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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세계의 충돌, 사자심왕 리처드와 살라딘

by 박신영
사자심왕 리처드 1세, 영국 연대기, 13세기


동방과 서방의 충돌

십자군 전쟁은 역사상 가장 종교색이 강한 전쟁이었지만 이상하게도 그 정반대의 인본주의 르네상스를 탄생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렇다면 십자군 전쟁의 무엇이 르네상스를 일으킨 것일까? 르네상스의 탄생은 헤르만 헤세의 소설 <데미안>에서의 표현처럼 새가 딱딱한 알껍질을 깨고 나오는 것과 비슷하다. 인간이 중세의 '신의 질서'라는 딱딱한 알껍질을 깨고 나오려고 했던 것이다. 그 딱딱한 알껍질을 깨는 역할을 했던 것이 바로 십자군 전쟁의 충돌이었다. 십자군 전쟁의 충돌은 기독교 문명과 이슬람 문명이 칼로 충돌한 것이었으니 상당히 파괴적이었는데 어쩌면 그렇게 파괴적이었기 때문에 천년동안 굳어진 딱딱한 중세의 껍질에 균열을 낼 수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문명의 충돌도 결국 인간들에 의해 이루어진다. 200년동안 총 8차에 걸쳐 이어진 십자군에는 수많은 영웅들이 등장하지만 그 중 두 진영의 충돌을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은 사자심왕 리처드와 중동의 살라딘이다. 두 사람은 각자의 진영을 대변하며 서로 대척점에 서 있는 존재들이었지만 중세에 드물게 둘 다 합리적인 지도자였다는 공통점 또한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 합리적 두 지도자의 대결 과정에서 처음으로 르네상스의 빛이 보이기 시작한다.


성도는 다시 이슬람의 손에

1차 십자군 원정으로 십자군은 예루살렘의 '성도 탈환'에 성공했다. 하지만 곧 이슬람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이는 이슬람의 당연한 반응이었다. 이슬람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기독교인들은 그저 자신들의 땅을 침략한 침략자들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이슬람인들은 1차 십자군 원정 때 기독교인들에게 빼앗겼던 도시들은 하나씩 재점령하며 원점으로 돌려놓기 시작했다. 다급해진 기독교인들은 2차 십자군을 일으켜 병력들을 보냈지만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원정 공격은 원래 쉽지 않은 법이다.

이 시점에 이슬람쪽에는 영웅 살라딘Salah ad-Din Yusuf이 먼저 등장했다. 살라딘은 혼란스러운 이 시기에 실력으로 지방 태수의 자리에서 술탄의 자리까지 올라간 인물이었다. 그는 단순히 능력만 뛰어난 것이 아니라 높은 덕과 지혜를 모두 갖춘 지도자이기도 했다. 그는 십자군의 공격으로 흩어져 있던 이슬람 세력을 자신의 지휘 아래 재집결시켰고 뛰어난 전략과 전술로 여러 전투에서 기독교인들에 대한 승리를 거둔다.

1187년 7월, 살라딘은 역사에 '하틴 전투'로 알려진 전투에서 십자군의 주력 병력을 완전히 궤멸시켜 버린다. 그리고 같은 해 9월, 살라딘은 예루살렘을 재탈환했다. 살라딘은 예루살렘의 재탈환 과정에서 88년 전 1차 십자군이 보여주었던 학살 같은 만행은 결코 저지르지 않았다. 실력과 인품, 양쪽 모두에서 승리했다고 해야 할까. 그렇게 살라딘에 의해 성도 예루살렘은 다시 이슬람의 손으로 돌아갔다.


3차 십자군

유럽의 기독교인들은 성도를 다시 빼았겼다는 소식에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당시 교황이었던 우르바누스 3세는 이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아 사망했다고 교황청은 기록하고 있다. 지금 우리가 보기엔 예루살렘이 원래 주인에게 돌아간 것에 불과하지만 당시 유럽인들은 성도를 '악의 무리'에게 다시 빼앗긴 것으로 이해했던 것이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유럽의 기독교인들은 교황의 지시가 없었는데도 급한 마음에 각 국에서 알아서 전쟁 준비를 시작했다. 프랑스에서는 필리프 2세가, 신성로마제국(독일)에서는 붉은수염으로 알려진 프리드리히 1세가, 그리고 영국에서는 역사에 '사자심왕Lionheart'로 알려진 리처드 1가 십자군을 떠나겠느라고 신에게 맹세했다. 그렇게 3차 십자군이 다시 결성되었다.

