이후 나타난 다양성의 현상은 인상주의 직후 미술인 후기 인상주의 Post-impressionism에서부터 나타나기 시작한다. 위의 세 그림은 대표적인 후기 인상주의 화가 고흐, 고갱, 세잔의 그림이다. 이 인상주의 직후 3명의 화가의 그림 보면 3인 3색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각자 전부 완전히 다른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이 변화는 지금의 입장에서 보면 큰 변화가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모나리자와 같은 사실적 고전회화가 수백 년 동안 지속되어 오던 과거의 시점에서 보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다양한 그림들이 갑자기 탄생하기 시작한 것이다.
미술사에서 후기 인상주의를 왜 후기 인상주의라고 부르게 되었는지 자체로 당시의 상황을 말해준다. 후기 인상주의는 인상주의처럼 어떤 하나의 아이디어로 통일된 미술 형식을 부르는 말이 아니다. 후기 인상주의는 인상주의 이후의 여러 예술가들이 각자 자기만의 회화를 발전시켜 나가는 현상을 통칭한 것인데, 인상주의 직후에 화가들의 그림에서 나타나는 현상들이 워낙 다양하고 복잡하기 때문에 그냥 '인상주의 이후 나타난 여러 그림들'이라는 의미에서 억지로 하나의 집합으로 묶어놓은 것이다. 예컨대 위 3명의 예술가를 후기 인상주의로 묶은 것은 서로 스타일이 비슷해서 묶은 것이 아니라 그저 '인상주의 직후에 나타난 여러 화가들'을 한 다발로 묶어서 미술사에 억지로라도 정리해 놓기 위해 그렇게 부른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고흐, 고갱, 세잔 3명 외에도 역사에 남지 못한, 수많은 인상주의 직후의 '후기 인상주의 화가들'이 있었다. 실제로 미술관에서 인상주의 직후 1880년대부터 1900년까지 20년간의 미술들을 유심히 살펴보면, 이게 당시에 그려진 회화가 맞나 싶을 만큼 알 수 없는 독특한 회화들이 섞여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들이야 말로 미술이 인상주의 직후 다양하게 분화하는 현상을 잘 보여준다. 다만 이들이 보통 후기 인상주의 화가로 알려지지 않은 것은 고흐, 고갱, 세잔처럼 후대에 유명해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변화하기 시작한 근현대의 미술 - 서사성의 붕괴
이렇게 인상주의 이후 시작된 다양성의 현상은 우리가 사는 현대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현대미술이 다양성을 갖게 된 것은 결국 인상주의가 그 기틀을 마련했다고 볼 수 있을 텐데 아마 모네를 주축으로 한 인상주의자들은 자신들이 이 정도까지 미술사를 바꾸게 될 줄은 몰랐을 것이다.
'다양성의 급증'은 다르게 표현하면 '서사성의 종말'이다. 인상주의 직후인 후기 인상주의자들의 그림에서부터 이미 서로 완전히 다른 형식들로 거미줄처럼 뻗어 가고 있으니까, '시간의 흐름에 따라 하나의 이야기로 진행되는 것'을 기본으로 하는 서사성이 사라지는 것이다. 인상주의 이후 이어졌던 여러 사조들을 대략적인 시대 순으로 나열하면 아래와 같이 된다.
인상주의 1870 - 1920
후기 인상주의 1886 - 1920
표현주의 1893 – 1930?
야수주의 1905 - 1910?
입체주의 1907 - 1920
위의 사조 구분에 나타나는 것처럼 인상주의 이후부터는 한 사조가 완전히 시대를 점령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사조가 동시 다발적으로 탄생하게 된다. 인상주의가 첫 발을 내디딘 후부터는 보통 10년 사이에 여러 개의 사조가 동시 다발적으로 탄생한 후 계속 중첩되어 진행되는 것이다. 그리고 1900년대로 접어들면 연도, 국가, 지역을 초월해서 더 다양성이 급증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다.
하지만 누군가는 위의 순서를 보고 '짧지만 6~7년 단위로 서사적 순서가 있는 것 아닌가?'라고 반문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렇게 짧은 단위로 수많은 새로운 미술들이 갑자기 탄생하는 것은 꽃들이 사방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피는 것에 가깝지 꽃들이 하나씩 순서대로 피고 지는 느낌은 아니다. 인상주의 이후부터는 각 예술가들이 사방에서 수많은 다양한 미술을 꽃 피우기 시작하니까 순서대로를 기본으로 하는 서사성은 사실상 별 의미가 없게 된다는 것이다.