이때 신성로마제국의 프리드리히 1세는 먼저 편지로 살라딘에게 선전포고를 했다. 내용은 '성도 예루살렘'을 반드시 무력으로 되찾아갈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 만약 귀하께서 탈취한 땅을 돌려주지 않고 그곳에서 행한 수많은 모독의 흔적을 제거하지 않는다면, 나는 그래야 할 필요성을 군사력을 통해 깨닫게 해 줄 수밖에 없다. 따라서 지금 선언한다. 1190년 11월 1일, 우리 두 사람은 전장에서 맞서게 되리라."


그런데 이 선전포고에 대한 살라딘의 답신편지가 인상 깊다.


"우리 땅을 먼저 침공한 것은 그리스도교다... 만약 이 서신을 읽은 후에도 전투로 결판을 내려는 당신의 생각에 변함이 없다면 우리는 감연히 그에 맞서겠다... 다만 당신이 우리와의 평화를 원한다면, 그럴 가능성은 충분하다. 우선 나는 수하의 부대장 세명을 티루스, 트리폴리, 안티오키아에 파견하여 무조건 성문을 열게 할 것이다. 대신 당신에게는 하틴전투 이후 우리 손에 돌아온 '성십자가'와 포로 전원을 돌려보내겠다... 무엇보다 성지를 찾는 그리스도교도 순례자들의 안전을 보장할 것을 서약한다."


'만약 당신이 우리와의 평화를 원한다면'이라고 말하는 살라딘의 태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살라딘의 입장에서 보면 십자군은 자신들의 고향을 짓밟은 침략자들에 불과했다. 게다가 당시 살라딘은 '하틴 전투'에서 십자군 본대를 궤멸시키며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그런데 살라딘은 그런 침략자 십자군들을 향해 먼저 ‘공존’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슬람이나 십자군이나 양쪽 모두 서로를 악마로 여기던 그 시대에, 살라딘은 처음으로 열린 태도를 보여준 지도자였다.


리처드 vs 살라딘

그런데 영국, 프랑스, 독일, 이렇게 유럽 주요 3개국의 왕들이 호기롭게 나섰음에도 실제로 3차 십자군에 참여한 것은 영국의 리처드 혼자 뿐이었다. 우선 살라딘에게 선전포고했던 붉은수염 프리드리히 1세는 황당하게도 중동으로 가는 길에 강에 빠져 죽고 말았다. 행군하다 얕은 강에 빠진 것인데 사인은 익사가 아닌 차가운 수온에 의한 급성 심장마비였던 모양이다. 이슬람인들 입장에서는 이것이야 말로 신(알라)의 뜻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프랑스 왕 필리프 2세는 리처드보다 먼저 중동 땅에 도착했지만 몸이 아프다면서 전쟁 도중에 다시 프랑스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다. 그렇게 해서 3차 십자군은 이슬람의 살라딘과 기독교측의 사자심왕 리처드가 맞붙는 느낌이 되었다.

그런데 리처드는 유독 십자군 전쟁사에서 인기가 많은 인물이다. 이유는 재미있게도 그가 왕임에도 전투를 너무 잘하는 '천재적인 검사'였기 때문이다. 중세의 왕과 귀족들은 '싸우는 자Those who fight'들이었으니 왕이 직접 칼을 들고 싸우는 모습이 드물지 않았지만 리처드는 십자군 역사에서 최고의 무인으로 알려져 있다. 전장에서 칼을 휘두르는 그의 모습을 두고 이슬람 사람들은 '악마'라고 불렀다고 한다.


L'armée_de_Saladin.jpg 살라딘의 군대, 프랑스, 14세기의 삽화


아르수프 전투

리처드의 초인적인 전투력은 살라딘과 있었던 여러번의 전투에서 드러났다. 가장 대표적인 전투는 3차 십자군 초기에 있었던 아르수프 전투다.

중동에 도착한 리처드의 3차 십자군은 우선 과거 십자군의 항구였던 아코 항구를 수복하고 그대로 남하하기 시작했다. 당연히 예루살렘을 다시 정복하기 위해 내려 가는 길이었다. 살라딘이 이 남하하는 십자군을 덥치면서 둘 사이의 전투가 처음으로 벌어졌다.

살라딘은 원래 뛰어난 무인이라기보다는 천재적인 전략가에 가깝다. '하틴 전투'에서 십자군을 궤멸시켰을 때도 물 보급로를 먼저 끊은 후 목마름에 절망한 십자군들을 포위 섬멸하는 전략을 썼다. 중동의 척박한 땅에서 물 보급만 끊을 수 있다면 상대의 전력을 크게 약화시킬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살라딘은 이번에도 비슷한 전략을 구사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를 간파한 리처드는 일부러 오른쪽에 바다를 오른쪽에 두고 해변 쪽에서 보급을 유지하면서 내려왔다. 살라딘은 보급을 끊기 위해 계속 육지쪽으로 리처드를 유인했지만 리처드는 절대로 응하지 않았다.

전략이 먹히지 않자 살라딘은 정면 승부를 결정했다. 본토에서 싸우는 살라딘은 원정군인 리처드에 비하면 두배가 넘는 병력을 가지고 있었다. 때문에 평원에서 덥친다면 '하틴 전투'에서 처럼 포위하여 한번에 리처드의 십자군을 섬멸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살라딘은 리처드가 넓은 평원에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아르수프 근처의 평원에 다다르자 공격 명령을 내렸다. 우선 살라딘은 가장 강한 기병들로 리처드 후방부대를 집중 공격했다. 후방을 무너뜨려 우선 진형을 붕괴시키려고 한 것인데 이는 마치 사자가 들소의 엉덩이만 집요하게 공격하여 들소의 균형을 무너뜨리려는 것과 비슷하다. 선두에 있던 리처드는 뒤쪽이 공격당한다는 소식을 듣고 이대로 후방 진형이 무너지면 그대로 포위될 수도 있다는 판단에 자신의 친위 부대를 이끌고 후방을 지원하러 가게 된다.

그런데 리처드가 지원하러 가자 갑자기 전황이 뒤바뀌어 버렸다. 후방을 공격하던 살라딘의 기병들이 리처드의 본대가 등장하자 갑자기 밀리기 시작한 것이다. 기병이 밀리자 살라딘의 진형은 흔들리기 시작했고 오히려 수비하던 십자군이 역으로 공격하는 형태가 되어버렸다. 이후 전황은 리처드가 이끄는대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결국 살라딘은 두배가 넘는 병력을 가지고도 리처드에게 패배하고 말았다. 이 전투에서 살라딘은 1만, 리처드는 고작 700의 병력을 잃었다고 한다.

전투가 끝나고 분노한 살라딘은 장수들을 불러놓고 왜 전선을 이탈해 술탄의 명예를 더럽혔느냐고 꾸짖었다. 모두 고개를 숙인 가운데 한 태수가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술탄의 비난은 타당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교 측 장병들의 갑옷과 투구는 너무도 단단하여 화살과 검, 창 조차 튕겨냈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만만치 않았던 것은 한 기사의 혈투였습니다. 그 기사는 최전선에서 말을 타고 우리 기병들을 닥치는 대로 베었을 뿐 아니라, 오른손에 검을 들고 왼손으로 말을 몰면서 전투가 시작될 때부터 끝날 때까지 연신 자기 군사들을 질타하고 독려했습니다. 그 한 사람이 우리 병사를 얼마나 많이 쓰러뜨렸는가만 봐도 정말 대단한 남자라 할 수 있지만, 검을 들고 최전선을 종횡무진하던 그 기사가 곧 전투의 향방을 결정했다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사자의 화신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용맹한 그 기사를 병사들은 멜렉 리처드라고 불렀습니다."