서사성의 붕괴와 개인성의 강화
서사성이 사라지면서 반대로 강해지는 현상은 개인성이다. 이는 인상주의 이후 여러 예술가들이 각자 예술 활동을 이어가는 방식에서도 알 수 있다. 고전시대의 화가들은 자신이 속한 시대의 흐름에 맞추어서 그림을 그리는 것이 보통이었다. 쉽게 말해 바로크 시대에 태어난 화가는 일생동안 바로크 화풍만을 그리는 것이다. 하지만 인상주의 이후의 화가들은, 고흐나 세잔 같은 경우는 사조 같은 것 자체를 아예 상관하지 않고 시골에서 은둔하며 홀로 그저 자신만의 그림을 그리기도 했고, 피카소 같은 화가들은 위의 세 개의 그림에서 보이는 것처럼 여러 사조와 형식들을 넘나들며 마음대로 그림을 그리기도 하였다. 이것은 인상주의 이후의 예술가들이 시대의 흐름에 얽매이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예술가들이 각자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발전시키는 '개인성'이 강화되는 현상으로 볼 수 있다.
인상주의가 근현대 미술사의 미래를 결정했다
다양성의 급증, 인상주의는 이렇게 획일적이었던 고전시대의 문을 닫고 근현대미술로 진입하는 첫 문을 열게 된다. 인상주의자들이 고전 미술의 시대를 의도적으로 끝내려는 목적이 있었던 것 같지는 않지만 결과적으로 과거 수백 년간 지속된 명화들의 시대를 종료시키고 근현대 미술에 새로운 길을 열어 놓았다. 그리고 이 흐름은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하지만 인상주의가 만들어낸 다양성은 어쩌면 시대의 요구나 필연이었을지도 모른다. 인상주의의 탄생은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보통 사진기의 탄생과 고전 미술의 붕괴로 그 시작을 설명하기는 하지만 결과를 보면 전체적인 사회 변화의 흐름과 거의 같은 방향으로 움직인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1789년 시민혁명 이전 시대에는 시대의 주인공이 왕과 귀족들이었기 때문에 예술문화도 이들만을 중심으로 획일화하여 발달하여 왔다. 하지만 시민혁명 이후, 시대의 주인공이 시민으로 바뀌면 상황이 달라지게 된다. 고전시대에는 소수의 왕족이나 귀족들이 세상의 주인공이었다면, 민주주의 시대에는 수많은 개별 시민들이 각자 세상의 주인공이 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평범한 시민들의 삶의 방식이 다양한 만큼 그 시대의 예술에서도 다양성이 나타나는 것은 결과적으로 앞뒤가 맞기 때문이다. 인상주의자들이 시민중심의 시대라는 철학적 고민을 통해 인상주의를 탄생시킨 것도 아니었고, 인상주의 이후에 다양성이라는 흐름이 생길 것을 예측한 것도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시대에 부합하는 '필연'이 되어버린 것이다. 예술이 항상 시대 흐름과 같은 방향으로 움직여 왔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인상주의 이후의 다양성의 탄생은 다양한 시민들의 개별 삶이 꽃피는 시민의 시대에 꼭 나타나야 할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봐야 할지도 모른다.
수많은 예술가들의 탄생
인상주의로 인해 근현대 미술에 다양성의 흐름이 생긴 이후부터는 별처럼 많은 새로운 예술가들이 탄생하게 된다. 이 수많은 예술가 중 꼭 살펴봐야 할 예술가가 있는데 이는 빈센트 반 고흐 Vincent Van Gogh이다. 근현대 미술사에서 가장 위대한 예술가 중 한 명으로 꼽히는 고흐는, 본인은 끝없이 가난하고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후대 예술가들에게 어떤 '예술가의 표본'으로 작동하면서 근현대 미술사에서 중요한 상징으로 작동하게 된다. 인상주의라는 사조가 근현대라는 새로운 시대의 첫 사조였다면, 고흐는 근현대의 예술가의 전형을 상징하는 역할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