'멜렉'은 이스라엘에서 왕을 부르는 말이다. 이때부터 리처드는 '사자심왕'이라고 불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전략적으로 보면 살라딘은 잘못한 것이 없었다. 바다를 등지고 남하하는 적군을 병력의 우위를 이용해 포위하는 것은 너무도 정석적인 전략이었기 때문이다. 살라딘은 '지략'은 최선이었지만 리처드의 '무력'에 지고 말았다.


야파 전투

또 다른 전투 중 하나는 야파 항구에서의 전투다. 리처드는 부족한 병력을 모으기 위해 위쪽 아코 항구로 잠시 이동한 적이 있었다. 원정 중인 십자군은 항상 병력 부족에 시달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때 살라딘은 리처드가 없는 틈을 타 리처드의 아내와 여동생, 그리고 소수의 병력이 지키고 있던 야파 항구를 습격했다. 살라딘 답지 않은 비겁한 행동이었지만 리처드의 실력을 확인한 이상, 살라딘은 정면대결보다는 어떻게든 이길 수 있는 다른 방법을 찾았던 게 아닐까 싶다.

살라딘은 2만의 병력으로 곧 야파 공격을 시작했다. 아코에서 소식을 전해 들은 리처드는 급하게 배를 타고 야파로 출발했다. 급하게 내려오느라 소수의 병력만 대동했는데 그중 핵심 전력인 기사는 17명 밖에 없었다고 한다. 리처드도 그 17명의 기사 중 한 명이었다. 그리고 본대는 따로 행군해서 남하하도록 지시했다. 일단 급한불을 끄고 나중에 본대와 합류하겠다는 전략이었다.

리처드의 소수 별동대는 곧 야파 항구에 도착했다. 이때 야파를 수비하던 한 수도사가 아직 배 위에 있는 리처드에게 헤엄쳐 달려가 야파 요새의 수비병력들이 처절하게 항전중이라는 소식을 전해주었다. 이야기를 들은 리처드는 도끼 한 자루를 들고 바다로 뛰어들더니 그대로 요새로 돌진했다. 기록에는 ‘선박용 신발’을 신고 돌진했다고 하는데, 전투화가 아니라 그냥 배 위에서 신는 슬리퍼 비슷한 신발이었던 모양이다. 육지에 올라선 리처드와 소수의 병력들은 순식간에 해안가를 점령했다. 그리고 리처드는 수많은 이슬람 병사들을 똟고 돌파하더니 야파의 수비대가 버티고 있던 요새 내부에 도달하는 데 성공한다. 눈 깜짝할 사이에 요새에는 영국 깃발이 펄럭였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살라딘은 믿을 수가 없었다.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도대체 그들이 어떤 작전을 세웠길래! 우리의 보병과 기병이 훨씬 우세하지 않은가!"


살라딘이 어이없어하는 것도 당연하다. 리처드는 단 3 필의 말과 소수의 병력으로 수많은 이슬람 병사들이 지키고 있는 해안가와 요새를 순식간에 장악해 버린 것이다. 리처드는 말 그대로 초인적인 전투력을 가진 왕이었다. 그리고 곧 전열을 정비하고는 고슴도치 형태의 진형을 짜서 살라딘의 기병들을 막아내기 시작했다. 살라딘의 기병들은 숫자는 많았지만 리처드의 수비 덕분에 점점 줄어들 뿐이었다.

이를 지켜보던 살라딘은 귀신처럼 이슬람 병사들을 베는 리처드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리처드가 마치 '낫으로 곡식을 베듯' 적병의 머리를 계속 내려치며 나가자, 자기 동료들의 죽어가는 모습에 겁먹은 이슬람 병사들이 뒤로 물러나면서 리처드에게는 더 넓은 공간이 생겼다. 이슬람 측은 이를 이렇게 기록했다.


"... 그날 영국 왕이 한 손에는 창을 꼬나쥐고 우리 군을 좌에서 우로 전체를 휩쓸고 다녔지만 단 한 명의 병사도 앞으로 나와서 그와 감히 싸우려고 하지 않았다."


이때 이슬람 사람들은 리처드를 보면서 저건 '악마'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런데 혈투를 벌이던 중 리처드의 말이 공격을 받았고 리처드는 낙마했다. 그러자 이를 본 살라딘은


"그토록 용감한 용사가 땅바닥에서 싸워서는 안 될 일이다."


라며, 아랍산 준마 2 필을 병사를 통해 보내주었다. 리처드는 살라딘에게 받은 말에 올라타더니 다시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이슬람 병사들을 도륙하고 다니기 시작했다.

살라딘은 전황을 지켜보았지만 결국 이길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리고는 전군 퇴각명령을 내린다. 열 배의 병력으로도 리처드에게 패배한 것이다. 정작 십자군의 본대가 도착한 것은 그로부터 이틀 뒤였다고 한다.


충돌속에 깨지는 껍질

십자군 전쟁사에서 사자심왕 리처드가 유독 인기가 많은 것은 이처럼 영화를 보는 듯한 초인적인 전투력을 가진 왕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괴물같은 리처드를 상대해야하는 살라딘은 실제로 3차 십자군 기간 내내 고전을 면치 못하게 된다. 그런데 이렇게 두 지휘관이 서로 티격태격 싸우는 과정에서 재미있는 현상이 나타나게 된다. 중세의 상식을 깨는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리처드에서 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리처드는 살라딘에 연전연승하는 중이었지만 전쟁 중에 한가지 문제가 생기게 된다. 바로 본국에서 동생 존이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때문에 리처드는 왕의 지위를 잃지 않으려면 속히 본국으로 돌아가 반란을 진압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그래서 살라딘과 전쟁을 이어가기는 했지만 한편으로는 계속 살라딘과 협상을 시도했다. 협상의 내용은 당연히 성도 예루살렘을 기독교측에 넘기기만 한다면 바로 전쟁을 멈추고 돌아가겠다는 것이었다. 물론 살라딘은 예루살렘을 내줄 생각이 없었지만 리처드와 정면승부는 어려우니 일단 협상을 해볼 필요는 있었다. 그런데 이 과정이 재미있다. 협상 과정에서 리처드가 황당한 제안을 한 것이다. 리처드는 협상 대표로 온 살라딘의 동생 알 아딜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슬람의 남자들은 여러 명의 아내를 두기도 한다는데, 당신이 내 누이를 첩으로 들이는 건 어떻소?”


리처드는 '우호적인 협상'을 맺기 위해 자신의 여동생과 살라딘의 남동생을 결혼시키려고 한 것이다. 기독교인이 이슬람인과, 게다가 다른 사람도 아닌 온 유럽이 증오하는 살라딘과 결혼 동맹을 맺으려 한 것이다. 리처드는 당시 중세의 기독교인들로서는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제안을 한 셈이다. 그리고는 알 아딜 당신이 내 여동생과 결혼하고 나면 이참에 기독교로 개종하면 되는 것 아니겠냐고 시원하게 덧붙였다. 황당한 제안이었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지만, 누구보다 리처드의 여동생 조안나는 불같이 화를 내었다고 한다. 자기를 어떻게 이슬람 남자에게, 그것도 첩으로 시집보낼 생각을 할 수 있는 거냐고. 소식을 전해 들은 살라딘은 그저 웃고 말았다고 한다. 그런데 리처드는 진심이었던 모양인지 다음번 회담에서는 다시 물었다.


“조카도 한 명 있는데… 조카는 어떻소?”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살라딘 다시 한번 크게 웃었다고 한다. 이 사건은 리처드라는 인간의 도량을 보여주는 하나의 해프닝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십자군 전쟁으로 양쪽 사람들의 인식이 조금씩 변화하고 있는것을 보여주기도 한다. 아직 때는 중세다. 기독교인들은 여전히 이슬람을 '악의 무리'라고 칭했고 이슬람인들도 '불신자는 죽여도 된다'고 공언하며 기독교인들을 죽이던 그런 시대였다. 서로를 악마화했던 이 시대에 여동생을 이슬람에 시집보낼 생각을 하는 리처드나, 이를 듣고 그저 빙그레 웃고 말았던 살라딘의 태도는 상당히 이질적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다. '미운 정이 든다'는 말도 있지만 어쩌면 죽을 듯이 서로 싸우면서 한편으로는 서로에게 점점 익숙해지기 시작했던 것은 아닐까. 십자군 전쟁 과정에서 일어난 충돌이 천년동안 이어져온 고립된 사고방식을 조금씩 깨기 시작한 것이다.


예루살렘의 포기

리처드의 3차 십자군은 리처드가 결국 본국으로 돌아가야 했기 때문에 허무하게 끝나버리고 만다. 그래서 매번 전투에서 이겼음에도 강화 요청을 먼저 한 쪽은 리처드였다. 살라딘 입장에서도 전투로는 리처드를 이길 방법이 없으니 차라리 강화를 통해 리처드를 본국으로 보내는 것이 합리적인 선택이었을 것이다.

리처드와 살라딘은 강화를 통해 다음과 같이 합의했다. 우선 리처드는 예루살렘을 포기하기로 했다. 대신 살라딘에게 앞으로 예루살렘으로 성지순례를 오는 모든 기독교인들의 안전을 보장해 달라고 요구했다. 기독교의 입장에서는 결국 성도 탈환에 실패한 셈이지만 잠시라도 평화를 가져올 수 있는 강화였다. 그리고 둘은 강화 과정에서 한가지 재미있는 이벤트도 열었다. 누구의 아이디어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리처드가 살라딘의 동생 알 아딜의 아들에게 기사 작위를 내려준 것이다. 기독교인 왕이 '악의 무리' 이슬람 소년에게 기사 작위를 내려주다니, 중세로써는 상상도 하기 어려운 모습이 두 사람 사이에서 다시 한번 연출된 것이다.

결과적으로 리처드는 성도 탈환을 실패한 채로 중동을 떠나 영국으로 돌아가게 된다. 하지만 이렇게 두 지도자가 맺은 협약은 결과적으로 향후 26년간 중동에 평화를 가져다주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충돌하던 십자군 전쟁시대에 보기 드물게 평화로운 시기였을 것이다.



Church_of_Fontevraud_Abbey_Richard_I_effigy (1).jpg 퐁트브루 성당에 있는 사자심왕 리처드의 무덤. 12세기
Damascus_statue_for_Saladin_0367 (1).jpg 다마스쿠스 성채 앞의 살라딘의 승마상, 1993년


신 중심에서 인간 중심으로

총 8차에 걸쳐 진행 십자군 전쟁과정에서 살라딘과 사자심왕 리처드의 격돌은 가장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다. 이는 둘의 스타성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무엇보다 두 지도자의 태도에서 중세적 사고를 벗어나려는 태도가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종교가 아닌 인간을 더 중시하는 태도, 즉 인본주의적 태도가 처음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아무도 사자심왕 리처드나 살라딘을 '르네상스인'으로 보지는 않는다. 그들은 어디까지나 중세를 살아가던 중세인이었다. 하지만 리처드가 자신의 누이를 살라딘의 동생에게 시집보내려고 했던 것, 그리고 살라딘의 조카에게 기사작위를 내리는 것, 또 반대로 살라딘이 이슬람의 땅에 침략한 기독교인들에게 먼저 '평화'를 말했던 것 모두 상대방을 동등한 인간으로서 대하는 태도다. 중세는 어디까지나 '신의 질서'에 의해 움직이는 시대였다. 그런 시대에 두 사람은 서로를 '인간의 질서' 안에서 이해하려고 한 것이다. 이들은 어쩌면 전쟁을 통해 격하게 몸으로 부딪히면서 오히려 상대방에 대한 평범한 인간성을 깨닫기 시작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충돌에서 중세의 도그마가 깨지기 시작한다. 종교에 매몰되어 있던 세계관에서 벗어나 인간 중심의 르네상스로 가는 작은 문틈이 열리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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